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국가정보원에서 새로운 국정원 원훈석을 제막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국정원 원훈은 5년 만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교체됐다. 2021.6.4(사진=청와대,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국가정보원에서 새로운 국정원 원훈석을 제막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국정원 원훈은 5년 만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교체됐다. 2021.6.4(사진=청와대, 연합뉴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기어코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죄)를 없애려는 데에 힘을 쏟는 눈치다. 지난해엔 국가정보원에 부여됐었던 대공수사권(對共搜査權)을 빼앗더니, 올해에는 국가보안법까지 불구(不具)로 만들 심산인 듯 하다.

쓸데없는 걱정이길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밝혀낸 사실로 인해 앞서 언급한 예상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자는 지난달 13일, 국회에 발의된 더불어민주당 이규민 의원의 국가보안법 제7조 폐지안(2104605)의 법률 검토 의견서에 국정원 의견이 누락된 것을 우연히 확인했다. 우리나라의 그 어느 정부 부처보다도 국가보안법과 가장 밀접한 바로 그 기관, 국정원의 의견이 쏙 빠진 것이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아니나다를까, '모든 채널'을 통해 확인해보니 국정원이 검토 의견을 내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공통된 전언이었다. 의례적이지만 단 한줄 만이라도 밝히는 '관계기관 의견문'을 대체 국정원은 왜 한달 씩이나, 그것도 전화까지 피해가면서 답변하기를 거부했던 것일까.

더불어민주당 이규민 의원의 7조 폐지안과 정의당 강은미 의원의 전면 폐지안에 관한 법률 검토보고서. 2021.08.13(사진=조주형 기자)
더불어민주당 이규민 의원의 7조 폐지안과 정의당 강은미 의원의 전면 폐지안에 관한 법률 검토보고서. 2021.08.13(사진=조주형 기자)

이같은 놀라운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기자는 8월14일자 기준 <[탐사기획] 국가보안법 철폐론 속 박지원 국정원장의 거짓말 진위 파악 추적기 '공개'>라는 제목으로 이를 곧장 기사화했다. 기사의 반향이 작지 않았던 만큼, 이 사태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담긴 후속 보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이에 지난달 30일 오후, 기자는 서울 서초동 일대에서 국정원·경찰청의 전직 고위 간부들을 만나봤다. 비교적 최근까지 국정원 대공수사국에서 굵직한 간첩 사건을 다뤘던 모 인사는 이날 기자 앞에서 불끈 쥔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최근 들어 상당한 분노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명이 짧아지고 있는 것 같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현 정부 때문인데,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2011년 자서전 <운명>의 "참여정부 당시 민정수석 두번 하면서 끝내 못한 일, 바로 국보법을 폐지하지 못한 일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라는 대목이 현 상황을 뒷받침한다.

전문가의 의견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느껴졌다. 이에 기자는 지난 2일 몇년전부터 알고 지냈던 국정원의 황윤덕 前 기획관에게 현 상황에 대한 진단을 부탁했다. 다음은 그와 나눴던 이야기 일부를 실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사진=연합뉴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사진=연합뉴스)

- 기획관님, 박지원 국정원장은 이미 지난해 7월 경 인사청문회에서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국보법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이게 문제가 될 수가 있나요?
▲ 음···조 기자님, 기본적으로 국보법 존치론 입장이니 원칙적 시각으로도 평가받는다지만, 실제로 그 이면에는 '매우 위험한 전략'이 내포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매우 위험한 전략'이라는 게 뭡니까?
▲박 원장은 지난해 7월26일 경 원장 인사청문회 당시 정보위원회에 사전 제출한 서면 답변을 통해 "헌법재판소에 국보법 제2조(정의)·제7조(찬양·고무)에 대한 위헌제청·헌법소원 등 10건이 청구돼 있으므로 헌재 결정에 따라 국보법 개정 필요성 등 국회 차원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국보법은 유지하되 개정은 필요하다'라는 식(式)의 저의가 깔려 있는지를 엄밀히 주시해야 할 겁니다.

- '국보법 제7조 개정' 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누림수가 무엇입니까? 위의 발언만 보자면, 특별할 게 없는 것 같은데...
▲ 통상 '찬양·고무 등'이라 지칭되는 국보법 제7조에는 여러 항(項)이 있어요. 박 원장은 지난 6월23일 경 "고무·찬양죄는 개정해야 한다"라고 했죠. 이를 구체적으로 보자면, 제1항을 폐지하겠다는 의견 뿐 아니라 제3항인 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 제4항(제3항 구성원으로서 허위사실 유포), 제5항(1·3·4항 목적의 이적표현물 유포)의 개폐 의견도 포함하고 있다는 게 타당한 통찰일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개혁성과 보고회에 앞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2021.6.4(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개혁성과 보고회에 앞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2021.6.4(사진=연합뉴스)

- 그렇다면 7조 말고도 다른 조항으로의 확장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습니까?
▲ 국보법 제2조에서 반(反)국가단체의 정의가 나옵니다. 그 규정에 대해서도 '매우 전략적으로' 개정 의견에 포함해 말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기획관님. 아무리 국정원장이더라도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말한 것을 두고 그의 발언에 너무 무게가 실리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해석의 비중을 너무 무겁게 두고 본 것은 아닌가 싶은데···그렇게 본 근거가 무엇입니까?
▲조 기자님.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헌법과 관련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박지원 원장이 문재인 정권의 '국보법 개폐 가이드라인'을 넌지시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단순히 '우려' 때문이 아닙니다. 법률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 아니, 잠깐만요, 기획관님. 법률이라니요? 국정원장의 발언까지도 법률에 명시가 돼 있다는 겁니까?
▲바로 헌법과 국가안전보장회의법을 통해 그 의중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91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대외정책·군사정책과 국내정책의 수립에 관하여 헌법상 필수 자문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이 회의를 주재할 때 국정원이 심의자료를 제출하도록 현행 국가안전보장회의법 제10조에 명시돼 있고요. 그러니까, 국정원장의 국보법 개폐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곧 국보법 개폐에 대한 대통령의 의중이 담겨있는 것으로 추론되기 때문이죠.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23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국정원 해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전국시국기도회'에서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3.9.23(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23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국정원 해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전국시국기도회'에서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3.9.23(사진=연합뉴스)

한마디로, 대통령의 안보정책 수립 과정의 핵심 방향타 역할을 하게 되는 기관이 국정원인 만큼 국정원장의 발언은 곧 대통령의 의중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 그 근거가 헌법과 국가안전보장회의법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기자는 '아차!'라는 외마디를 지르는 느낌과 함께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느꼈다.

앞서 기자는 지난달 14일자 보도 <[탐사기획] 국가보안법 철폐론 속 박지원 국정원장의 거짓말 진위 파악 추적기 '공개'>를 통해 국정원의 법률 검토 의견서 누락 행태를 꼬집은 바 있다.

당시 이를 취재하면서 박지원 원장이 국보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기자들에게 일부 피력했다는 내용을 수 차례 접했다. 여느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혀왔던 그의 지난날 정치인 시절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나쳤다.

그러다 헌법 제91조와 국가안전보장회의법 제10조를 직접 확인한 결과, 놀랍게도 국정원장의 발언 그 자체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포착됐다.

지난해 10월 국회에 발의된 이규민 민주당 의원의 국가보안법 제7조 폐지안에 담기지 않은 박지원 국정원장의 숨은 의도는 결국 국보법의 완전불능화(完全不能化)를 꾀한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한편, 박지원 원장의 뜻이 이같이 읽히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도 그러할까. 그렇다면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을 찾아 업무중 순직한 국정원 직원을 기리는 '이름없는 별' 추모석에 앞에서 직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2018.07.20(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을 찾아 업무중 순직한 국정원 직원을 기리는 '이름없는 별' 추모석에 앞에서 직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2018.07.20(사진=연합뉴스)

 

조주형 기자 chamsae9988@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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