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에 대한 상속세 납부 방식과 관련, ‘이건희 컬렉션’에 대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납부해야 할 상속세와 맞물려 재계와 미술계에서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건희 컬렉션 기부 방안, ‘판매 후 상속세 납부’에 비해 5000억원 정도 손해

이건희 컬렉션을 판매해 상속세 재원으로 활용할 경우 세계적인 미술작품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지난해 연말 관련 법안을 발의했으나, 여야 의원들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1차 상속세 납부시한은 오는 30일이다. 이에 따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건희 컬렉션을 판매하지 않고 절반 정도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이 부회장의 ‘통 큰 기부’라는 평가를 낳고 있다. 고가의 미술품을 판매해 일부를 상속세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비해 경제적으로 5000억원 정도의 손해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는 탓이다. 기부를 선택할 경우 기부한 미술품에 대한 상속세만 면제된다.

삼성 측은 이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분위기이다. 고가의 미술품을 기부하는 것이 추후 이 부회장에 대한 특별사면 등을 유도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해석을 낳을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3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이건희 컬렉션’...걸작품들 해외 매각되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

‘이건희 컬렉션’은 지난해 10월 타계한 이건희 회장이 수집해온 미술품과 문화재를 말한다. 당초 미술계에서는 이 컬렉션이 삼성가(家)의 상속세 마련을 위해 시장에 매물로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유산에 대한 상속세 신고·납부 시한이 이달 말로 다가오면서 전체 12조원으로 추산되는 상속세 납부 방식에도 관심이 쏠렸다.

미술계는 이 컬렉션이 매물로 나올 경우, 일부 작품은 해외로 반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국가지정문화재와 근대미술품은 문화재보호법상 해외 반출이 금지되지만, 서양 유명 작가의 작품은 해외 구매자에게 매각될 경우 다시 국내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파블로 피카소, 클로드 모네, 마르크 샤갈, 오귀스트 로댕,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등 서양 유명 작가 작품들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는 3조원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서양 유명 작가 작품의 경우 ‘부르는 게 값’이라 실제 가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평가했다.

‘미술품 물납제’ 도입하면 이 부회장 등 삼성가의 합법적 상속세 납부를 촉진

앞서 미술계에서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해 이건희 컬렉션의 해외 반출을 막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건희 회장 자산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12조원 안팎의 상속세를 부담해야 한다. 그 중 일부를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게 하면, 소중한 걸작들의 해외반출을 막으면서 이 부회장 등 삼성가의 합법적 상속세 납부를 촉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화랑협회 등 문화예술단체 12곳과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8명은 지난달 3일 문화재·미술품 물납제의 조속한 제도화를 촉구하는 건의문을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술계를 중심으로 물납제 관련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미술계 관계자는 서양 유명 작가의 작품과 관련, "이미 해외 유명 미술품 컬렉터들이 이건희 컬렉션에 관심을 보이고 물밑 접촉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전했다. 한번 나간 작품이 다시 국내로 돌아오기 어렵다는 점에서, 막대한 상속세 일부를 미술품으로 대납토록 하자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의 타당성이 거론됐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에 한해서만 세금 대납을 허용하고 있는데, 미술계에서 대납 가능 대상을 문화재와 미술품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이었다.

이건희 컬렉션,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국보 30점과 피카소 등 해외 거장 작품 망라

최근 미술품 감정계 등에 따르면 이건희 컬렉션의 최종 시가감정 총액은 2조5000억~3조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컬렉션을 감정한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은 지난해 12월부터 5개월간 시가감정을 진행했다고 한다.

컬렉션은 총 1만3000여점의 국내외 걸작들로 구성돼 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비롯한 국보 30점과 보물 82점, 파블로 피카소의 ‘도라 마르의 초상’ 등 해외 거장들의 서양 근현대미술 1300점, 이중섭의 ‘황소’ 등 한국 근현대미술품 2200점이 포함돼 있다.

삼성은 이 중 절반 이상을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 미술관에 기증할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기증하는 작품들의 감정가 총액은 1조5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근현대미술품 2200점 중에서는 1500점 가량이 미술관으로 보내질 전망이다. 한국 근현대미술 주요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국보와 보물 등 고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증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 작품들은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에 전시된다.

미술계 관계자에 따르면 “미술품을 판매한 수익으로 상속세를 납부하면 수천억 원의 부담을 덜 수 있겠지만, 초고가 작품들이 한 번 해외로 반출되면 국민들이 다시 보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결정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삼성이 이번 기증으로 감내하는 손실 규모는 5000억원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작품들을 해외 시장에 판매할 경우 1~2조원의 수익 중 절반만 상속세로 납부하면 된다. 그런데 기부를 하면 관련 상속세를 내지 않는 대신, 수익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상속세 납부시한은 오는 30일, 물납제 도입은 사실상 물 건너가

삼성이 이처럼 기부로 가닥을 잡은 데는 ‘물납제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적용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현실적인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가의 상속세 자진 신고 기간은 4월말까지이다. 이광재 의원이 발의한 ‘미술품 물납제 도입을 골자로 한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그때까지 국회를 통과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사 개정안이 통과돼도 삼성가가 ‘재벌 특혜’라는 비난 여론을 감수하고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도 있었다. 결국 삼성이 기부로 가닥을 잡자, 미술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가 가족들이 한국 예술을 후원해 온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한 것”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삼성은 말을 아끼고 있다. 미술계 관계자는 “삼성 내부에서는 이번 기증과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을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삼성이 이달 30일 상속세 신고·납부 마감을 앞두고 기부 사실을 공식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양준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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