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discourse)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푸코에 의해 집중적으로 논의된 용어로,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단어다. 써보면 아주 편리한 말이다. 문학적, 종교적, 정치적 언설과 논의들, 그리고 과학적 명제들이 모두 담론이다. 학문 전체도 담론이고, 유명한 철학자의 저서, 또는 그 저자들의 어떤 개념이나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담론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도 담론이고,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한 마디 말도 담론이며, 그 말을 패러디한 레이몽 아롱의 ‘공산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말 또한 담론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해야...’, ‘천안함 함장이 부하들을 수장(水葬)시켜 놓고...’라는 발언도 담론이다. ‘우리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승만, 박정희...’라는 말도 담론이고, 이런 담론을 ‘반일종족주의’라고 규정하며 비판하는 주장이나 저술 또한 담론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 중 학문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가미된 모든 말들이 담론이다.

담론은 겉보기에는 하찮아 보인다. 그냥 말에 불과해서 아무런 물리적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착같은 금지의 관행과 함께 그것이 결국 권력까지 가져다주는 것을 보면 담론은 권력 쟁취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론은 욕망 그리고 권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순히 말하는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거나 숨기는 매개적 기호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 그 자체고, 또 그 대상을 가져다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담론은 또 단순히 권력투쟁이나 지배 체계들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라 권력의 목적이며 수단이다. 역사 속에서 모든 진영은 담론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고, 또 담론을 가지고 투쟁하였다.

아직도 식민지 청산을 못했으므로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는 담론과, 이미 그것은 70년 전의 일이고 식민지 경험은 한국의 근대화를 도운 측면도 있다는 담론의 투쟁에서 친일파 척결이라는 담론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것으로 좌파는 권력을 잡았다. 담론은 아무 힘이 없는 허약한 언어가 아니다. 그 어떤 물리적 힘보다 더 강한 권력 쟁취의 무기인 것이다.

채진원 연구원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586 운동권 그룹의 행태는 조선시대 위정척사 운동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습속을 빼다 박았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사고체계는 21세기를 살면서도 위정척사, 소중화로 똘똘 뭉친 주자성리학자들과 동일하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1980년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바로 이들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오늘날 문재인 정부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사진은 1980년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 바로 이들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오늘날 문재인 정부의 핵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김용삼 대기자 참고)

담론이라는 공안 사찰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은 일련의 과정들에 의해 통제되고, 선별되고, 조직되어 재분배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제(exclusion)의 과정이다. 어떤 담론은 아예 발설도 하지 못한 채 근본적으로 배제된다. 가장 대표적인 배제의 수단은 금지(禁止)(interdiction)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그 누구도,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해야지, ‘광주사태’라고 말하면 큰 일 난다. ‘일제 강점기’라고 써야지 ‘일제시대’라고 쓰면 편집자가 즉각 고쳐 ‘일제 강점기’로 변환된다. 만일 어떤 교수가 ‘일제시대에 한국은 근대화되었다’라고 말하면 그는 연구실에서 테러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한 사회에서 어떤 담론이 진실의 지위를 부여 받는 것은 단순히 진실과 허위라는 사실 확인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 말이 ‘틀리다, 맞다’라고 말해질 수 있기 전에, 그 말은 우선 소위 ‘진실의 영역 안에’(in the truth, dans le vrai) 들어 있어야 한다. 진실의 영역이란 일종의 담론적 공안(police)이다.

공안(公安) 사범, 공안 정국이라고 말할 때의 그 무시무시한 사찰이 주류에 반하는 모든 담론을 불법으로 규정한 후 거기에 가혹한 처벌을 가한다. 이 공안적 ‘진실’에 복종하여 그 안에 들어간 후에야, 그제서야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반론도 가능하고 비판도 가능해 진다. 그 영역 밖에서는 아무런 담론도 진실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발설 자체가 아예 그 누구에게도 청취되지 않으며, 자칫 잘못하면 봉변당할 염려마저 있다.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도 ‘촛불’은 어김없이 등장했다.(사진=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가족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도 ‘촛불’은 어김없이 등장했다.(사진=연합뉴스)

진실 투쟁

진실은 진실이고 허위는 허위인데 어떻게 진실을 강제하는 것이 담론 배제의 과정이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순진한 우파들의 생각이다.

사실, 명제의 수준에서 본다면 진실과 허위를 가르는 분할이 결코 어렵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켈리포니아에는 황금산이 있다”라고 말했다면 이 명제의 진실과 허위는 분명하다. 이 명제가 허위라는 사실은 누군가 자의적으로 정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마음대로 수정할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강제하는 폭력성도 없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담론들이 이렇게 진실과 허위가 분명하게 나눠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세월호 사고는 규정과 메뉴얼을 지키지 않는 후진적 관행의 결과인데, 다른 누군가에게는 청와대나 국정원이 관련된 음모의 결과이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음모론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담론 투쟁에서는 그것을 믿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면 진실이 된다. 진실을 선점하려는 치열한 투쟁이 일어나고, 거기서 이긴 세력이 권력을 잡게 된다. 결국 진실과 허위의 분할은 글자 그대로 진실과 허위의 분할이 아니라 적대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층위의 담론에서 진실과 허위의 분할은 역사적이고, 수정가능하고, 엄청나게 폭력을 수반하는 강제적인 체계이다. 좌파적 담론의 승리는 촛불 집회니 조국 지지 시위 같은 엄청난 비용과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폭력성의 결과물이었다. 이렇게 지배적 지위에 오른 담론은 역사와 함께, 다시 말해 지배 세력이 바뀌면 다시 정반대로 수정이 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성탄을 하루 앞둔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9차 촛불집회에서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6.12.24 (사진 = 문재인 전 대표 제공,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성탄을 하루 앞둔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9차 촛불집회에서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6.12.24 (사진 = 문재인 전 대표 제공, 연합뉴스)

사회운동적 담론

담론에는 학문적 담론과 주의주장을 담은 사회운동적 담론(푸코는 이것을 독트린이라고 말했다)이 있다. 둘 다 권력의 목적이며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러나 말하는 개인들의 수가 제한되느냐 확장되느냐의 관점에서 차이가 난다.

과학, 의학, 정치학, 경제학 등 학문들의 경우, 말하는 개인들의 수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학과라는 분야 설정과 학회 활동 또는 학회지 논문 등이 바로 그 수를 제한하는 방법이다. 칸막이가 엄격하게 쳐 진 모든 학문의 학과들은 타 과목 학자가 쓴 연구논문을 아예 배제한다. 학회를 결성하여 학회 회원에게만 논문 쓸 자격을 부여한다든가, 지정 학회지에 실리지 않은 논문은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이 모두 전형적인 담론 배제의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극소수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연구 담론이 순환되고 이전된다.

반면에 사회운동적 담론은 될수록 많은 대중에게 동일한 담론을 확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개인들이 어느 진영에 소속되는 것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소리 높이 하나의 구호를 외칠 때이다. 그러므로 개인들을 연대시켜 하나의 의식화된 대중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일정한 유형의 담론을 사용할 것을 강요해야 한다. 당연하게 이 진영의 개인들이 발설해야 하는 언표들의 유형은 고정되어 있다. 이 고정된 언표 이외의 모든 언표들은 금지된다. 그들은 동일한 진실을 인정하고, 특정의 규칙을 수락해야 한다.

오직 이것뿐이라면 사회운동적 담론과 학문적 담론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 없다. 학문적 담론도 하나의 학과목 안에서는 거의 동일한 진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적 담론이 담론의 내용만 문제 삼는 데 반해 사회운동적 담론은 발화자와 언표, 즉 말하는 사람과 말해진 내용을 동시에 문제 삼는다. 가끔 연예인이나 학자가 주류 담론(좌파 담론)에 반하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 말을 발설한 사람 자체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지 않는가.

KBS 본관 입구에 걸려있는 '오늘밤 김제동'
KBS 본관 입구에 걸려있는 '오늘밤 김제동'

푸코는 좌파를 잃고 우파를 얻었다

푸코는 모든 권력에서 보이는 잔인성, 위선성을 비판했다. 특히 스스로 진실과 덕성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권력 체계를 해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담론 투쟁과 역사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잡은 한국 좌파의 정치 지형은 그런 점에서 푸코의 사상을 그대로 입증하는 교과서적 사례다. 한국의 좌파는 푸코의 권력 이론을 충실하게 학습하고 실천하여 마침내 권력을 잡았고 문화적인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푸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좌파가 막강한 권력이 되고 우파가 주변부로 밀려난 지금 그들은 굳이 푸코의 개념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푸코가 말한 ‘앎-권력’의 새로운 기성 권력 집단(establishment)이 되었으므로, 그 권력 개념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보다는 오히려 충성심과 신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팬데믹을 빌미로 국가가 개인 신체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개인의 인권과 사생활이 광범위하게 침해되는 작금의 현상은 푸코의 생체 권력(bio-power) 담론이 그대로 적용되는 절묘한 사례다. 푸코는 국가 권력이 국민의 생물학적 삶에 깊이 개입하는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종래의 좌파라면 푸코의 범주들을 사용하여 이런 현상들을 강하게 비판했어야 했다. 그러나 코로나 정국에서 이상하게도 미셸 푸코의 이름은 별로 거론되지 않는다.

미국도 비슷한 현상인가 보다. PC 개념에 입각한 리버럴 좌파의 담론에서 푸코가 별로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우파의 담론에서 푸코의 권력론이 좀 더 많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뉴욕 대학 강사인 조프 슐렌버거(Geoff Shullengerger)는 아메리칸 어페어즈 기고문에서 “푸코는 좌파를 잃고 우파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우파들은 때 아닌 인문학 때리기, 포스트모던 때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좌파가 인문학으로 또는 포스트모던 철학으로 청년들을 좌경화시키고 권력을 잡았으니 우파는 이를 배격하고 실용 학문, 자연 과학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보다 강한 것이 형체 없는 부드러운 언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리고 근대 이후 권력은 언제나 ‘언어를 지배하는 자,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라는 격언을 입증하고 강화시켰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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