1959년에 완벽하게 "가짜"로 정리되었던 문제
9년이나 지난 1968년 국내 역사교과서에 처음 서술
"외세의 음모로 어쩔 수 없이 식민지 됐다" 한국인들 위로하는 장치로 악용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존 오소프 미 상원의원이 만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후보와 존 오소프 미 상원의원이 만나고 있다.

 

김용삼 대기자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이재명은 지난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존 오소프 미국 상원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거론했다. 반미주의자인 이재명이니 이 밀약을 좋게 평했을 가능성은 없다. 이 후보는 “일본에 한국이 합병된 이유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통해 승리했기 때문이고, 결국 나중에는 분단이 된 게, 일본이 분단된 게 아니라 한반도가 분단돼서 전쟁의 원인이 된 것은 사실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발언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육군 장관 태프트(후에 미국 대통령)를 일본에 파견하여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가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는” 밀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자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백과’에는 “1905년 6월 러일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태프트는 필리핀 방문 전에 일본에 들러 가쓰라와 회담하여, 미국의 대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조건으로 승인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속의 내용과 진짜 태프트-가쓰라 조약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추적해 본다.

#. 진짜 태프트-가쓰라 조약은 이렇게 진행됐다

1905년 7월 27일,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미 전쟁부장관이 일본을 방문, 당시 일본 총리인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만나 “극동아시아 평화 유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 주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 필리핀 문제.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범의사가 없다”라는 내용에 동의했다.

둘째, 극동아시아 평화유지 문제. 가쓰라는 이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 영국, 미국 상호간에 긴밀한 이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공식적으로 일본과 미국이 협약을 맺거나, 비공식적으로 밀약을 맺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발언했다. 태프트는 이런 협정이 없어도 미국인들은 일본과 영국의 극동아시아 정책과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미국이 미일동맹을 맺건 맺지 않건 행동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셋째, 한국(대한제국) 문제. 가쓰라는 한국이 옛날 상태로 돌아가 일본이 또 다른 외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발언했다. 태프트는 이 의견에 동의했고, 개인 의견이지만 러일전쟁의 논리적 결말은 일본군이 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가지고 일본의 허락 없이 외교를 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극동아시아 평화에 직접 기여하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러한 대화를 나눈 후 태프트 장관은 자신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가 있는 국무부장관이 아니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본과 외교나 협상을 체결하라고 지명 받은 적도 없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태프트는 가쓰라 총리의 논의 요청에 악의가 없다고 느꼈다. 태프트는 사적 의견을 표출한 뒤, 이 대화 내용을 각서 형태(memorandum of conversation)로 정리하여 루트(Elihu Root) 미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 결과 각서가 작성되었고 태프트 장관은 그 각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보로 송신했다.

이 각서를 보고받은 루스벨트는 “귀하가 말한 모든 것을 확인한다고 가쓰라에게 말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이것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역사적 사실이다.

#. 일본의 어용 언론이 퍼트린 ‘가짜 뉴스’

태프트와 가쓰라의 대화는 일본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대화의 실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반관반민(半官半民) 언론이었던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의 보도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가쓰라 다로 총리의 심복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운영했는데, 고쿠민신문은 1905년 10월, 태프트와 가쓰라가 일·영·미 동맹을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또 일본이 필리핀 통치를 허락하는 대로 한국 통치를 허락받았다고 뉴스를 보도했다. 이 뉴스가 미국의 여러 신문에도 게재되자 루스벨트와 가쓰라는 “그런 일은 없었다. 미국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을 교환했다는 보도는 가짜 뉴스”라고 직설적으로 부인했다.

#. 1924년 미국 학자 타일러 데넷의 엉터리 과장 해석

이 각서의 원본을 발견해 불을 지른 주인공은 미국 역사가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었다. 그는 1924년 미의회도서관의 루스벨트 대통령 자료에서 태프트 장관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보를 발견했고, 이를 추적하여 문제의 ‘태프트-가쓰라 각서(memorandum of conversation)’를 찾아냈다.

그는 태프트의 허락을 받아 1924년 미국 역사저널 『현재의 역사(Current History)』에 ‘루스벨트와 일본 사이의 밀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문제의 논문에서 데넷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미국 외교사상 가장 눈여겨볼만한 밀약”이라고 흥분된 용어로 주장했다.

그런데 사실 이 전문은 “그러한 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메모”(agreed memorandum)였음에도 불구하고 데넷은 너무 흥분했는지 학문적 자세는 팽개치고 “밀약(agreement)”으로 엉터리로 과장 해석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미국의 여러 학자들이 데넷의 논문을 연구 분석한 후 “agreed memorandum”을 “agreement”로 오역하여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맞교환하는 밀약을 맺었다고 주장한 것은 착각이고, 이것이 미국이나 일본의 정책을 바꿨다는 것도 데넷의 오판이라고 비판했다.

자신의 논문에 대한 심각한 오류가 여기저기서 제기되자 데넷은 추가 연구 끝에 1년 후 자신이 제기했던 최초의 주장을 철회하고 “태프트-가쓰라 대화를 밀약으로 해석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라고 발언했다. 자신의 오류를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태프트-가쓰라 대화를 “일·미·영 동맹의 증거”라고 요란하게 보도했던 일본 언론들도 이 메모에 대해 오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없었다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필리핀 순방도중 일본에 들러 1905년 7월 27일 목요일 아침 일본 수상 가쓰라와 동아시아 문제 현안에 대해 논의한 대화록은 그 형식과 내용의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논란의 초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1905년 7월 29일 태프트가 가쓰라와의 대화내용을 미 외무장관 루트에게 보고한 전문이 미일 간의 법적인 구속력을 지닌 비밀협정이었는가?

둘째, 과연 이 전문에서 미일 양국이 필리핀과 한국을 교환하기로 약속한 내용이 있었는가?

이를 둘러싼 논쟁은 1959년 미국의 역사학자 에스더스(Raymond A. Esthus)의 논문 「태프트-가쓰라 협정-사실인가 신화인가?」(Raymond A. Esthus, 1959: 46-51)에 의해 소위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신화에 불과했음이 밝혀졌다. 에스더스는 형식적 측면에서 이 전문은 단순한 회담에 대한 보고서일 뿐, 태프트와 가쓰라가 서명한 협정이 아니며, 협정 체결은 육군 장관의 권한을 벗어난 국무장관의 업무 범위이므로 만일 태프트가 협정에 서명했다면, 그는 월권을 한 것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내용 측면에서도 에스더스는 태프트-가쓰라 회담은 후자의 간청에 의해 불가피하게 전자가 사견(私見)을 전제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이를 회의록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한 내용이었다고 밝혀냈다. 미국이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에게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나 구절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논증한 것이다. 서구 학계에서는 1959년을 기점으로 ‘태프트-가쓰라 신화’에 대한 환상은 깨졌다(최덕규, 「“태프트-가쓰라 협정”에 대한 러시아와 한국 및 일본 역사교과서 서술 분석」, 『사회과교육』 제49집 제4호,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 2010, 67~83쪽).

#. 한국 학계의 한심한 작태

국내에서는 1993년 이우진 중앙대 교수에 의해 에스더스의 논쟁이 소개되었고(이우진, 「러일전쟁과 한국문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8권 2호, 1993. pp.346-348.) 최덕수 고려대 교수에 의해 ‘태프트-가쓰라 비망록’ 관련 자료들이 소개되었다(최덕수 외 지음,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열린책들, 2010, pp. 504-520).

이우진은 「러일전쟁과 데오도어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의 대한국정책」이란 논문에서 “학문적 차원에서 불행한 것은 미국의 많은 역사·정치학자들이 1959년 레이먼드 에스더스가 이 해석에 반론을 제기했을 때까지 한국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도 데넷의 논리가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라고 통탄했다. 당시 어떤 기록에도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일본을 방문해 극동문제를 토론하거나 타결하라는 훈령이나 명령도 없었다는 것이다(이우진, 「러일전쟁과 데오도어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의 대한국정책」,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6집 제2호, 2005, 145~19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중고등역사교과서에는 여전히 ‘태프트-가쓰라 협정’의 신화가 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협정조문까지 제시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태프트-가쓰라 협정’이 실존했던 역사적 사실로 믿도록 만들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서구학계에서 이미 1959년에 완벽하게 “가짜”로 정리되었던 이 문제가 9년이나 경과한 후인 1968년에 국내 역사교과서에 처음 서술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1950년대 국내 역사교과서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태프트-가쓰라 협약’이 1968년 이원순의 『문교부 검정 (인문계 고등학교) 국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서구학계의 정리와는 정반대로 이 협약으로 “미국이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에게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했다”고 서술했다(이원순, 1968: 210).

이는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된 한국을 외국의 간섭 없이 병탄했다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역사서술은 국사교과서 편찬과정에 있어 서구학계의 연구 성과에 대한 천착보다는 일본 자료와 업적들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라고 최덕규는 비판했다(최덕규, 앞의 논문).

#. 이재명을 비롯한 좌익들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떠벌이는 이유는?

미국 역사학자 데넷의 실수는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지만 1930년대부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밀약”을 악용하여 미국이 한국을 식민지로 넘겨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결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한국은 멀쩡하게 잘 하고 있었는데 외세의 음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식민지가 되어버렸다고 한국인들의 심리를 위무하는 장치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의 좌익들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앞장세워 기회가 날 때마다 미국을 공격하는 반미의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동영이 통일부장관 시절 “2005년은 중요한 날로서 해방 60주년이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가쓰라-태프트 밀약 100주년”이라고 주장한 것이 그 사례다.

이재명을 비롯한 한국의 좌익 학자·언론·정치인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런 발언을 통해 미국은 여차 하면 한국을 다른 외세에 넘겨버릴, 믿을 수 없는 나라이니 한미동맹에서 이탈하여 민족자주·민족공조를 통해 북한과 손잡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는 선동이 그 주요 목적 아니겠는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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