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5回. "거지와 求乞의 智慧"

* 독자분들께, 이번 회는 비참하고 무거운 역사 대신 경쾌(?)한 이야기 한토막 드립니다. 14회에 이은 "문자옥: 낙인찍고 재갈물리고"(2)는 조만간 게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년 전 1920-30년대 상해의 거지들을 연구한 미국 조지아텍 (Georgia Tech) 한차오 루교수의 논문을 한 편 읽었다. 루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동경과 뉴델리를 제치고 아시아 최고의 근대도시로 급성장했던 상해는 중국의 전역에서 몰려 온 ‘표류민(=流民)’들과 ‘부랑인(=游民)들’로 북새통이었다. 그 중에는 산전수전 다 겪다 결국 ‘구걸’을 직업으로 선택한 거지들이 그들 나름의 공고한 사회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 초 상해에는 대략 2만 여명의 거지들이 활동했다고 한다. 그 중 80프로에 해당하는 1만6천여 명의 거지들이 조직에 속해 있었다. 상해의 거지세계는 여덟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구역마다 두목이 있어 모두 여덟 명의 두목은 ‘팔형제’라 불렸다. 그들은 암흑가의 관습을 따라 이름에 하늘 ‘天’자를 항렬자로 공유했다. 거지의 지위도 세습되었다. 일례로 “조(趙)”씨 거지두목은 명대로부터 9대째 거지두목으로 가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많은 경우 시골출신의 문맹자들로 비숙련 노무자로 밥벌이하다 생활고에 못 이겨 구걸에 나서게 되지만, 전쟁, 기근, 실업, 파산, 결손가정 등의 이유로 거지가 된 경우도 25프로 정도를 차지했다. 1933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상해 거지들의 77프로는 빈농으로, 인력거꾼으로, 막노동자로 꽤 긴 시간 직업을 갖고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사회의 바닥에서 단순 노무자로 연명하다 인생의 막장에서 탈출구로 구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지가 되기 전 매월 평균 10불 정도의 수입을 올렸던 사람들은 거지가 된 후엔 4불 정도로 수입이 줄지만, 그건 현금만을 단순 비교한 것일 뿐, 거지들이 의복과 식생활 모두를 구걸에 의존했던 점을 감안하면 수입이 줄었다고 할 수도 없다. 구걸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던 영악한 거지들의 이야기들도 널리 민간에 퍼져 있었다. 아편전쟁 당시의 한 기록에 의하면, 비단, 곡식, 석탄, 장작을 산처럼 쌓아 두고 절간 옆 정자에 모여 앉아 날마다 도박을 하고 놀던 거지 떼도 있었다고 한다.

 

루교수는 이 논문에서 크게 다섯 가지 “구걸의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 “자정의 거지들,” 즉 심야의 극장가나 환락가의 유흥인파들을 겨냥한 구걸이다. 둘째, “다리 도우미,” 즉 미끄러운 빗길, 언덕배기, 혹은 다리 밑에서 인력거꾼을 도와주고 “봉사료”를 챙기는 방법이다. 셋째, 희사(喜事)의 구걸, 즉 시내 곳곳의 경조사를 찾는 방법인데, 어디서 어느 집안의 어떤 행사가 있는지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거지들의 노하우에 해당한다. 넷째, 직접 행인을 좇아가며 어르신, 마나님, 형님 등등의 극존칭을 퍼부어 직접 동냥하는 방법인데, “강아지 따라가기”라 불린다. 마지막으로 이른 새벽부터 변소를 선점하고 있다가 기다리다 사색이 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자리를 내주는 방법, 이른바 “공공변소의 구걸”이다.

 

루교수의 논문을 읽는 동안 줄곧 내가 중국에서 직접 겪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라 아래 기록한다.

 

비네트 #1:

 

1995년 8월 어느 밤, 동행했던 친구 한 명과 함께 상해 외탄(外灘)의 제방 위에 서서 황포강 건넌 편 포동(浦東)의 마천루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누더기에 산발(散髮)한 깡마른 아이 하나가 주변에 잠시 서성거리는가 싶더니 불쑥 내 발밑에 넙죽 큰 절을 바치는 것이었다. 명절 날 어른 앞에 올리는 단순한 세배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던져 바닥에 바싹 엎어진 후 돌바닥에 이마를 꿍꿍 찧어대는 광기어린 헌신(獻身)에 가까웠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그는 또 한 번 그렇게 협박성의 큰절을 바쳤다. 그때서야 아이의 의도를 파악하고 주머니에서 제법 큰돈을 꺼내 그의 앞에 내밀자 아이는 날쌔게 몸을 일으켜 획 돈을 채어선 후다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 못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머잖은 곳에서 그 광경을 죄다 지켜보고 있던 노파와 눈이 마주쳤다. 그 노파 주변엔 바로 그 아이와 엇비슷한 아이들이 대여섯 몸을 낮추고 있었다. 바로 다음 찰라, 노파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아이들은 터진 봇물처럼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위기를 인지한 친구가 나를 잡고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멀리 ‘인민영웅기념비’가 있는 남쪽 끝까지 족히 200미터는 전력질주 한 후에야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 동안 우리 뒤를 따라왔던 아이들이 히죽거리며 우리를 향해 새떼처럼 뭔가 야릇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아마도 야박하게 도망친 우리에게 욕을 퍼붓고 있는 듯했다.

 

http://www.alamy.com/stock-photo-poor-chinese-beggars-street-children-shanghai-131023416.html?pv=1&stamp=2&imageid=2AF2BFF9-F350-496D-BD1B-32FDF640EA76&p=181734&n=0&orientation=0&pn=1&searchtype=0&IsFromSearch=1&srch=foo%3dbar%26st%3d0%26pn%3d1%26ps%3d100%26sortby%3d2%26resultview%3dsortbyPopular%26npgs%3d0%26qt%3dshanghai%2520poverty%26qt_raw%3dshanghai%2520poverty%26lic%3d3%26mr%3d0%26pr%3d0%26ot%3d0%26creative%3d%26ag%3d0%26hc%3d0%26pc%3d%26blackwhite%3d%26cutout%3d%26tbar%3d1%26et%3d0x000000000000000000000%26vp%3d0%26loc%3d0%26imgt%3d0%26dtfr%3d%26dtto%3d%26size%3d0xFF%26archive%3d1%26groupid%3d%26pseudoid%3d%26a%3d%26cdid%3d%26cdsrt%3d%26name%3d%26qn%3d%26apalib%3d%26apalic%3d%26lightbox%3d%26gname%3d%26gtype%3d%26xstx%3d0%26simid%3d%26saveQry%3d%26editorial%3d1%26nu%3d%26t%3d%26edoptin%3d%26customgeoip%3d%26cap%3d1%26cbstore%3d1%26vd%3d0%26lb%3d%26fi%3d2%26edrf%3d%26ispremium%3d1%26flip%3d0
Poor Chinese beggars / street children - Shanghai
Contributor: Chronicle / Alamy Stock Photo

 

 

비네트 #2:

 

1996년 2월, 중국 하북성 정주에서 섬서성 서안까지 달려가는 삼등 야간열차 안 풍경. 열차는 애시당초 만차로 출발했건만 철길 따라 촘촘히 늘어선 소도시 간이역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들렀다. 기차가 서면 기다렸던 승객들은 와 소리를 지르면서 승강구 계단부터 치열한 몸싸움을 벌렸다. 나일론 가마니에 빨랫줄을 묶어 만든 봇짐을 머리 위로 올려 든 수많은 사람들이 비좁은 열차 안으로 몰려 들어와 살을 부대며 필사적으로 빈틈을 찾아 스며들었다. 

 

좌석은 진작 다 찬 후라 사람들은 좌석 사이 바닥에 한 명씩 쭈그리고 앉았다. 매번 기차가 설 때마다 말 그대로 입추(立錐)의 여지없이 꽉 찬 것 같지만, 일단 기차가 출발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는 가만히 숨을 내쉬며 눈을 붙였다. 그렇게 몇 시간 달리고 나서야 기차는 더는 서지 않고 중원의 대평원을 질주했다. 자정이 지난 시각, 창밖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흐릿한 실내등 아래 뿌연 담배연기만 덜컹이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민(流民)의 야간열차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홍수 속에 끼인 채 말없이 밤차를 타고 있는데, 멀리서 기차의 소음을 뚫고 한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목을 쭉 빼서 보니 빨간 치파오를 입고 머리를 양옆으로 앙증맞게 땋아 늘어뜨린 예닐곱 살 남짓한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 뒤에는 쉰 살 쯤 되어 보이는 바싹 마른 사내가 중국의 전통 현악기 이호(二胡)를 깡깡 연주하고 있었다. 

 

사내의 연주에 맞춰 아이는 좌우로 뻗은 두 손을 요염하게 놀리면서 목이 터져라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귀에 익은 전통의 민요를 부르는 실력이 꽤 오랜 시간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듯했다. 아이와 사내는 기차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한 쪽 손엔 커다란 헝겊 주머니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이의 노랫소리가 절정으로 올라갈 때 몇 명의 승객들이 웃는 얼굴로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었고, 그때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급기야 아이가 내 앞으로 왔을 때,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 하나를 꺼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마침 노래를 끝낸 아이는 깜찍하게 웃는 얼굴로 “씨애씨애 따끄어끄어! (고마워요 큰오빠)”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내는 다시 다음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잠시 숨을 들어 마신 아이는 다음 노래를 구성지게 뽑고 있었다.

 

 

비네트 #3:

 

2011년 북경 외곽의 한 큰 주점의 공중화장실에서 있었던 일. 소변을 보기 위해 변기 앞에 섰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슬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어색한 포즈로 고개를 돌려 보니 안마를 하던 사내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고, 그렇게 어이없이 사내에게 어깨를 잡힌 나는 ‘황당,’ ‘짜증,’ ‘억울’과 함께 안도가 살짝 섞인 묘한 쓴 웃음을 결국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 웃음으로 사내와 나 사이엔 이미 작은 신뢰가 생겨났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볼 일을 보자 사내는 낄낄거리며 더욱 신나게 내 어깨를 쭉쭉 주물렀다. 내가 볼 일을 다 보고 돌아서서 사내를 마주 대할 때 그는 실실 웃으며 내 소매를 끌어 당겨 세면대 앞으로 날 “모시고” 갔다. 내가 손을 씻고 나자 그는 잘 접은 종이타월을 내 앞에 공손히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손을 닦았고, 이미 합의된 암묵적 계약에 따라 주머니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사내는 주머니에 돈을 챙겨 넣은 후, 내가 그 화장실을 빠져 나와 복도를 지나 그 주점으로 돌아갈 때까지 멀리서 허리를 굽혀 내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1935년 사진, 상해의 거지아이들http://www.virtualshanghai.net/Asset/Preview/dbImage_ID-25041_No-1.jpeg
1935년 사진, 상해의 거지아이들http://www.virtualshanghai.net/Asset/Preview/dbImage_ID-25041_No-1.jpeg

 

이상 중국에서 내가 직접 체험했던 세 종류의 ‘구걸’ 행위는 루교수가 소개한 다섯 가지 구걸 방법에 대체로 부합할 듯하다. 글쎄, 악기를 연주하는 사내와 노래하는 소녀가 구걸을 한 것일까. 어쩌면 음악을 제공하고 작은 돈을 챙기는 “버스킹(busking)”이라 하겠지만, 세느강변이나 맨하탄의 지하도에서 악기를 들고 노래 부르며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담배연기 자욱한 심야의 열차 안에서 어린 소녀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역시 그 소녀의 노래는 아마도 루교수가 말한 “다리 도우미”의 방법에 해당하는 듯하다.

 

그런데 23년 전 내가 직접 겪었던 다른 성격의 묘한 “구걸”이 아직도 내 마음에 작은 상처로 남아 있다. 바로 내가 나고 자란 나의 고향 서울에서 일어났던 일······.

 

비네트 #4:

 

1990년 봄, 서울 종로 한 빵집. 친구들과 모여 앉아 빵을 먹으며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잔뜩 인상을 찌푸린 삼십 대 초반의 한 사내가 들어와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초조하게 뭔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있는 인상이었다. 나와 눈빛이 살짝 마주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사내는 불쑥 몸을 낮춰 테이블 아래 놓인 내 발을 잡고선 신을 벗기고 있었다. 

 

뜻밖의 공격에 화들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내 앞에 슬리퍼를 획 던지면서 “잠깐만 기다리쇼! 신을 싹 고쳐가지고 올 테니까” 하고는 빵집 밖으로 획 나가 버렸다. 얼떨결에 슬리퍼를 신고 창밖을 보니 사내는 인도 한 구석에 판을 벌린 구두수선공이었다. 그 사내 말고도 세 명이 더 모여 분주히 신을 고치고 있었다. 날벼락 맞은 듯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일었지만, 굳은 표정으로 내 신발을 벗겨가는 그 사내의 단호한 태도에 질려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잠시 후, 마음 단단히 먹고 밖으로 나가 사내와 직면했을 땐, 그는 이미 내 구두 앞에 고무판을 덧붙여 놓고는 정성스럽게 구두약을 발라가며 바로 그 구두를 광내고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가서 항의를 했지만,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구두는 본래 앞굽이 닳아버리면 못 쓰게 된다니까” 하고 능청스럽게 딴청을 부렸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경찰서에 가자!” 내 딴엔 제법 세게 항의를 했건만 사내는 입김을 불어가면 구두를 계속 광내고만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얼마냐 묻자 그때서야 나를 빤히 올려다보면서 “만원만 내!”하고 ‘해라’로 말했다. 당시로선 상상을 절하는 큰 금액이었다. 내가 격앙 되서 항의하자 그는 가격을 재깍 3천원으로 낮췄고, 그쯤에서 거래는 성사되었다. 3천원을 내고 되찾은 신을 신고 종로를 걸어가는데, 높아진 앞굽으로 땅을 딛는 느낌이 꼭 떫은 과일을 씹는 듯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사내의 방법은 루교수가 말한 “다리 도우미”의 전술과는 또 다른 성격의 “구걸”이다. 사내가 내 발에서 신을 벗길 때, 내 신체에 가해지는 백주 대낮의 폭력에 질려 적절한 대처 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그 사내의 의도에 고스란히 넘어갔던 것이다. 이쯤 되면 완력으로 금품을 강탈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강제로 봉사를 제공하고 돈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 범죄행위일 텐데, 돈을 지불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거지라기 보단 깡패에 가깝다는 것.

 

2년 전 타계한 하버드 대학의 필립 큔(Philip Kuhn, 1933-2016) 교수는 청대의 거지들은 “대중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라 말한 바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공포”를 야기해서 돈을 뜯어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본질적인 “구걸”의 원리인지도 모른다.

 

아, 언어의 한계가 느껴진다. “협박성 구걸”과 “봉사성 구걸”은 분명 다른 것인데, 둘 다 “구걸”이라 불러야 하는 것은 어쩐지 부당해 보인다. 이 험한 세상에서 어쩌면 후자는 구걸(begging)이라기 보단 일종의 판매(sales)라고 볼 순 없을까. 귀여운 노력의 대가로 작은 팁을 요구하는 것이니까. 아니, "협박성 구걸"을 구걸이라 하지 말고 그냥 쉽게 강탈이라 하는 것이 더 쉬울 듯하다.

상하이의 거짓 아이들 (출처 미상)
1930년대 중국의 거지 아이들 (출처 미상)

 

 

<참고문헌>

 

Hanchao Lu, “Becoming Urban: Mendicancy and Vagrants in Modern Shanghai,” Journal of Social History, Vol. 33, No. 1 (Autumn, 1999), pp.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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