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에 찌든 대한민국의 자화상...32년전 광주 이철규군 변사사건의 데자뷰
음모론에 찌든 대한민국의 자화상...32년전 광주 이철규군 변사사건의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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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사로 판명된 1989년 조선대생 이철규씨 사망사건에 대해 얼마전 한 TV 프로그램은  음모론에 입각해 다루기도 했다.
실족사로 판명된 1989년 조선대생 이철규씨 사망사건에 대해 얼마전 한 TV 프로그램은 음모론에 입각해 다루기도 했다. [사진=SBS]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를 토대로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손정민 씨(22)가 익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동안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실종 당시 함께 있었던 친구와 그 가족의 신상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등 종북 좌파들의 선전선동으로 천안함 세월호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던 음모론에 찌든 한국사회의 병폐를 보여주었다.

서울경찰청은 13일 “국과수로부터 손 씨의 사인은 익사로 추정되며 머리에 있던 좌열창(뭉툭한 물체로 인해 피부가 찢어지는 상처) 2군데는 사인과 연결짓기 어렵다는 부검 감정서를 받았다”고 밝혔다.

국과수는 이와 함께 손 씨가 음주 뒤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숨졌다는 소견도 내놓았다. 부검 결과에는 손 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도 포함됐으나, 경찰은 유족에게만 통보했다. 아버지 손현 씨(50)는 “경찰이 밝히지 않은 내용이라 알려주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손 씨와 A 씨는 공원 내 편의점 등에서 3차례에 걸쳐 일반 소주 2병(360ml)과 페트병 소주 2병(640ml), 막걸리 3병과 청주 2병을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32년전, 5월 광주에서 이번 손정민씨 사건과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

광주민주화운동 9주년을 앞둔 1989년 5월 10일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의 북한동조 논문 게재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광주·전남지역 공안합동수사부의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편집위원장 이철규(전자공학과 4년)가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 상류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일주일전인 5월 3일 밤, 이씨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다 4수원지 근처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고 검문경찰이 주민등록증에 한자 李哲揆로 표기돼 있는 그의 이름을 ‘이철발’로 잘못 읽어 무전을 치는 바람에 신원조회가 늦어지자 그 틈을 타 이씨가 도망을 친 것이다.

4수원지 호수에 떠오른 이씨의 시체는 시커멓게 타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팽창했다. 이를 두고 당시 광주와 서울 등 대학가에서는 이씨가 경찰에 체포된 뒤 전기고문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대 학생회와 재야 단체들은 이씨의 사체에 수갑을 채운 흔적이 있다면서 수사당국에 의해 연행된 후 피살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연일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고, 국회에서는 유신 이후 처음으로 국정조사권까지 발동하는 정치문제로 비화됐다. 당시 재야 단체와 핵생운동권은 이씨의 시체사진 수백만장을 전단으로 만들어 살포했는데 이 사진을 본 국민중 상당수가 전기고문 사망설에 현혹됐다.

검찰은 사건발생 20일 만인 5월 30일 이군의 사체에서 다량의 플랭크톤이 발견돼 익사한 것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발표를 토대로, 야간에 불심검문을 받고 산속으로 도주하다 실족, 수원지에 빠져 익사한 것이라고 최종결론을 지었다.

국회 이철규군변사사건 진상조사특위 역시 피살 혐의는 찾아내지 못했고, 검문당시 도주한 이군을 체포하지 못한 이유와 이를 은폐한 사실, 이군을 놓치고도 근무규정시간을 어겨가며 조기 철수한 이유 등 의혹만 제기하고 활동을 마무리지었다.

결국 이 사건은 그해 11월 4일 망월동 5·18묘역에 이군의 사체가 안장되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검찰 등 수사기관은 이씨의 참혹한 사진으로 인해 전기고문 사망설, 음모론이 무차별 확산되자 익사후 일정 기간이후 떠오르는 시신의 일반적인 모습이 그렇다면서 수십장의 익사체 사진을 전단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또 광주에서 경찰이 검문을 하면서 한자를 잘못 읽는 바람에 이철규씨에게 도망칠 여유를 주는 바람에 이씨가 4수원지의 가파른 축대에서 실족했다는 교훈을 바탕으로 이후 주민등록증에는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도록 제도가 바뀌기도 했다.

이상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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