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정확히 40년 전으로 돌려보자. 많은 국민들이 길었던 유신체제를 벗어나 민주화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1980년 새해를 맞이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우리를 포근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 있었다. 그렇지만 개나리·철쭉꽃이 만개하던 춘삼월은 연말에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실체를 확인하는 잔인한 계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서슬 퍼렇던 제5공화국은 ‘사회정화’라는 요즘의 ‘개혁’이라는 말과 비슷한 전가의 보도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다.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한국 사회 곳곳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정치활동 규제를 시작으로 경제계 심지어 연예계까지도 손을 댔다. 당연히 언론 또한 정화대상에서 빠질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언론정화운동’이었다.

가장 먼저 ‘언론통폐합’ 작업이 시작되었다. 삼성그룹이 소유하고 있던 동양방송(TBC)과 동아일보의 동아방송을 KBS로 통폐합하고, 기독교방송은 순수 선교방송만 허용했다. 또 민영방송이었던 MBC 지분 50%를 KBS가 소유하게 해 사실상 독점 국영방송 체제를 구축했다.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애매한 공영방송 체제는 신군부의 언론통제 산물이다. 이뿐 아니라 군소 신문사들을 대거 퇴출시키고 독점 국영 통신사를 설립해 국·내외 뉴스를 통제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권이 통제하기 용이한 언론체제를 구축한 다음 곧바로 언론인 정화작업이 추진됐다.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껄끄러울 수 있는 기자들을 내쫓는 것이다. 사주가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하기도 하고 정권이 직접 선별하기도 하는 등 방법은 다양했다. 물론 언론사들의 자율적 정화작업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현 정부 집권 초기 보수성향 정치평론가들을 방송에서 대거 퇴출시킨 방법과 매우 흡사하다. 이처럼 신군부는 집권 초기에 아주 강압적인 언론통제 채찍을 휘둘러댔다.

채찍 다음에는 본격적인 당근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방송시장은 그 후 오랫동안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공공 독점구조를 견고하게 유지하게 된다. 이 기반 위에 KBS와 MBC는 공영방송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광고수익으로 명실상부한 ‘신이 감춰놓은 직장’이 됐다. 정권에 순치되거나 홍보에 앞장섰던 언론들에 대한 일종의 대가였다. 이처럼 제5공화국 관치언론 체제는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순항할 수 있었다. 비단 방송뿐 아니라 거의 모든 언론사들이 유사이래 최고의 호시절을 누렸다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계를 2020년으로 되돌려 보자. 2017년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한국 사회 곳곳에 만연된 이른바 ‘적폐청산’을 내걸었다. 40년 전 신군부가 내세웠던 ‘사회정화’하고 아주 비슷한 느낌이다. 정권의 구미에 맞게 손보는 것도 그때와 크게 느낌이 다르지 않다. 언론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야당 시절부터 언론민주화를 입에 달고 살았으니 절대 가만 둘리 없었다. 가장 먼저 방송독립을 내걸고 공영방송을 장악한 노조는 마치 온 몸을 던져 정권 호위에 앞장서고 있는 것 같다.

1980년과 다른 점은 겉으로는 외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방송사들이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순종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보복이나 불이익에 의한 자발적 통제(self-censoring)는 직접 통제보다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다. 마치 공포물에서 위험이 드러나기 전에 공포감을 더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수성향의 종합편성 채널들은 3~4년마다 실시되는 재승인제도를 통해 압박하고 있다. 조국 사태를 비롯해 권력형 비리와 불법 의혹들이 나올 때마다 보도에 앞장섰던 방송사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방송사에서 밀려난 보수논객들이 둥지를 튼 유튜버도 규제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대통령부터 모든 정부·여당 인사들이 불리할 때마다 가짜뉴스를 규제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최근에는 가짜뉴스에 대한 징벌적 보상을 강화하는 입법도 추진하겠다고 한다. 투명한 원칙 없이 보수유튜브들에게 마구 붙여지고 있는 노란 딱지도 그 내면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급기야 채찍만 가지고 안되겠다 싶었던지 이제는 당근을 쓰려는 것 같다. 지상파방송사들의 지상목표였던 중간광고를 허용하였고 KBS수신료 인상도 추진하고 있다. 오랜 기간 국민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난제들을 의석수 180이라는 무소불위의 힘으로 밀어 부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광고도 규제하겠다고 한다. 아마 지상파방송에서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광고를 어떻게든 붙잡아 보겠다는 최후의 저항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그야말로 당근을 소쿠리 채로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적자가 눈덩이같이 불어나고 있다면서도, 직원의 절반 가까이가 연봉 1억 원을 넘고 그들 중 상당수가 무보직자라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도리어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우리 회사 들어와 봐’하는 오만방자한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정부·여당은 누가 뭐래도 충성의 대가로 확실한 당근을 주고야 말겠다는 태도다. 멀지 않아 지상파방송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유튜브와 넷플릭스 같은 OTT 사업자들도 규제하겠다고 덤벼들 기세다.

아마 방송사들은 1980년대 정권 홍보에 앞장서 배부르고 등 따스웠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론은 권력에 충성하고 권력은 그 대가를 보상해주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후견인 관계(client relation)’ 말이다. MBC까지 수신료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이 만큼 해주었으니 나도 좀 나눠주라’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후견인 관계는 철저히 이익을 공유하기 위한 계약 결혼이다.

그러므로 서로 무언가 줄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정권이나 언론이나 힘이 있을 때만 유효한 것이다. 그런데 온갖 비리 의혹으로 얼룩지면서 1년밖에 남지 않은 정권과 1개 인기 유튜버보다 영향력 없는 올드 미디어와의 계약 결혼이 얼마나 지속될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계약기간 기간 만료 전에 보상해주고 또 받아내겠다는 심사는 아닌지 모르겠다.

황근 객원 칼럼니스트(선문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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