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나는 일본을 좋아한다. 역병으로 하늘 길 막히기 전에는 일 년에 다섯 번도 간 적도 있다. 왜? 가까우니까. 편하니까. 싸니까. 일본 처음 간 게 30년 전 쯤 되는데 그때는 좀 충격이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미래를 보고 온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특히 아키하바라 전자제품 상가는 완전히 신세계였다. 일본에서의 첫날 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일본을 십 년만 빨리 보고 왔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생각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국은 무섭게 일본을 따라잡았고 아키하바라 수준의 전시장은 이제 우리나라 대형마트 전자제품 코너에서도 구경할 수 있다. 나이 들면서 책 좀 보고 아는 게 아주 조금 쌓이고 나니 그나마 남아있던 일본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도 사라졌다. 지네나 우리나 어차피 변두리 문명이긴 마찬가지인데 뭘. 문화와 문명은 다르다. 문화는 성적순으로 줄을 세울 수 없지만 문명은 계량화가 가능하고 등수가 나온다. 그래서 문명은 서양의 근대화, 산업 혁명이 기준이자 출발이 된다. 1910년 무렵 우리의 문명은 아마 전 세계 꼴찌 그룹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조 1위 수준은 되었다. 그러나 6~70년대 우리는 일본을 바짝 추격했고 현재 몇몇 종목에서는 일본을 앞서 있다. 문명 격차는 없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아직도, 여전히, 또 반일反日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정신병이다.

온 국민을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는 정권

물론 전 국민적인 반일 정서가 있기는 하다. 그건 침략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다. 맞은 기억뿐이라서 그렇다. 유럽의 3대 강국 영국, 프랑스, 독일이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때리고 맞은 기억이 번갈아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전통 천덕꾸러기 독일은 프랑스에게 숱하게 맞았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화끈하게 설욕했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맞았고 한일합방 때 맞았다. 반면 한 번도 때린 적이 없다. 신나게 한 번 패봤으면, 가령 여몽 연합군이 일본에 상륙해서 열도를 한바탕 쑥대밭으로 만들었더라면 아마 반일 감정도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좀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네도 우리한테 한 번 맞았잖아 할 수 있으니까. 욕먹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가장 아쉽다. 그러다보니 민족 영웅이 이순신이다. 강감찬이나 을지문덕이 아니고 단지 일본과 싸웠기 때문에 이순신은 민족 영웅이다. 나라마다 민족 영웅이 있다. 또 유럽 얘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그 나라 고대사의 민족 영웅은 전부 다 로마와 싸웠던 사람들이다. 프랑스 국민 영화 ‘아스테릭스의 주인공은 카이사르와 싸웠던 인물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전투에서 분투 끝에 로마로 끌려가 죽었다. 프랑스에서 이 영화는 1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독일에는 아르미니우스가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 군단은 20개였다. 이 중에 절반인 9개 군단이 유럽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토이토부르크에서 이 중 3개를 날려버린 게 아르미니우스다. 영국에는 부티카라는 여자가 있다. 원래 로마와 친한 집안이었지만 새로 부임한 로마 장군에게 딸들이 폭행을 당하자 완전히 돌아서 로마와 맞서 싸웠다. 보복은 잔인했다. 로마인들의 눈, 코, 입을 다 떼어 낸 다음 새롭게 위치를 조정해 붙인 피카소풍의 시체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부티카는 민족 영웅도 아니고 당연히 우리는 그 이름이 낯설다. 영국인들은 왜 그런 것일까. 처칠은 로마의 브리타니아 침공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 군단이 영국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영국에 문명이 시작되었다.” 놀랍게도(물론 고대사이긴 하지만) 로마의 브리타니아 침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학자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순간(물론 근대사인긴 하지만) 조선에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한 말씀 하시면 어떻게 될까. 한국에서 살기는 틀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되나? 덕분에 공업이랑 통신이랑 근대적인 요소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어요, 라고 말하면 안 되나? 그렇게도 자신감이 없나? 물론 뒤끝도 살짝 보여줘야 한다. 고맙다고 말한 뒤 말미에 한 마디 슬쩍 붙이면 된다. 그래야 긴장한다. “다 고맙기는 한데 그까짓 근대화 몇 년 빨리 했다고 이웃나라, 문화를 전해준 나라를 침략하는 건 좀 아니지요?” 무작정 죽창이 어쩌고 노래 부르며 악쓰는 나라와 여유 있게 과거사를 언급하는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울까.

반일이 계속 먹히면 그때는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 자체가 문제다

방사성물질 해양 방류 결정으로 또 반일 이야기가 나온다. 아니 그렇게 몰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정권은 정신병이 심해서 그렇다 치자.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은 대체 뭔가. 그냥 국제법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문제다. 정보 제공 등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고 방류가 국제원자력기구 기준에 맞는 적합성 절차에 따른다면 반대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깜도 안 되는 반일, 정신병 수준의 반일, 무작정 반일이라면 이제 정말 지겹다. 방법은 하나다. 그냥 무슨 소리로 선동을 하던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된다. 반일의 비읍자만 나와도 냉소로 받아쳐줘야 정권이 버릇을 고친다. 해방된 지가 까마득하여 이제 몇 년 차인지도 모르겠다. 꼬맹이들에게 우리나라가 의 식민지였다고 애기해 주면 삼국시대와 어느 쪽이 앞이고 뒤인지 전혀 구별을 못한다. 그만큼 멀다. 그 먼 이야기를 여전히 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게 계속 먹히면 그때는 병적이고 기괴하며 집착적인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권 탓을 하면 안 된다. 그때부터는 우리 책임이다. 이런 말 들어보셨을 것이다. “현재가 과거를 심판하면 미래를 잃는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 그렇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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