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못한 자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4년만큼 이 경구를 사무치게 실감한 적도 없다. 그러나 막상 관심을 가지자니 암울해지는 것이 그 대안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허술하고 부실하다는 것이다. 어쩌랴. 대선까지 남은 시간은 너무 짧고 정치실험을 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것을. 지난 서울과 부산 선거에서 보았듯 거대 양당 정치가 아닌 제 3의 길은 아직까지 요원해 보이는 상황에서 국민의 힘 당대표 선출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복잡하고 심란하다. 하나같이 통합이 어쩌고 정권 심판이 어쩌고 도토리 키 재기 출사표를 던지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게 김웅의 출마 선언이다. 초반은 지루했다. 당의 변화는 당의 얼굴에서 시작되고 새로운 인물만이 새 시대의 희망을 담을 수 있다는 빤한 얘기. 한마디로 초선에 젊은 자기를 봐달라는 얘기 아닌가. 그러나 늙음이 징벌이 아닌 것처럼 젊다는 것 또한 벼슬이 아니며 그거 하나 밖에 내세울 것 없는 인간만큼 초라한 종자도 없다(게다가 검색을 해보니 별로 젊지도 않았다). 아, 또 식상한 인간 하나 출현이네 싶었는데 이어지는 말은 뜻밖이었다.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보수주의자이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노동자가 철판에 깔려 죽은 현장이란다. 누구는 정의당 후보냐 비아냥대기도 했는데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니다. 보수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상이나 태도다. 자칫 기득권 수호로 들릴 수 있는 이 표현에는 그러나 보수주의가 가야하는 방향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세적 보수주의’라고 부르는 이 전술은 사회 불안, 체제 위협 세력을 혁명 세력으로 키우지 않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김웅이 그런 의도를 깔고 발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정치에서의 보수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위기가 닥치기 전 선방을 날려라

실제로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들은 과감했고 심지어 과격했다. 비스마르크는 1848년 유럽이 혁명 열기에 휩싸였을 때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기 영지의 농민들을 무장시켜 봉기를 진압하려 했던 인물이다. 당시 국왕이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할 계획까지 짰던 무지막지한 인간이다.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반反사회주의자 법’을 만들어 사회민주당을 압살하려던 노골적인 반동이었다. 그러나 현실감각은 있었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불만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가래로 막을 것을 포클레인으로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결과가 1883년부터 시작된 의료보험, 산재보험, 연금보험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사회보장제도들이지만 이게 100년 전이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다른 나라들이 노동자들의 시위에 총질을 할 때 비스마르크는 혁명에 가까운 과격한 정책으로 위기를 산뜻하게 돌파한 것이다. 유럽 각국이 비스마르크를 따라 하기 시작한 게 1919년 무렵이고 당시 유럽 최빈국 스웨덴이 노동자 복지확대를 결정한 것이 1938년이니(스웨덴은 노사협약을 통해 노조는 국유화 강령 포기, 파업 자제) 50년 이상을 앞서간 정책이었다. 독일 지배계급이 착해서? 아니다. 속칭 꼴통 기질이 있었던 비스마르크니까 밀어붙일 수 있었던 사안이다. 또 있다. 본명보다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르 꼬르뷔지에는 아파트로 혁명을 공세적으로 봉쇄했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더러웠고 주거환경은 중세 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파리 계획안이라 불린 해법을 내놓았는데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주거형태였다. 르 꼬르뷔지에가 1952년 완성한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단일 건물 안에 337세대의 주거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현대 아파트의 시초가 되었다. 선의가 전부는 아니었다. 도시로 몰려드는 노동자, 빈민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데 이만한 조치는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물론이고 르 꼬르뷔지에 역시 진보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둘의 공통점은 그런 획기적인 처방이 아니고서는 ‘기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박정희의, 가난은 공산주의가 타고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발언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겠다.

대선은 정권 심판이 아니라 체제 수호 싸움

사실 친親 노동자 정책은 국민의 힘이 내놓아야 하는 정책이 맞다. 반대편에는 자본주의를 깨고 싶어 환장한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을 끌어안아야 한다. 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 동안 보수는 무조건 노력만을 강조했다. 개인의 의지로 모든 역경을 돌파하라고 독려했다. 보수의 철학으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전술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다. 보수는 또 기업만 강조했다. 맞다. 부富와 고용은 기업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기업을 살리고 지원하는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집권부터 해야 한다. 역시 전술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말씀이다. 다음 대선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조금씩 사회주의로 좌표를 이동해가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대선은 정권 심판의 차원이 아니라 체제 수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웅의 출사표에 선한 의도와 전술적 고려가 어떤 비율로 조합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발언은 영리하며 이제껏 보수가 간과하고 있던 것을 일깨워주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전에도 칼럼에서 대한민국에 보수는 없으며 있는 것은 그저 산업화 세력이라고 쓴 적이 있다. 어쩌면 김웅의 출사표는 윤희숙의 나는 임차인입니다 연설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진짜 보수의 등장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정치판에서 특정 인물이 가장 주목받는 순간을 ‘별의 순간’이라 부른다. 미래를 결정하는 운명의 순간을 뜻하는 독일어Stẹrn stunde를 옮긴 말인데 김웅의 출마 선언은 그에게 별의 순간이다. 그가 알든 모르든.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