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우연 박사] 계약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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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1.02.28 22:28:26
  • 최종수정 2021.03.0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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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이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학계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로이 본격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믿는다. 우선 '위안부 성노예설'에 서 있는 정의기억연대(개칭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활동가들과 그를 지원해온 연구자들이 램지어의 문제제기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들이 지금에 와서 고작 '계약서'의 부재(不在) 뒤에 숨어 입을 다문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겁한 일이다.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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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 로스쿨의 램자이어(램지어) 교수는 최근 그의 논문에서 위안부와 위안소의 관계를 계약으로 파악했다. 한국과 미국 연구자들의 그에 대한 비판의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많은 경우 인신공격성 비난을 수반하고 있지만, 비판의 핵심은 그가 이러한 관계를 입증하는 계약서, 계약의 내용을 담은 '종이'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의 배경에는 합의의 내용을 반드시 문서로 남기는 구미(歐美)의 계약 문화와 구두 계약에 많이 의존하였던 조선·한국 사이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계약서가 없다는 비판은 계약 자체가 없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계약이 없는데 계약서가 있을 수 있냐고 추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램자이어 비판자들은 공통적으로 조선 여성이 위안부가 되는 계기는 그녀들이 위안소와 맺은 계약이 아니라, 일본의 관헌(官憲), 즉 군인·경찰·관리 등에 의한 '강제연행'이라고 확신한다. '강제연행'이었는데, 웬 계약서나 계약을 운운하느냐는 비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확신'하는 근거가 산적해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인 전 위안부들의 '증언', '가해자'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자백', 1992년에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발견한 '강제연행'을 지시한 일본군의 문서, 1993년, 일본 정부가 '사죄'의 마음을 담아 발표한 고노담화(河野談話), 1996년 유엔(UN) 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비롯해 국제인권단체 엠네스티와 국제법률가연맹(ICJ)과 같은 국제기구 명의로 된 각종 보고서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달리, 이 모든 증거들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것은 전 위안부들의 '증언' 뿐이다. 그외 모든 것들은 허구이거나, 오로지 이 '증언'에 근거를 둔 것일 뿐이다.

일본군 위안소에 일본군이 개입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자주 제시되는 소위 '육지밀'(陸支密) 문서. 하지만 문서의 내용은 오히려 위법한 방법으로 여성들을 군 위안소로 데려옴으로써 군의 위신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일본군 위안소에 일본군이 개입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자주 제시되는 소위 '육지밀'(陸支密) 문서. 하지만 문서의 내용은 오히려 위법한 방법으로 여성들을 군 위안소로 데려옴으로써 군의 위신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국제기구의 보고서들은 그 모두가 전 위안부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일본군 문서, 고노담화를 논거로 제시했다. 또 고노담화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이 있고,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일본군의 문서가 있다'고 확신하는 상황에 떠밀린 일본 정부가 가 궁지에 몰려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1993년 이후, 그 일본군 문서는 '강제연행'과 무관한 것임이 입증됐고, 다른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 요시다 세이지의 '자백'은 훗날 그 자신이 조작한 '창작물'임이 드러났고, 일본에서 그를 집중 보도한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최대 발간 부수를 자랑하는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요시다 세이지에 관한 지난 보도를 모두 취소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얼핏 보아 증거가 산처럼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 위안부들의 증언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면 전 위안부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은 믿을 만한 사실인가?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나선 1990년대 초의 증언 내용은 사실 '강제연행'과 무관했다. 위안부가 된 계기를 조선인에 의한 '취업사기'나 자신의 부모에 의한 '인신매매'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뒤에 위안부 문제가 한국의 사회·정치적 문제로 커지고, 한일 간 외교문제로 비화하자 말을 바꿨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강제연행'을 말하기 시작했다. '증언'이 정치적으로 오염된 것이다. 하나의 예만 들어 보자.

현재 한국에서 국가원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자신을 독립운동가로 여기는 듯한 전(前) 위안부 이용수(93)는 지난 1992년 8월15일 KBS 텔레비전 특집 방송에 출연했다. 진행자가 어떻게 '정신대'(위안부)가 됐는지를 묻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그때 나이 16살인데, 헐벗고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인가 원피스 한 벌하고 구두 한 켤레를 갖다줍디다. 그걸 주면서 가자고 그래가지고 그걸 받아 가지고…… 그때는 뭐 그런 줄도 모르고 따라갔습니다”

1992년 8월15일 KBS 특집 방송 〈생방송 여성, 나는 여자정신대: 민족수난의 아픔을 딛고서〉에 출연한 이용수 씨의 당시 증언 내용.(출처=미디어워치)
1992년 8월15일 KBS 특집 방송 〈생방송 여성, 나는 여자정신대: 민족수난의 아픔을 딛고서〉에 출연한 이용수 씨의 당시 증언 내용.(출처=미디어워치)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벌인 전형적인 유괴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이용수가 2007년 2월 16일에 미국 하원 위안부 피해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됐다. 이때 이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고, 이 씨의 증언은 미 하원이 일본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군인하고 그 여자아이하고 들어와서 어깨를 이렇게 둘러싸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군인은 뒤에서 등에 뭔가를 콱 찌르면서 그냥 끌려갔습니다. 밤에. (나는)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전 위안부들의 “증언”의 첫 번째 문제는 이와 같이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녀들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도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증명할 만한 공적(公的)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민간인을 포함하여 그러한 사건을 목격한 제3자가 남긴 기록도 없고, 그러한 증언도 나타나지 않았다. 강제연행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당시 20대 조선인 여성의 8%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인 '20만 명'이 그렇게 끌려갔다고 주장하면서도, 지난 30년, 그 장구한 기간 중에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증거를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녀들의 '증언'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실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램자이어 교수를 비난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에서 유명해진 알렉시스 더든(Alexis Dudden) 미국 코네티컷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만약 주장을 뒷받침할 서류가 없다면, 증거가 없다면, 그 주장은 진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끔찍하고" "전형적인" "사기"라고 했다. 이 기준을 들이댄다면 전 위안부들의 '증언'은 더든 교수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까?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학 역사학과 교수.(사진=코네티컷대학)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학 역사학과 교수.(사진=코네티컷대학)

일본 관헌의 '강제연행'이 아니라면 조선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것은 어떤 계기, 경로를 통해서였을까? 먼저, 조선인 알선업자가 좋은 일자리를 소개한다면서(취업사기), 위안부로 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여성이나 그 부모를 꾀어 데려가거나 팔아넘기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 경우에는 위안부 고용계약은 불필요하고, 전차금(前借金)은 지급되지 않거나 위안부로 계약한 경우보다는 소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취업사기를 포함한 유괴는 이미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부터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 직업적 알선업자가 활개를 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 여성을 데리고 조선에서 출발하여 위안소에 이르는 데에는 여러 공적(公的) 서류가 필요했다. 우선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로 가려는 모든 여행자는 여행의 목적 등을 기입하여 경찰서장이 발급하는 '신원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특히 위안부의 경우, 절차는 더욱 까다로웠다. 여성과 위안소 업자가 함께 작성하는 취업신청서에 해당하는 '임시작부영업허가원'(臨時酌婦營業許可願), 사진 2매, 호주(戶主)와 여성 본인이 날인한 취업승낙서, 이상 관계자의 인감증명서, 여성의 호적등본(취업승낙서, 인감증명서, 호적등본은 본인이 아니면 작성하거나 발급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영사관 직원이 직접 해당 여성이 위안소에 취업하고자하는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등, 여성과 업자를 조사한 뒤에 작성하는 조사서가 필요했다. 납치는 물론이고 취업사기로 여성을 데려왔을 때도, 이런 서류를 구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괴된 여성이 위안소에 도착한 뒤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위안소를 이용하고 관리를 담당하는 부대는 위안부 본인들이 장차 무슨 일을 하게 될지를 출발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했다. 위에서 말한 서류를 군부대에서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서, 속아서 위안소로 온 여성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사례도 있었다.

이상으로 볼 때, 유괴에 의한 위안부 조달보다 딸이 무엇을 하게 될지를 이미 알고 있는 부모가 자신의 딸을 파는 인신매매를 통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부모가 딸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사회문제의 하나가 될 정도였다. 1920년대 중반, 일본에서도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일본의 그 유명한 1926년의 2·26사건(반공 성향의 일본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 당시에도 딸을 팔아야 하는 군인들의 어려운 처지가 사건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이러한 거래는, 인신매매라는 불법, 그리고 호주제(戶主制) 하 호주의 정당한 권리행사와 합법적 직업 알선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였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인육시장'(人肉市場)이라고 하는 인신매매가 횡행하면시 이것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혐의로 경찰의 조사나 재판을 받은 사람들조차 대부분 무죄로 처분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모집업자와 거래하는 부모는 딸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문서에 의한 명시적 계약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부모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계약에 다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비판자들은 이러한 당시 실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에 위치한 옛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의 모습.(사진=연합뉴스)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에 위치한 옛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의 모습.(사진=연합뉴스)

위안부와 업자 사이에서 계약이 이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조선이나 외지(外地)에서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미 매춘부로 일하고 있는 여성을 위안부로 모집하는 경우였을 것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가장 소홀히 다뤄 왔지만,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경로일 것이다. 우선, 1940년경, 조선반도 내에는 총독부가 파악한 매춘부가 약 1만 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의 전장(戰場)과 대체로 겹치는 지역인 중국·만주 등 조선인이 진출한 곳에 있던 조선인 매춘부의 숫자는 8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 숫자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정부 기관이 파악할 수 있었던 매춘부 수에 한정되며, 통계에 잡히지 않은 매춘부가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이들 기존 매춘부들을 위안부로 전업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매춘부로 일하는 것과 달리 군(軍)위안부로 일하는 것이 고위험·고수입이라는 점을 그녀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모집업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 매춘부의 경우, 취업사기나 유괴, 그리고 인신매매에 따르는 위험이 없었다. 매춘부의 처지에서는 군위안부가 된다고 해서 사회적 평가가 추가적으로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군인을 위안한다는 자부심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일본군 상부나 병사들이 위안부의 출신을 따질 처지도 아니었고, 실제도 따지지도 않았다. 따라서 알선업자가 접근하는 첫 번째 대상은 조선 내외의 매춘부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좌익적이고 반일적인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그 사장, 회장을 역임한 송건호(宋建鎬)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화되기 전인 1984년에 그가 낸 책, 《일제지배하의 한국현대사》(日帝支配下の韓國現代史)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1927년생으로서 식민지 시기를 경험한 사람이다.

“일본 당국은 1937년말의 남경(南京·난징) 공략 후, 서주(徐州·쉬저우)작전이 개시될 무렵, 조선 내의 어용 알선업자들에게 지시하여 빈핍(貧乏·빈곤함)으로 매춘생활을 하고 있던 조선 여성을 다수 중국대륙으로 데리고 가서 '위안소', '간이위안소', '육군오락소' 등의 명칭을 가진 일본군 시설에 배치하고, 일본군 병사의 노리갯감으로 삼았다.”

또 버마(미얀마) 랑군에 소재하는 둘째 부인의 남동생(처남)이 소유한 위안소에서 손님 안내와 회계 등을 담당하는 죠바(帳場)로 일하면서 그 생활을 일기로 남긴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의 저자 박치근(朴致根)의 부인은 대구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인은 가끔 경상북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여인들을 모집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여관업은 매춘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 씨와 그의 처남은 1942년 7월, 19명의 여인을 모아 동남아로 출발한 바 있다. 이 여성들을 모집할 때, 그들은 농촌에 가서 여성을 유괴하거나 비정한 부모를 찾아 딸을 매입하기보다는, 먼저 부인의 여관에 출입하는 여성들을 포함하여 이미 매춘부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섭하지 않았을까?

안병직 전(前)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정리한 박치근 저(著)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표지.(출처=교보문고)
안병직 전(前)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정리한 박치근 저(著)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표지.(출처=교보문고)

전 위안부들은 처음에는 취업사기나 인신매매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원래 매춘에 종사하다가 위안부가 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매춘에 종사한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밝히는 것은 한국에서는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자초하는 것이다. 군위안부가 한국과 일본의 문제로 폭발한 1992년 이후, 실명으로 자신이 군위안부였음을 밝히고 나선 일본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단, 한국에서 커밍아웃한 사람들은 매춘업 경력이 없는 일부의 위안부로부터 집중적으로 배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잘 묘사하는 조선인의 증언이 있다. 자료는 1945년 초, 태평양에서 미군 포로가 된 3명의 조선인 일본해군 군무원에 대한 심문기록(〈Composite Report on Three Korean Navy 'Imperial Japanese Navy' Civilians List No. 78, dated 25 March 1945, Re: Special Questions on Koreans〉)이다. 이 문서에는 그들의 실명까지 나와 있다.

질문은 "일본군을 위해 매춘부(prostitute)로 일할 조선 여성을 모집하는 것에 대해 조선인들은 보통 알고 있는가? 이러한 일에 대해 평범한 조선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당신들은 이러한 일로 인해 발생한 소란이나 마찰에 대해 알고 있는가?"였다.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이 태평양에서 본 모든 매춘부들은 자원자(colunteers)이거나 그들의 부모에 의해 매춘부로 팔린 사람들이다. 이것은 한국적 사고방식이지만, 일본인이 여성을 직접적으로 징발(direct conscription)했다면, 늙은이나 젊은이나 격분하여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남자들은 분노하여,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일본인들을 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위안부들을 '매춘부'로 부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지만, 이 답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첫째, '강제연행'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둘째, 부모의 인신매매나 매춘부의 전직(轉職) 또는 일반인의 취업이 위안부가 되는 일반적인 경로였다. 나는 여지껏 조선인이 위안부가 되는 과정정과 관련해 이같은 종합적인 증언을 아직 보지 못했다.

‘3명의 조선인 ‘일본 제국 해군’ 군속에 대한 합동 보고서 목록 제78호(Composite Report on Three Korean Navy ‘Imperial Japanese Navy’ Civilians List No. 78)’, 1945년 3월 25일, 조선인들에 대한 특별 질문에 대한 답변(Re Special Questions on Koreans)
〈3명의 조선인 '일본 제국 해군' 군속에 대한 합동 보고서 목록 제78호〉(Composite Report on Three Korean Navy 'Imperial Japanese Navy' Civilians List No. 78), 1945년 3월25일 조선인들에 대한 특별 질문에 대한 답변(Re: Special Questions on Koreans)

위안부 모집 방법에서 부모의 인신매매, 일반인의 취업, 매춘부의 전직이 중심이라면, 역시 위안부 자신이나 그녀를 대신하는 부모가 알선업자나 업주와 경제적 계약을 맺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성(性)노동자'(sex worker)였다. 그들이 성노동을 위해 알선업자나 업주와 계약을 맺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의 노동계약과 다르지 않다.

행위자들이 있고 그들이 일정한 패턴에 따라 행동했다면, 그것은 계약 당사자가 계약에 따라 행동한 것이며 계약이 존재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부정하려면, 전차금의 수수(收受), 계약기간의 존재, 위안부와 위안소 사이의 매출금 분할 등과 같이 램자이어 교수가 계약의 실체로서 주장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에 대해 제기된 어떠한 비판도, 설사 부분적이라고 할지라도, 그에 성공하지 못했다.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이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학계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로이 본격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믿는다. 우선 '위안부 성노예설'에 서 있는 정의기억연대(개칭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활동가들과 그를 지원해온 연구자들이 램지어의 문제제기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들이 지금에 와서 고작 '계약서'의 부재(不在) 뒤에 숨어 입을 다문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겁한 일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주장해온 성노예설는 3개의 지주(支柱)가 있다. 첫째, '강제연행', 둘째, '보수가 없었다', 셋째, '자유의사에 따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들이다. 램자이어 교수는 '계약서'의 존재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성노예설'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위안부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들도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것이 지난 30년간 자신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온 한국 국민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며 책임이다.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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