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근거도 명확지 않은 금지와 통제가 개인의 자유를 크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5인 이상 모임 금지 조치가 1980년의 대학생 집회 금지와 무엇이 다른가? 당시도 대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사회가 불안해진다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근거 아닌 근거가 돌아다녔다. 군사 독재 치하의 자유권 침해와 자랑스러운 K방역 조치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고 말하지 말라. 국민의 자유가 타당한 이유 없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1980년보다 지금의 조치가 더 비상식적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모처럼 ‘라떼’(나 때) 얘기 좀 해보자.

1980년,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 전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시해당한 이후 전국은 어수선하면서도 뭔가 활기를 담은 바람에 둘러싸였다. 그때 불어온 변화의 기운을 당시에는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억압과 독재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는 얘기다. 빨리 계엄을 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 담은 시위가 거리마다 이어졌고 절치부심 기다리던 재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앞날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들이 여기저기서 피어났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이미 전해 12월 12일 이후 실제 권력은 전두환 계엄사령관에게 넘어가 있었고 그에 의한 정국 장악은 점점 굳건해지고 있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잠시, 1980년 5월 17일 내려진 계엄령확대조치는 정국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시작되었지만 서울에는 흉흉한 소문만 돌았을 뿐 언론 통제 때문에 공식적이고 구체적인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주요 재야 인사들이 연금‧구속되고 공직 사퇴했다는 뉴스를 담은 호외가 거리를 메웠다. 그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오후부터 하늘이 어두웠다. 저녁엔 권투 선수 박찬희의 제6차 타이틀 방어전 생중계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와 친구 몇몇은 권투 중계를 보러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박찬희, 너만 믿는다.”

그런데 이제껏 현란한 기술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던 박찬희 선수는 답답한 경기를 이어가다가 9회에 KO패를 당했다. 상대는 오쿠마 쇼지, 하필(?) 일본 선수였다. 20대 초반의 우리는 더욱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애꿎은 술만 들이켰다.

우리 국민은 석 달째 야외에서 열리는 이런 동호회 모임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 석 달째 야외에서 열리는 이런 동호회 모임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그 후 사회 분위기는 ‘험악’ 그 자체가 되었다. 여기까지의 일은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 한동안 대학생의 소모임까지 금지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학생 세 명 이상 모이려면 집회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가 공식적인 것이었는지, 단지 뜬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죄 없는 우리 대학생들은 침침한 지하 회의실이나 중국집 골방 같은 곳에서 몰래 모임을 가졌고 헤어질 때는 시간 차이를 두고 하나둘 주변을 살피며 흩어져야 했다. 내가 속한 모임은 정치적 성격을 띤 것도 아니고 대학생 연극 동아리였을 뿐이지만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그 무렵 내가 목격한 사건 등과 관련한 일련의 분위기는 집합 금지 조치에 저항할 수 없도록 공포감까지 조성했다. 그날도 대학로에서 모임을 마치고 나 혼자 거리에 나서고 있었다.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건너편쯤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지축을 흔드는 진동과 엄청난 소음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혜화동 로터리 쪽에서 탱크를 앞세운 무장 군인들이 그 넓은 대학로를 가득 메우고 행진해오고 있었다. 국군의 날도 아닌 그저 평일 대낮이었으며 별다른 예고도 없었다. 평소 보기 힘든 험악한 군인들의 모습에 나는 그 자리에 붙어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내 움직임이 그들에게 포착되면 그들이 들고 있는 총으로 나를 쏘아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 행렬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30분은 족히 걸렸을 것 같았는데 그동안 내 주위에서 부산한 움직임이나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지금 같으면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도 그에 못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 조치의 장기화이다.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는 지난 12월부터 23일부터 1월 4일까지 한시적으로 내려졌던 조치이다. 그때 함께 시행되었던 카페 등에서의 취식 금지, 영업 시간 단축 등은 지금 모두 해제되었거나 완화되었다. 그러나 석 달째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우리 국민은 5인 이상 사적 모임을 갖지 못한다. 이 조치가 해제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벌금, 영업 정지, 구상권 청구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겨누듯 국민을 위협한다.

처음엔 가족이어도 같은 주소에 거주하지 않으면 모일 수 없었다. 그런데 명절을 거치며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동거하지 않아도 직계존비속이라면 5인 이상 모일 수 있도록 했다. 그래도 부부가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려면 세 가족이 서로 연관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몇 통의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이 무슨 촌극인가?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 조치는 벌금, 영업 정지, 구상권 청구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총을 겨누듯 국민을 위협한다.

물론 이렇게 해서 코로나19 방역 효과가 확실하다면 당연히 협조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근거가 미약하다. 게다가 예외가 너무도 많다. 회의 등 공적 모임은 물론 사적 모임도 허락되는 경우가 많다. 허용의 기준도 명확지 않다. 사원들의 사기 진작과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한 회사 회식, 야유회 등은 금지되는데 정치인들이 몰려다니며 어묵 사 먹는 일은 허용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수십, 수백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있고 대형마트 등 다중 이용 시설도 모두 정상화되었다. 주말이면 가는 곳마다 봄을 맞아 집 밖으로 쏟아져 나온 상춘객들로 붐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인 이상은 식사도 할 수 없고 모임도 할 수 없다. 유독 동창회, 동호회, 돌잔치, 직장 회식, 집들이, 회갑연, 칠순연 등에서만 바이러스가 옮겨 다닌다는 얘기인가? 상견례는 되는데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돌잔치는 안 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회의할 때는 바이러스가 잠을 자다가 회의 후 밥 한 끼 먹으려 하면 그때부터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인가?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가 계속되면 음식점 등 관련 업종의 상당수가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을 것이다. 물론 심각한 피해는 이미 시작되었다. 또 사적 모임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립에 익숙해질 것이고 곧이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시달릴 것이다. 명절을 지내면서 “가족 모임을 강행하려는 우리 시부모를 신고해주세요”, “시어머니가 아기는 5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우겨서 갈등이 생겼다”라는 등 심상치 않은 글들이 SNS에 실리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직계 가족은 5인 이상이라도 모일 수 있다고 하지만 ‘왠지 모여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는 아직도 남아 가족 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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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자유 침해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기간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근거도 명확지 않은 금지와 통제가 개인의 자유를 크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치가 1980년의 대학생 집회 금지와 무엇이 다른가? 당시도 대학생들의 집회 때문에 사회가 불안해진다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근거 아닌 근거가 돌아다녔다. 군사 독재 치하의 자유권 침해와 자랑스러운 K방역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고 말하지 말라. 국민의 자유가 타당한 이유 없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1980년보다 지금의 조치가 더 비상식적이다. 그때는 대학생에게 한정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전 국민 대상이다. 그때는 옳든 그르든 대상과 명분이 확실했지만 지금은 확실한 것이 거의 없다.

“온 나라가, 아니 전 세계가 전염병 때문에 비상이 걸렸는데 그까짓 모임이 대수인가? 좀 참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하지 말라. 이건 모임의 문제가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를 국가 권력이 명확한 근거 없이 오랫동안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국민의 자유 침해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기간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고 있어야 할 것인가? 이제 이 조치가 코로나19 방역에 반드시 필요하며 효과적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필수적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종료를 요구해야 한다.

장기간의 모임 금지는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경제적 피해를 극대화한다. 또 가족 등 사회 구성원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고 개인을 고립화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더 무서운 질병에 몰아넣는, 돌이킬 수 없는 폐해가 될 것이다. 그러니 5인 이상 모임 금지 조치의 종료는 한 시가 급한 중대한 일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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