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정적인 역사는 이렇게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걸까?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리사욕과 아집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인조의 역사는 물론, 자신이 속한 계파의 정당성을 사수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 영조 시대의 역사도 따라가지 않겠다는 판단력 정도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 교육이 이런 교훈을 제대로 주지 못해 큰 걱정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조선 시대 영조는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에게 시호를 올렸다. 이때 시호는 경혜(敬惠), 궁호는 저경(儲慶), 무덤은 순강원으로 정했다. 인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지 140여 년 뒤인 1755년(영조 31)이었다.

영조가, 왕비도 아니었던 일개 후궁을 죽은 지 100년 후까지 그렇게 받들어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빈 김씨가 인조(仁祖)의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인빈 김씨와 선조 사이에서 정원군이 태어났고 그 정원군의 아들이 인조이다. 선조의 또 다른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구분 지을 수 있는 영조의 조상은 인빈 김씨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광해군을 세자로 삼자고 제안한 정철을 선조가 귀양 보낸 이면에는 인빈 김씨의 고변이 있었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영조는 유난히 인조에 대한 숭모 사업이 많이 벌였다.

영조 45년 11월 2일에는 덕수궁에 가서 ‘계해년에 즉위하신 당[癸亥卽阼堂]’이라는 다섯 글자를 직접 써주며 건물에 걸도록 하였다. 계해년에 그 건물에서 ‘즉위하신’ 그 사람은 바로 인조이다.

이 즉조당에서는 두 임금이 왕위에 올랐다. 인조가 몰아낸 광해군도 이 건물에서 즉위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아직 정비하지 못해 임시로 빌린 개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집이 지금 덕수궁 석어당이다. 광해군은 관례에 따라 전 왕이 죽은 건물 근처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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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즉위한 덕수궁 즉조당.

인조는 반정을 일으킨 후 서궁이라 불리던 덕수궁에 갇혀 있던 인목대비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인목대비에게 형식상의 즉위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건물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덕수궁에 갔던 날, “오늘은 마땅히 계해년을 뒤좇아 생각하여 이 당에서 친히 정사를 행하겠다”라고 말하며 인조의 뒤를 따를 것을 당당히 밝혔다.

영조 27년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남한산성 수어장대를 2층 누각으로 증축하면서 외부에는 수어장대,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을 걸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영조가 특히 인조를 떠받든 이유는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음에 기인한다. 그 반정이 부당한 것으로 평가되는 순간 그 뒤를 이은 모든 왕의 정통성은 사라진다. 그러니 후대 왕들은 자신들의 왕권 확보를 위해 인조를 그가 차지했던 그 자리에 굳건히 버티게 해야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끊임없이 왕권에 도전을 받던 영조로서는 자신이 그 ‘위대한 인조대왕’의 당당한 후예임을 더 많이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조의 후예들은 인조를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나는 인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거둘 수가 없다. 일단 그를 즉위하게 한 반정의 저의부터 미심쩍다. 인조반정의 대표적인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점과 ‘폐모살제(어머니를 가두고 동생을 죽임)’였다. 하지만 이들은 말 그대로 ‘명분’이었을 뿐 개인적인 원한이 더 그를 부추겼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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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던 세검정.

즉위 전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반정 몇 년 전에 일어난 ‘신경희의 옥’에서 동생 능창군과 아버지를 잃었다. 역모 혐의로 하옥된 신경희는 능창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당시 17세이던 능창군은 큰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자결하였고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능창군의 형이며 정원군의 아들이었던 능양군(인조)에게 큰아버지 광해군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권 탈취가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 원한을 갚거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간단하다. 정권을 빼앗은 후 어떻게 나라를 운영해나가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후자의 경우 국가 발전이나 국민의 행복이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인조가 그랬다. 전 왕보다 훨씬 못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반정 과정에서도 잡음이 있었다. 1623년 3월 13일 새벽녘 700명의 반정군은 홍제원(서울 홍제동)에 집결했다. 그런데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대신 대장으로 나선 사람이 이괄이다. 이괄이 동요하는 반정군의 대열을 정비하고 있을 무렵 김류가 나타났다. 결단을 내리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김류가 다시 총대장을 맡았고 반정은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반정의 논공행상에서 김류는 1등 공신이 되었는데 이괄은 2등 공신에 그치고 말았다. 불만은 있었지만 이괄이 처음부터 역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평안 병사로 임명된 후 임지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며 국방에 힘쓰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반정 공신들이 이괄을 의심하여 그의 아내와 동생을 처형해버렸다. 가족이 능지처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이괄은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밀고 내려왔다. 공정하지 못한 과정과 정의롭지 못한 결과 처리 때문에 화를 당하는 것은 죄 없는 국민이다. 인조는 즉위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국민을 ‘내란’이라는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외교의 ‘외’자도 모르던 인조의 아둔함과 비슷한 부류의 미욱하기 짝이 없는 신하들이 합동 작품으로 국민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전화 속으로 몰아넣었음은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서울 창덕궁에 가면 반정 세력이 사리사욕을 채운 한 예를 볼 수 있다. 창덕궁의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편 행각에는 ‘호위청’(扈衛廳)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반정 세력들이 국왕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이다. 하지만 반정 후에도 자신들의 군사적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처음 호위청에는 대장 둘과 당상 둘이 있었는데, 김류·이귀가 두 대장이었고 김자점·구인후가 두 당상이었다. 김류는 반정 당시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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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호위청.

대장은 각기 군관 140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관에서 급료를 주는 사람은 60명이었다. 또 당상은 각기 80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중 관에서 급료를 주는 사람은 30명이었다. 우두머리 네 명 중 누가 죽으면 그 권한을 아들에게 물려주기도 했고 다른 셋 중 한 사람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인조 9년(1631) 7월 5일, 호위청을 혁파하자는 대신들의 제안이 있었다. 국가의 곡식을 허비하는 두 가지 폐단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호위청 군사에게 나가는 비용이라는 것이었다. 호위청을 임시로 설치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혁파해야 마땅하다는 의견에 인조는 “호위 군관은 위급할 때의 의지해야 하니, 아직 혁파하지 말라”라고 답했다. 그 후에도 호위청은 혁파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자손만대 보은하려고 만든 자리인데 인조가 그걸 없앨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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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했던 장소에 세워진 삼전도비.

내가 인조에 대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은 다름 아니다. 정권을 빼앗았으면 최소한 자기에 의해 자리를 빼앗긴 사람보다는 정치를 더 유능하게, 깨끗하게 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보다 더 정치를 잘할 것을 담보하고 앞사람을 몰아낸 것 아닌가? 그렇게 해줄 것을 믿고 국민은 그를 그나마 왕으로 인정해주었을 것이다. 전 정권보다 일을 잘 해야 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약속인 동시에 자신의 자존심의 문제이다. 자신이 몰아낸 사람만큼도 일을 못해 국민을 고통에 빠트리다니……. 더 많은, 보도 듣도 못한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에게 상처를 주다니…. 그가 저지른 모든 비열한 짓 중 가장 나쁜 것은 그러고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성찰하지 않고 남의 탓만 했다는 것이다.

왜 부정적인 역사는 이렇게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걸까?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리사욕과 아집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인조의 역사는 물론, 자신이 속한 계파의 정당성을 사수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 영조 시대의 역사도 따라가지 않겠다는 판단력 정도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 교육이 이런 교훈을 제대로 주지 못해 큰 걱정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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