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자살을 향해 돌격나팔을 불어대는 백해무익한 ‘파리’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척결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 국민에게는 '투표, 선거'라는 무지막지한 무기가 있지 않은가.  4월 7일의 서울, 부산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3월 9일 대선에서 투표만 제대로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 판타지 드라마가 역사 왜곡?

지난 3월 22일 시작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논란 끝에 중단되었다. 조선 초기를 무대로 한 드라마에 중국식 월병, 중국 서민들이 먹는 빠오즈(왕만두), 피단(달결이나 오리알을 삭힌 음식)을 비롯하여 의복과 칼 등 중국식 소품이 대거 등장하면서 네티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급기야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지면서 두 차례 방영을 끝으로 폐지당했다.

<조선구마사>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주제로 삼은 정통 사극이 아니라 시대만 조선 초기로 설정한 판타지 드라마다. 한 마디로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가공의 세계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런 성격의 드라마에 ‘역사 왜곡’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한가? 이런 의문에 대한 진위 여부를 성찰할 합리적 이성 따위는 이제 앵무새 모이로나 줘야 할 광기와 분노의 화약통 사회가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한국은 여차하면  시도 때도없이 전체주의 파시즘이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광기와 폭력이 난무하는 '원초적의 사회'로 돌변한 상태다.

#. 세종은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존재인가?

<조선구마사>는 한국인들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우리 민족사에서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세종이다. 왕자 시절 이름이 충녕대군이었다. 한국사 제1의 위인을 중국식으로 떡칠이 된 기생집이나 드나드는 짱구로 격하시킨 것이 이 드라마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만 원권 지폐에, 대한민국 상징 거리에, 그곳에 서 있는 동상에, 그리고 남극 과학기지에, 행정부서가 집합한 도시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한글을 창제한 거룩한 인물이었으니 왕조실록은 그를 ‘해동의 요순(堯舜)’이라는 최고 수준의 월계관을 씌워주었다. 세종에 관한 한국인의 심성은 왕조실록이 증명한 그런 이미지로 화석처럼 굳어져 왔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일거에 뒤엎는 충격적인 저작이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다. 이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세종은 한반도에 거주해 온 인종들에게 사대주의 모화사상이란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얼룩과 신분제라는 가혹한 족쇄를 채워버린 존재다. 지구상 존재했던 가장 악랄하고 잔인무도한 조선의 노비제와 기생제가 성군 세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다.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이땅에 중화 사대 모화사상을 뿌리내린 인물이 세종이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이땅에 중화 사대 모화사상을 뿌리내린 인물이 세종이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 기자가 한반도로 와서 기자조선이 창업되었나?

고려 시대에 국왕은 중국의 천자(天子, 즉 황제)로부터 책봉을 수용했지만, 지도부는 소천하(小天下)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살아 있었다. 고려 국왕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는 천자의 예로 나라를 다스렸고, 따마다 천제(天祭)를 주관했다. 조선 창업과 더불어 이러한 긍지와 자부심은 끝장났다. 나라 이름을 지어준 것은 창업자 이성계가 아니라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었다.

명 태조가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낙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1100년경 중국에서 은(殷)나라가 멸망하고 주(周)나라가 들어서자 은의 왕족 기자(箕子)가 유민을 이끌고 동이(고조선)로 건너와 문명을 전파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출범했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되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 왕에 봉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설화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뿌리 내렸다.

조선의 지도층은 중화 문화를 종족이나 국가보다 우선했고, 그것을 본받는 것을 동방예의지국의 기본이라 믿었다. 사대 모화라는 정신적 히로뽕을 맞으면서 자발적 충성심으로 중국에의 종속을 자처했다. 중화 천하 일가에 동참하기 위해 그들은 민족의 시조 단군을 팽개치고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 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기자를 시조로 삼고, 기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문제는 기자라는 중국인이 조선에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문헌 사료나 고고학적 증거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영훈 교수는 최근 발간한 『호수는 어디에』라는 저작에서 기자조선 설화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인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이영훈, 『호수는 어디에-호서와 호남은 없다』백년동안, 2021, 105쪽).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창업했다고 알려진 기자. 기자가 조선으로 왔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나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도층은 한민족의 시조는 단군이 아니라 기자라고 단단히 믿었다.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창업했다고 알려진 기자. 기자가 조선으로 왔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나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도층은 한민족의 시조는 단군이 아니라 기자라고 단단히 믿었다.

#. 자신들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날조한 한국인들

기자가 실제로 조선에 왔는지 아닌지 학문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았지만, 사실 여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사대 모화 히로뽕에 중독된 이땅의 지도층은 오로지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것이 명예스럽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기자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청주 한(韓)씨, 태원 선우(鮮于)씨, 해주 기(奇)씨, 서(徐)씨 등이 나타났으며, 기자를 따라왔다는 5,000명의 사람들이 봉화 금(琴)씨, 태인 경(景)씨, 토산 궁(弓)씨, 밀영 및 함평 노(魯)씨 등 각 성씨의 시조로 등극했다.

각 문중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족보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주자학이 민간으로 확산되는 시점에 편찬되었다. 문중은 자기 혈통과 가계를 미화하기 위해 민족의 시조를 단군에서 기자로 바꿔치기하듯 자기 성씨의 시조를 중국에서 온 것으로 날조했다. 사대 모화사상이 절정에 달했던 주자성리학의 유토피아에서는 시조가 중국에서 도래했다고 하면 그만큼 권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한국 족보의 80%는 그 시조를 중국에서 온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이성무, 『변안열 평전』, 글항아리, 2015, 73쪽). 이영훈 교수는 말한다. 조선왕조의 건립자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폐기하고 기자조선을 잇는 국호를 명에 자청한 것은 한국 문명사에 더없이 큰 단절이었다고! 이후 한국사는 중국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어버리고 말았다고!

#. 조선을 중국 천하로 뒤바꿔버린 성군 세종

1430년, 조선의 성군 세종은 하늘에 대한 제사, 곧 천제를 폐지했다.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의 고유 행사인 천제를 폐지함으로써 조선 국왕은 중국 천자의 꼬붕(제후)임을 만천하에 공포한 셈이다.

고려 시절 국왕들은 선왕이 사망하면 25~27일간 상복을 입었다. 중국에서 전해온 예법에 의하면 아버지가 죽으면 25개월간 상복을 입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시리는 군왕이 사사로운 예법 따위에 갇혀 살 수는 없는 법이므로 달(月)을 날(日)로 바꿔 25~27일만 상복을 입는 역월제(易月制)를 시행했다. 국왕이 솔선수범했으니 역월제가 온 사회에 정착되었다. 그러한 역월제를 깨뜨린 인물이 세종이다.

아버지 태종이 죽자 세종은 역월제를 폐지하고 꼬박 25개월간 상복을 입고 지냈다. 소위 3년상으로의 회귀다. 성군이 중국의 예법에 따라 솔선수범 했으니 나라 전체에 3년상 제도가 확고히 정착되었다. 국왕뿐만 아니라 국가대사를 책임진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군대의 주요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사직하고 거친 베로 지은 상복을 입고 미음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3년간 빈소와 무덤을 지키는 ‘상복의 나라’로 돌변하고 말았다.

조선이란 독립국을 중국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제후국으로 강등시켜 지배와 복종의 국제질서로 편입시킨 주인공은 이 나라의 수많은 국민들이 성군으로 추앙하는 세종이란 ‘역사적 사실’은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파라독스인가?

학자들의 연구 결과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북경 지역의 중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한 발음기호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북경 지역의 중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한 발음기호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참으로 민망한 ‘훈민정음 창제’의 진실

세종의 빛나는 업적으로 추앙받는 ‘훈민정음 창제’, 즉 한글 발명의 역사적 사실도 기존에 알고 있는 상식과 충격적일 정도로 다르다. 우리의 통념을 사정없이 깨부순 주인공은 세계적인 언어학자 정광 교수이고, 그가 쓴 『한글의 발명』이란 책이다. 중국 주변국 중에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쓴 시기를 보면 조선이 꼴찌에 해당한다. 이미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티벳 문자, 요의 거란 문자, 금의 여진 문자, 위구르 문자, 파스파 문자가 제정되어 사용되었다.

정광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글은 세종의 진두지휘와 집현전 학자들의 노고가 빚어낸,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말하자면 한글은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파스파 문자는 티베트 문자가 그 근원이며, 티베트 문자는 고대 인도 음성학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몽골은 유럽 일대까지 정복한 후 세계제국을 이끌기 위한 통일된 언어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 결과 쿠빌라이 칸이 1269년 팍스파 라마에게 명하여 만든 것이 파스파 문자다. 정복지의 언어학자, 음운학자가 총동원되어 제정된 파스파 문자는 원나라 세계제국의 언어로 사용되었고, 고려 또한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정광 교수의 저작을 통해 세종 시절 한글이 만들어진 이유를 추적해 본다.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중국 북송(北宋)과 고려의 한자 발음이 거의 비슷해 사서오경으로 배운 한문으로 중국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몽골족에 의해 원(元)이 건국되어 북경을 수도로 정하면서 북경 일대 언어가 중국 공용어가 되었다. 원이 멸망하고 들어선 명나라가 북송이나 당나라 표준어와 다른 북경어를 표준어로 지정하면서 같은 한자라도 우리의 전통 한자 발음과 크게 달라져 한문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졌다.

우리 힘으로 중국 한어음을 뜯어고칠 수는 없으니 우리의 한자음을 고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시기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다. 개정된 한자음, 즉 북경 지역의 중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한 발음기호로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광 교수는 『한글의 발명』에서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한글이 과학적이라고? 도대체 뭐가 과학적인지 대답해봐라.”

이영훈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한글과 관련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한글 창제는 중화의 기준으로 교정할 보조 문자가 필요하여 만들어진 소중화의 문화정책이다.”

#. 중국판 창씨개명, 일본판 창씨개명의 진실

고려말 주자학에 심취한 정몽주는 “꿈속에서라도 주나라를 보고야 말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몽주(夢周)라 지었다. 그의 꿈과 희망은 조선 땅에 주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정도전의 이름은 도(道)를 전한다(傳)는 뜻이다. 여기서 도란 ‘주자의 도’, 즉 조선을 동주(東周)로 만드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성웅 이순신의 아버지는 자식들이 중화를 떠받치는 큰 신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자식들 작명 과정에서 전설적인 중국 삼황오제의 이름을 차용했다. 장남은 복희씨(伏羲氏)에서 한 글자를 따 이희신(李羲臣)으로, 둘째는 요(堯)임금에서 한 글자를 빌려 이요신(李堯臣)으로, 셋째는 순(舜)임금 이름을 따서 이순신(李舜臣), 넷째는 우(禹) 임금 이름을 따서 이우신(李禹臣)으로 지었다(박치정, 『한국 속 중국』, 도서출판 삼화, 2017, 293쪽).

조선의 행세깨나 하는 문중은 족보에 자기 시조를 중국에서 온 것으로 고쳤고, 중화 방식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광범위하게 자행했다. 누가 폭력으로 강권하거나 감언이설로 속여서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다. 조선 사람 스스로 나서서 성(姓)과 이름(名)을 중국식으로 갈아치웠다.그들은 중화 천하일가를 이루기 위해 창씨개명을 자랑스러운 행위로 인식하고 행복해 했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자발적으로 중화적 창씨개명을 통해 중화 문화에 투항했다. 그 결과 이름만으로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족보만 따지면 한국인들은 자기 나라를 중국에 갖다 바친 셈이 되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은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시행했다. 이것은 중화적 종법제도가 뿌리내린 조선을 중화권에서 분리하여 한일 동조론의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한 시도였다. 한국인들이 창씨개명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혐오·저주하는 이유는 창씨개명을 요구한 주체가 ‘중화 문명’이 아니라, 주자성리학자들이 ‘왜놈’이라고 멸시하던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 중화 문화에서 분리시키려 하자 반발 저항한 것이 그 핵심 본질 아니겠는가.

#. 화교 국가 주제에 한미동맹을 맺어?

한국인들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사대 모화사상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관계로 얽혔으며, 자신들의 정신적 모국인 명나라가 여진 오랑캐에게 멸망하자 중화의 법통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소중화 사상으로 치환된다. 급기야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586 운동권 주사파는 친중국, 친공산주의, 친대륙, 친전체주의 파시즘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의 친중 행각은 이념적 공동체로서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대 모화사상이라는 정서적 공동체이자, 중국 중심의 경제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중화, 조선중화주의의 부활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기류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고 있는 2021년이다. 이 엄중한 국제정세의 격류 속에서 전통적 한미동맹을 붕괴시키고 중국에 빌붙기 위해 일대 모험을 서슴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한미동맹을 간절히 원한다.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과 그 핵심 세력인 586 주사파 일당들은 대다수 한국인들이 격렬히 반대하는 ‘중국으로의 투항’을 통한 국가 자살의 길로 이 나라를 질주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대다수 한국인들은 죄가 없나? 아니다. 우리 모두 공범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막지 못한 죄, 586 주사파가 핵심이 된 더불어민주당에 180석의 의석을 안긴 죄, 박근혜 불법 탄핵을 저지하지 못한 죄, 저들의 적폐청산 행보를 방관한 죄, 부화뇌동한 죄, 저들에게 빌붙어 나라 세금 뜯어먹은 죄, 공짜 좋아한 죄….

바이든 정부는 한국을 향해 “당신들은 미국 편에 설 것인지, 중국 편에 설 것인지 빨리 결정하라”고 직접화법으로 묻고 있다. 우파 진영을 향해선 “저따위 저질 적폐 정권을 합법적인 선거로 무너뜨리지 못하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을 한 시진핑 중국 주석. 그들이 이런 망언을 하는 근거는 한국인들의 족보다. 한국인들은 족보에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건노온 중국인"이라고 날조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을 한 시진핑 중국 주석. 그들이 이런 망언을 하는 근거는 한국인들의 족보다. 한국인들은 족보에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건노온 중국인"이라고 날조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중공은 한국인들의 족보를 증거물로 “한국은 중국인들이 건너가 세운 나라이니 화교 국가 아닌가. 화교 국가 주제에 중국의 적인 미국과 동맹을 맺어? 살고 싶으면 미국과 동맹의 탯줄 끊고 중화 조국으로 투항하라”고 협박한다. 시진핑이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망언은 그들 나름의 이유와 근거가 있는 발언이다.

586 주사파는 구한말 위정척사 주자성리학자의 21세기판 버전이다. 중공의 감언이설에 녹아난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 같은 나라, 중국몽 함께 하겠다”고 읍소하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생전에 “파리가 말 궁둥이에 딱 붙어 있듯이 한국도 중국에 딱 붙어야”라고 아부했다. 중국을 향한 그들의 아부는 조선 국왕들이 도성 백성들 지켜보는 앞에서 중국 칙사에게 5배 3고두의 예를 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국가 자살을 향해 돌격나팔을 불어대는 백해무익한 ‘파리’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척결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 국민에게는 '투표, 선거'라는 무지막지한 무기가 있지 않은가.  4월 7일의 서울, 부산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3월 9일 대선에서 투표만 제대로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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