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냉전冷戰은 반의 반 밖에 안 맞는 말이다. 그 기간 동안에도 열전은 쉰 적이 없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영토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제 3세계와 중동에서 피 튀기는 대리전을 치렀다. 군사적으로 상대를 압도했다고 전쟁의 승패는 완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경제, 이데올로기, 문화에서 우위를 차지해야한다. 소프트웨어에서도 승리를 거두어야 최종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 전쟁이 벌어진 곳은 한반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우월 경쟁을 미국과 소련은 대한민국과 북한을 통해 벌였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대한민국과 미국의 승리다. 현실에서 승리했다고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의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아직은 현실화되지 않은 가까운 미래까지를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소련의 우군은 서유럽의 좌익 지식 분자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을 천박한 자본주의의 나라, 이기심의 제국으로 몰아 세웠다. 자본주의를 인류가 기필코 혁파해야 할 악으로 규정했고 도덕성 높은 사회주의 경제를 칭송했다(사르트르). 붉은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 전쟁을 문화로 확장했다. 문화를 바꾸는 것으로 체제전복을 노리는 그람시주의다. 이는 2차 대전 후 미국에 패권을 넘겨준 서유럽의 집단적인 원한이기도 했다. 장구한 인문학 정신으로 충만한 서유럽 세계는 역사 짧은 신생 제국 미국을 무시하고 경멸했다. 무시와 경멸의 뿌리는 깊다.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는 “신은 어리석은 자들과 주정뱅이 그리고 미국인을 특별히 돌보신다.”며 야유했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 운이 좋고 지정학적으로 유리해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질투 섞인 조롱이었다. 총과 햄버거와 코카콜라의 나라 미국은 대책 없이 내몰렸다. 이렇다 할 방어 전략도 없었다. 심각한 것은 이게 미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은 개인주의와 자유라는 가치를 신봉하는 자유세계 전체가 당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당 조직과 당파 문학 
 
  문화전쟁의 첨병은 좌익적 문화관을 전파하려는 서유럽 쥐새끼들(프랑크푸르트학파)이었다. 그러나 주적은 따로 있었다.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단순하게 전체와 집단을 중시하는 무지막지한 발상으로 보시면 안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레닌이 발명했다. 1905년 레닌은 ‘당 조직과 당파 문학’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예술은 겉으로는 완전한 자유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술가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진정한 현실 대신 파편적이고 일부에 불과한 현실을 사회의 진정한 모습인양 팔아댄다고 비판했다. 이 명제에 기반을 두고 유럽 좌익분자들은 오랜 시간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전 방위에서 역사적, 과학적, 미학적 탐구를 실현했다. 이들이 마르크스를 기형적으로 확장해서 만들어낸 게 비판적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공산주의 리얼리즘이라는 3단계 발전론이다. 서유럽의 문화, 예술인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빠져들었고 일부는 아예 공산당에 가입했다(피카소). 문화에서 미국은 소련에 총체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특명,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잡아라.  
 
  무럭무럭 자라는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CIA였다. 흔들리는 유럽과 거기서 넘쳐흐른 시뻘건 물이 미국으로 번질까봐 노심초사했던 CIA지만 불행히도 이들이 치룰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문화에 문외한이던 CIA는 용병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관계자들을 끌어들였다. 우리가 흔히 모마MOMA라고 부르는 그 미술관이다. CIA의 목표는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대비되는 미술을 육성해 이를 미국과 자유진영의 미술, 더 나아가 전 세계 미술을 주도하는 흐름과 대세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구상미술이다. 모마 관계자들이 정치와 이념이 없고 극단적으로 개인적이며 양식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정반대되는 추상표현주의를 대항마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정이다. 게다가 추상표현주의는 사회주의 미술을 실제보다 더 낡고 고루하며 완고한 동시에 예술적으로 제한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신기한 기능까지 있었다. 공작은 비밀리에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추상표현주의를 띄우는 것, 다른 하나는 이 사조에 반발할 것이 틀림없는, 미국 내 보수 세력의 둔탁하고 굼뜬 미적 감각을 세탁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상미술이었다. 궁핍한 장면만을 골라 묘사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소재만 달랐지 장르는 같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리얼’했다. 이런 사람들을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표현주의에 호감을 가지도록 해야 했으니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세월과 문화를 완전히 외면하고 사는, 아직도 70년대 트로트를 최신 곡으로 아는 궁벽 산골 80대 노인을 방탄소년단의 팬으로 만드는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위해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대량으로 투입되었고 매스미디어가 달려들어 대중들의 인식을 조금씩 바꿔 나갔다. 매주 500만부를 발행하던 ‘라이프’지가 1949년 8월 ‘미국 미술의 빛나는 새 현상’이라는 특집으로 추상표현주의를 다룬 것은 그 절정이었다. 유럽에서 추상 표현주의 띄우기는 ‘문화적 자유를 위한 회의’라는 CIA 전위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1952년 파리에서 열린 ‘걸작의 향연’, 1955년 로마에서 열린 ‘젊은 화가들’이 대표적인 전시다. 전시가 끝이 아니다. 고가에 팔려야 주목 받고 사회현상이 된다. 미술 시장 큰손들이 이 역할을 했는데 싫을 게 없는 일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정부 예산이 들어가는 작업을 보며 추상 표현주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하지 못할 바보는 없었다. 록펠러는 무려 2,500점을 구매했는데 나중에 이 추상표현주의 미술품들의 가격은 최소한 2,500배 이상 올랐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참고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작가, 잭슨 폴록의 1948년 작품 ‘No.5’는 2006년 1억 4000만 달러에 팔리면서 피카소를 넘어섰다.  
 
문화 전쟁 완패, 무엇을 할 것인가 
 
  길고 은밀한 공작으로 추상표현주의는 50년대 말 최고의 미술 사조가 되었다.  미국은 실험예술, 진보적인 예술을 대변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얻었고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작업이 일정 단계에 오르자 그 뒤는 술술 풀렸다.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전 세계 미술가들은 당시 첨단이던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였고 제 나라로 돌아가 이를 퍼뜨리고 유행시켰다(우리나라도 비슷). 미술뿐이 아니었다. 추상표현주의의 압도적인 성공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른 예술 방면으로도 막대한 돈이 풀리고 공작이 진행됐다. CIA의 사례는 문화전쟁에서 완패한 혹은 최대한 우호적으로 말해 완패하는 중인 대한민국 보수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과제와 해결방안을 동시에 던져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방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패 다 까고 무슨 전쟁을 하나.   

(폴록의 ‘No.5’. 이런 난감한 그림이 한화 1,650억 원짜리라니 믿어지시나)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