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 만들기』 저자 함재봉의 개념사 시리즈 첫 번째
"한국의 민주주의는 복수의 도구에 불과"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정치인은 정치를 해야 하는데 오로지 경제정책만"
"민주주의는 인류에 친숙한 전제주의나 가부장제와는 다른 지극히 '인위적' 체제"
"정치는 어렵다...개념도 어렵고 만들기도 실천하기도 지속하기도 어렵다"

함재봉, 『정치란 무엇인가?』(함재봉의 개념사 1), 에이치(H) 프레스, 20,000원.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즈의 저자 함재봉 박사(한국학술연구원장)가 새로운 개념사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하며 그 첫 번째 성과를 내놨다. 함 박사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민주주의 정치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러곤 "한국에는 정치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한 '정치'(politics, 폴리틱스)라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하며 정치와 경제, 그리고 정치와 철학을 분리해 논한다. 

이 책은 정치에 관하여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는 핵심들을 효과적으로 요약해놓은 책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의 공사(公私) 구분이 아니라 서양의 고대 그리스에서의 공사 구분으로 시작하는데 "그리스인들은 의미 있는 삶, 이상적인 삶이란 자신과 동등한 '자유인'들과 함께 영위하는 '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며 정치의 영역이 공적 영역, 경제의 영역이 사적 영역으로 분류됐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정치의 영역에서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은 엄격히 구분되는 두 영역을 혼돈하는 것"이라며 "부패(Corruption)라는 말의 어원은 합성어로 두 영역을 혼돈시켜서 파괴한다는 뜻이다. 정치가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정치가 돈을 벌기 위한,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부패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인들이 공사 구분없이 공직을 무언가를 해먹는 자리라 여기는 것과 이에 대해 '내 편'이기만 하면 무감각해지는 국민들의 인식을 보노라면 한국 사회가 얼마나 근본없는 사회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서두에서 시민의 정치화와 폴리스의 민주화 과정을 정리해낸 저자는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시민과 민주주의가 탄생하고 시민이 민주주의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정치'를 발명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정치사상의 탄생'이다.

책은 고대 그리스 고전들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전근대 동아시아 정치와 비교한다. 저자는 중국과 일본, 조선과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태고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정치와 민주주의, 공적 영역을 발명했다"며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인 <오레스테이아>를 대표적 사례로 독해한다. 신들조차 절대적인 '선', '공정성'은 없다며 대립하는 상황에서 고대 그리스 시민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도시국가의 법정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 재판 결과에 승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승자가 패자를 끝까지 설득한다. 적폐로 몰아세우며 정적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포용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봉건사회가 민주적 토론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자유시민들의 공동체(폴리스)로 거듭나는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바로 이 무렵 아테네 정치를 싫어했던 소크라테스가 나오고 이런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정치에 혐오와 불신을 깊이 갖게 된 플라톤이 나온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확고부동한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수사학을 발휘해 상대를 설득하는 걸 '그림자 놀이'라 비하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가 '정치'와 함께 '철학'도 발명했다면서 "정치와 철학은 상극이다. 정치가 비극적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면 철학은 이상주의에 기반한다"고 설명한다. 형이상학에 기반한 영원불변의 제국은 쉼없이 논쟁하고 연설하고 선거운동해야 하는 시민들의 공동체인 공화국과는 대척점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서구 기독교의 출현으로 '정치'가 패배하고 '철학'이 승리한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약술한 뒤 피렌체 인문주의 전통에서의 마키아벨리를 주목한다. 고대 로마가 이상이었던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왕정과 과두정, 그리고 교황청의 전제주의보다 나은가를 설파하게 됐는지 설명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정치의 부활은 오래지 않아 마르크스에 의해 꺾이게 된다. 마르크스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경제를 중심에 놓고 전복시킨다. 정치든 국가든 모두 경제의 반영에 불과하고 계급 투쟁으로 모순이 해결되면 이 모두는 소멸된다는 정치사상이 전 세계를 휩쓸기에 이른다. 유럽문명에서 태동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자 한 마르크스와 달리 니체는 소크라테스 형이상학 이전의 고대 그리스로 회귀할 것을 부르짖은 정치사상가다. 니체는 중세 기독교 사상까지 덧붙이게 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뒤로 하고 한계투성이인 인간 실존의 문제와 '정치'를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재발견하자고 주장했다.

저자는 정치에서 이상적이고 완벽한 것을 추구해선 안 된다고 결론내린다. 그는 "'정답'은 수학과 이론, 이념 속에만 있지 현실, 특히 정치에는 없다는 얘기"라며 인간은 완벽해질 수 없고 완벽한 진리를 찾아낼 수도 없는 존재라 강조한다. 지금까지 쭉 짚어온 대로 "정치는 최선의 차선책을 찾는 예술"이고 이 과정은 모두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는 기자에게 "오늘날 한국 정치인 중에 말을 잘하는 사람, 토론을 잘하는 사람이 없다"며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어떤 주제든 피하지 않고 논쟁하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가 서두에서 말한 대로 한국에는 정치가 없고 정권교체라는 복수의 악순환만 있다. 전근대적 원시성이다. 정쟁을 하며 기껏 '정책 대결' 운운하지만 한국의 정치인들에겐 경제 정책만 있다. 그것도 '정치'와 '경제'의 장이 서로 구분되는 것도 모르고 그래야 하는 줄도 모른다. 저자는 "이 둘은 엄연히 구별되는 별개의 영역이다. 비단 자유시장경제 논리 때문만이 아니다"라며 "정치인은 성장이냐 분배냐 등의 큰 틀만 잡아줄 뿐 경제는 경제 주체들에게 맡겨야 한다. 정치논리가 경제에 개입하면 시장은 왜곡되고 오히려 민생은 도탄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고금의 명연설을 수도 없이 인용하며 '말' 잘하는 정치인이야말로 얼마나 탁월하고 소중한가를 강조한다.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부록에 고대 그리스부터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의 연설까지를 수록한 이유다.

저자인 함 박사는 출간한 이번 책의 내용을 펜앤드마이크에서 총 5회에 걸쳐 강의할 예정이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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