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호남 혐오 넘어 아예 호남 증오로까지 번져...호남도 비슷한 분노와 이질감 갖게 돼
호남의 독특한 정치적 선택은 보다 심층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
지역에 내재한 지주-소작농 갈등 구조, 영남보다 사회적 갈등 위험도 컸다
해방정국에 6.25전쟁 등 거치며 처참한 유혈극으로 현실화
특히 좌우대립 극렬했고 규모도 컸던 전남이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 지지한 이유는?
왜 박정희 집권 이후 호남은 진보좌파의 아성 되고, 영남은 보수우파의 본향 됐을까
문제의 답을 찾아갈수록 '근대화'라는 우리 현대사의 핵심 화두에 다다르게 된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호남은 왜 그렇게 다른 지방과 다른가?”

필자가 가끔 받는 질문이다. 호남 출신이 아닌 분들이 호남의 강고한 민주당 지지에 대한 답답함이나 분노를 드러낼 때 주로 저런 표현이 나온다. 문재인 정권의 폭주에 대한 분노가 커지는 그만큼 그분들이 호남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도 커지는 게 사실이다.

심각한 것은 호남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이 단순히 정치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남 혐오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오랫동안 어쩌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현상이지만 최근에는 호남 혐오를 넘어 아예 호남 증오로까지 이어지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인 경고음이 울리는 단계이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에서는 ‘그 나라에 가려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표현이 일종의 관용구처럼 쓰이고 있다. 진지하지 않은 농담이긴 하지만, 이 표현에 담긴 함의는 간단하지 않다. 농담처럼 튀어나오는 발언 뒤에 자리잡은 호남에 대한 사회적 이질감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빙산의 일각이라고 할까,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은 수면 아래 더욱 거대한 분위기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호남도 정반대 측면에서 비슷한 분노와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장·차관 경력의 호남 인사들조차 “내가 전라도라고 해서 얼마나 설움을 당하고 차별 대우를 받았는지 아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소외와 차별에 대한 인식이 호남 출향민 2,3세에게까지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호남 출신들이 대한민국 최대의 유권자 집단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이런 정서적 동질감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강하고 질기게, 정치적 사회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호남인들끼리 느끼는 이 동질감이 커질수록 대한민국 다른 지역과 호남의 이질감은 더욱 극대화되고 적대화되는 악순환이 심화된다.

우리 세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호남과 나머지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민족, 다른 국가라는 적대적인 정체성이 고착화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은 북한이나 중국 등 적대적인 세력들에게 악용되기 매우 쉬운 조건이다. 자칫하면 대한민국 해체라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헤칠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일단 호남의 산업 등 경제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 현상은 보다 심층적인 사회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호남의 독특한 정치적 선택이 나오는 배경에는 호남의 경제와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것이 변화해온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1943년 6월 기준으로 호남에서 미곡을 500석 이상 수확하는 대지주의 숫자는 604명, 그들이 소유한 경지면적은 6만6796정보이다. 영남의 경우 대지주 숫자 422명에 4만4279정보이다. 지주 1인당 경지 규모는 호남이 110.5정보, 영남이 104.9정보이다(조선은행조사부, 『조선경제통계요람』, 조선은행, 1949. 이혜숙, 2008, 303쪽. 이택선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에서 재인용).

이 통계를 보면 호남이 전체 경지면적이나 대지주 숫자, 지주당 경작규모 등에서 영남을 압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町步)는 일제강점기에 사용한 토지의 넓이 단위로 1정보는 3천평이다.

1944년 기준으로 영남 인구가 전체 조선의 19.2%, 호남의 인구는 전체 조선에서 17% 비중이었다는 통계에 비춰보면 호남의 경우 농민의 구성비가 영남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호남이 경지면적은 영남보다 훨씬 넓은데 인구는 더 적다면 호남 농민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추정하는 게 자연스럽다. 같은 시대 같은 한반도 그것도 바로 인접한 지역 농업의 1인당 생산성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었다. 대지주와 소작농으로 구성된 사회구조는 필연적으로 첨예한 계급갈등을 낳게 된다. 즉, 호남의 인구는 소수의 대지주와 대규모 소작농의 양극화 구조였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갈등이라는 점에서 호남이 영남보다 훨씬 더 폭발의 위험도가 크고 예민했다는 얘기이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소작쟁의인 암태도 소작쟁의가 전남에서 발생했다는 것에서도 그런 배경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은 일제의 패망과 이어진 사회적 혼란기, 공권력의 공백 상태를 맞아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된다. 해방정국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이런 사회적 갈등의 폭발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그리고 6.25를 맞아 이런 갈등은 처참한 유혈극으로 현실화됐다.

6.25전쟁 당시 호남지역의 학살 피해자는 8만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 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그 가운데서도 전남의 피해자가 6만9787명으로 호남 지역 전체의 83%에 이른다(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1953년)』 1955, 212~213쪽). 이는 극심한 좌우대립의 결과로서, 그 근저에 해방 이전부터 이 지역에 내재해있던 지주-소작농 갈등구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6.25 당시를 기억하는 광주지역의 원로 한 분은 광주에서 좌우를 구분했던 기준으로 미 공군기에 대한 호칭을 들기도 했다. 미 공군기가 날아오는 것을 보는 보통 시민들은 “쌕쌕이다”라고 말하는 반면, 좌파 분자들은 “적기다”라고 표현하더라는 것. 그리고 미 공군기를 ‘적기(敵機, 적군의 비행기)’라고 부르던 인물들이 1980년 5.18 당시에도 시민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갈등은 6.25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쉽사리 진정될 수 없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대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고, 같은 집안 사람들끼리 좌우로 갈라진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뻔히 아는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전쟁이 끝났다.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그대로 자리잡고 살 수 있었을까?

좌익들의 경우 고향에 그대로 눌러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당시까지 켜켜이 쌓아온 원한의 당사자인데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좌파 세력과 인민군들은 북으로 쫓겨간 상태였다. 좌파의 핵심 인물들은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가거나 또는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됐지만 좌파 성향 사람들이 모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익명성이 보장된 도시 지역으로 숨어드는 것이었다. 호남에서도 특히 좌우대립이 극렬했고 규모도 컸던 전남의 많은 좌익들은 광주라는 대도시에 흘러 들어가 숨죽여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근대의 좌파 이념은 그 출발 단계부터 정치투쟁과 권력 쟁취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설계됐기 때문에 우파 이념에 비해 대중적 호소력이 강하고, 그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피니언리더의 속성을 갖기 쉽다. 6.25 이후 광주로 스며든 좌파 출신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죽여 지냈지만, 알게 모르게 지역사회의 분위기 특히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호남 사회의 저변에 흐르던 이런 분위기가 약간 특이한 형태로 표출된 사건이 있었다. 박정희가 5.16 이후 군에서 전역하고 처음 대선에 나선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일이다.

윤보선을 대선후보로 내세운 야당 민정당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관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것, 박정희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존경했다던 셋째 형 박상희(1946년 대구폭동의 주역으로 경찰의 총에 피격 사망)의 절친으로서 월북했다가 간첩으로 남파된 황태성과 접촉 의혹이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워 박정희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념 공세를 펼쳤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여론의 동향을 면밀하게 점검했던 김형욱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의 선거운동 초기에 호남의 여론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박정희에 대한 사상 공세가 거세지면서 호남에서는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급등하는 추세를 나타냈다고 한다. 야당의 사상 공세가 애초 의도와 달리 정반대 효과를 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호남에서 윤보선을 35만여 표 차이로 따돌렸다. 5대 대통령선거의 전국 집계에서 박정희가 윤보선을 겨우 15만여 표 앞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박정희의 승리에 호남이 기여한 몫은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식자들이 5대 대통령선거에서 호남이 박정희를 지지한 표면적 양상만 보고 호남의 보수적 본성을 읽곤 하는데, 좀더 깊은 맥락을 살펴보면 정반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시 호남은 박정희의 이력과 이념적 배경에 깔린 좌파적 요소를 읽고 거기에 지지를 보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해방 이전의 이념적 분포만 보면 영남이 호남보다 훨씬 좌익에 가까웠다. 일제 강점기에 대구가 ‘동양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것도 그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왜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집권 이후에 호남은 진보좌파의 아성이 되고, 영남은 보수우파의 본향이 됐을까.

6.25 당시 인민군의 치하에 들어갔던 호남에서는 처절한 좌우대립과 상호학살로 좌파 엘리트 지식인들이 대거 학살당했다. 목숨을 부지한 좌파 지식인들은 북으로 도주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는 호남 인재의 질적 양적 고갈 사태로 이어졌다.

영남의 경우는 좀 달랐다. 해방정국에서 대구폭동 같은 비극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6.25 와중에서 호남과 같은 처절한 내부 대립과 상호학살은 없었다. 이념적 리더들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굵직한 좌파 이념사건을 들여다보면 영남 출신 지식인들이 지도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대표적인 이념 사건인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도예종 등 8명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영남 출신이다. 이 사건은 전쟁의 참화를 피한 영남 좌익들의 영향력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이념사건인 남민전 사건에서도 조직의 리더였던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 중에서 이재문과 김병권 두 사람이 영남 출신이다.

해방 이전에 교육받은 영남 좌파 지식인들이 6.25전쟁에서 학살을 피해 살아남고 이후 좌파 이념사건의 지도자 역할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평범한 영남 출신들은 해방 이후 본격적인 개발 연대의 주역이 됐다.

일제 강점기의 경제 사정은 호남이 영남보다 훨씬 나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이 농지는 더 넓은데 인구는 적었고, 김성수와 현준호 등으로 대표되는 대지주 겸 기업가들의 활동으로 경제적 잉여도 더 많이 산출됐기 때문이다.

영남의 경우 경제적 여건이 호남보다 훨씬 열악했고, 그래서 만주 등 한반도 밖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다. 요즘 한국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들의 발음에서도 영남 억양이 강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흔하다. 영남 출신들은 경제적 곤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해외로 떠돌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국제적 감각과 시장질서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

해방 이후 귀국한 이들이 6.25의 참화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하고 대한민국 개발연대를 열어간 주역이 됐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보수의 중심이라는 영남의 정체성이 형성됐다. 호남의 경우 이와는 정반대 경로를 걸었고 그런 차이가 현재 호남의 정체성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여타 지역 사람들이 호남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은 이렇게 오랜 사회경제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 대하 드라마에 대해서는 해야 할 얘기가 더 많이 남아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개발연대 당시에 영남과 호남의 역할이 어떻게 나뉘었는지, 그 차이가 어떤 정치적 인식의 차이로 귀결됐는지, 김대중과 5.18은 이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할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를 파고들어가면 근대화라는 우리 현대사의 핵심 화두에 다다르게 된다. 호남과 대한민국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의 진짜 정체도 이 문제로 귀결된다. 현재 호남의 문제는 대한민국 근대화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결과이다. 그 소외와 배제의 결과가 역설적으로 호남의 내면에 각인되어 근대화에 대한 자발적 거부로 귀착됐다는 얘기도 역시 앞으로 할 계획이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댱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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