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의 애국적 기부활동과 독립운동 지원 의지를 꺾어버린 것은 양반 이범윤의 갑질 덕분이다. 그가 일본군에게 처형당한 것은 일본·러시아 민간인을 학살한 한인 빨치산 부대의 만행 덕분이다. 추미애에게 최재형상을 갖다 안긴 것은 죽창가를 신봉하는 집단다운 발상이다.

김원웅의 광복회가 퇴임을 앞둔 추미애 법무장관에게 최재형 상을 수여했다. 그것도 최재형 기념사업회와 사전 협의도 없이. 광복회 측은 추 장관이 친일파 이해승의 땅 등 공시지가 520억원(시가 3,000억원) 상당의 친일 재산 171필지의 국가 귀속을 위해 재임 기간 중 노력한 점 등을 인정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추 장관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사업회) 측은 “최재형상을 후손과 본 사업회 승인 없이 수여한다는 것은 최 선생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사업회는 “국민적 존경을 받는 최재형 선생의 이름을 빌려 상을 수여하는 것은 광복회 정관에 금지된 정치활동이며 김원웅 광복회장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라고 항의했다.

김원웅의 광복회가 최재형 유족과 최재형기념사업회 측과는 협의조차 없이 추미애 장관에게 최재형상을 주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사진은 최재형상을 수상한 추미애 장관(우)과 그에게 상을 수여한 김원웅 광복회장(좌).
김원웅의 광복회가 최재형 유족과 최재형기념사업회 측과는 협의조차 없이 추미애 장관에게 최재형상을 주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사진은 최재형상을 수상한 추미애 장관(우)과 그에게 상을 수여한 김원웅 광복회장(좌).

 

최재형은 누구인가?

최재형상은 광복회가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도운 고(故) 최재형(1860∼1920)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재형은 누구인가?

그는 함북 경원에서 머슴이었던 최흥백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되던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대기근이 닥쳐 수많은 백성이 굶어죽었다. 최흥백은 식솔을 이끌고 두만강 건너 연해주 얀치허 마을로 이주했다. 영민했던 최재형은 이주 2년 후인 1871년, 한인 최초로 러시아 소학교에 입학한다.

소학교 졸업 후 연해주 군정순무지사 크로운 장군의 추천으로 러시아 해군 포함 소볼호 수병으로 입대한다. 이후 러시아 상선 선장 표트르 세묘노비치 부부의 도움으로 선원 생활을 했다.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페테르브르크를 여러 차례 왕복하며 여러 나라를 견문하는 체험을 했다.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인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는 선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반병률, 『최재형-러시아 고려인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자』, 한울아카데미, 2020, 36쪽).

이후 사업에 투신한 최재형은 연해주에 주둔한 러시아군에 군납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 이주민을 관리하기 위해 1880년대 후반부터 주민 자치제를 실시했는데, 1893년 최재형은 한인 최초로 면장(面長)에 해당하는 도헌(20여 개 조선인촌 대표)에 선출되었다. 도헌 시절 최재형은 자신의 봉급 전액을 은행에 맡기고 그 이자로 매년 한 명의 한인 학생을 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대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최재형의 장학금을 받아 러시아 각 도시의 사범학교나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고등교육을 받은 한인 청년은 40여 명에 이른다.

최재형은 1896년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소수민족 대표로 참석했고 러시아 정부로부터 금메달 훈장 1개, 은메달 훈장 4개를 수여받았다(반병률, 앞의 책, 41쪽). 자수성가한 사업가 최재형은 돈만 번 것이 아니다. 그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의병 양성, 전투지원, 인재 양성에 앞장섰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러 떠나기 전,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했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위해 여비를 보탰다.

머슴을 아버지로 둔 최재형은 러시아로 이주하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머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러시아로 이주하여 사업으로 거부를 축적했고, 그 돈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에 지원했다.
머슴을 아버지로 둔 최재형은 러시아로 이주하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머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러시아로 이주하여 사업으로 거부를 축적했고, 그 돈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에 지원했다.

 

이 무렵 이범윤이 연해주 얀치허로 망명해 왔다. 그는 1903년 간도관리사로 간도에 파견되어 ‘사포대(私砲隊)’라는 충의대를 편성하여 한국인을 보호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범윤은 500여 명의 충의대를 이끌고 러시아의 카자흐 전투여단 아니시모프(Anisimov) 장군 부대에 합류한다. 이범윤 부대는 함경북도에 침입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려 러시아 정부는 이범윤에게 신성(神聖) 안나 3등 훈장을 수여했다(박보리스 드미트리에비치, 「국권피탈 전후시기 재소한인의 항일투쟁」, 『수촌 박영석 교수 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063쪽).

연해주 의병부대 조직, 자금지원한 최재형

러일전쟁이 끝나자 1905년 11월, 이범윤은 충의대를 해산하고 휘하 의병 295명을 인솔하여 연해주 한인 사회의 상징 인물인 최재형의 근거지인 연해주 얀치허로 망명했다. 1906년 대한제국 법부·학부협판(차관)을 지낸 이상설이 망명해 오면서 최재형·이범윤·이상설을 중심으로 연해주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의병 자금은 최재형이 거금 1만 루블을 기부했고, 러시아 공사를 지낸 이범진이 3만 원, 이범진의 아들로서 헤이그 특사였던 이위종이 거금의 기부금과 함께 연해주 의병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연해주 의병들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 함경도를 공격하는 진공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이 기능했던 이유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정치적 고려 덕분이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아무르연안 총독부와 연해주 주지사는 러시아 거주 한인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일본을 공격하는 게릴라전에 대해 “어떤 지지도, 방해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정했다. 러시아 지도부의 이런 방침에 의해 한인 의병대는 남부 우수리 지역에서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들어가 활동할 수 있었다(박종효, 『러시아 연방의 고려인 역사』, 도서출판 선인, 2018, 162쪽).

1908년 7월 7일 연해주 의병 360여 명이 얀치허를 출발, 두만강 하구 국경을 넘어 함경북도로 침투했다. 침투부대는 전제악(도영장), 안중근(좌영장), 엄인섭(우영장)이 지휘했다. 안중근은 훗날 재판 과정에서 이 의병부대가 대한독립의용군이며, 자신은 그 부대의 참모중장이라고 증언했다.

연해주 의병부대는 홍의동·신아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회령까지 진격했다. 일본군 회령수비대는 의병의 퇴로인 두만강을 차단하고 200명 병력으로 사방에서 포위했다. 의병부대는 7월 21일 저녁, 화령군 영산에서 일본군과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했다. 살아남은 의병은 뿔뿔이 흩어져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다.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했던 안중근 의병대도 최재형이 조직하고 후원한 부대였다.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했던 안중근 의병대도 최재형이 조직하고 후원한 부대였다.

 

안중근은 영산전투에서 패전한 후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다. 충격을 받은 연해주 한인들은 무장투쟁은 승산이 희박한 무모한 행위로 간주하게 되었다. 안중근은 더 이상 의병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 겸 탐방원, 촉탁 기자로 활동한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접한다. 의기투합한 네 명의 동지와 함께 거사에 나선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성공한다.

머슴 출신이라고 깔본 양반 이범윤

이 무렵 이범윤과 최재형 두 사람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한인 누구에게나 멍에처럼 씌워진 신분 문제였다. 이범윤이 서울 명문가에서 태어난 양반 출신인 반면, 최재형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 이범윤은 연해주에서 고종이 하사한 간도관리사 관직과 마패를 차고 다니며 양반 관리로서의 위엄을 과시했다. 그의 눈에 최재형은 그저 돈을 좀 번 상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본 정보기관 문서에 의하면 이 무렵 이범윤이 얀치허에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원자였던 연해주 한인 거상(巨商) 최봉준과 최재형이 군자금을 주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보고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12, 634쪽 참조). 연해주 의병이 실패하자 얀치허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형세를 관망하던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했다.

연해주로 망명하여 간도관리사 관직과 고종이 하사한 마패를 가지고 다니며 양반 갑질을 했던 이범윤.
연해주로 망명하여 간도관리사 관직과 고종이 하사한 마패를 가지고 다니며 양반 갑질을 했던 이범윤.

 

이위종이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것은 연해주 의병이 실패한 이유도 있지만, 이범윤과의 의견 충돌이 더 큰 원인이었다. 이범윤은 의병 자금을 유용한 혐의도 받고 있었다. 서양식 교육을 받은 이위종으로서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안중근 역시 이범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의병 운동을 함께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1909년 1월 20일자 <대동공보>에 최재형 명의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이 광고에서 최재형은 한인들의 애국심을 이용하여 자금을 모집·남용하고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는 의병을 비판하면서,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자금을 모집하는 의병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한인들에게 촉구했다(반병률, 앞의 책, 166쪽).

연해주 의병활동이 침체한 이유? 양반 갑질 덕분

이 무렵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명목으로 곳곳을 순회하며 한인 주민들로부터 금품과 곡식을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모금한 사람은 이범진이었다. 너무나 많은 돈을 강제로 모금한 이범진의 모습은 안중근이 후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진술한 일본 측 심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안중근은 “이범윤이 의병을 일으킬 군자금으로 인민으로부터 다액의 돈을 말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인민에게 피살되고, 일으키면 러시아 관헌에게 포박될 처지가 되어 크게 곤란한 상황”이라고 진술했다.

이범윤과 최재형의 신분·계급을 둘러싼 갈등,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 실패로 인해 1908년 이후 얀치허 일대의 의병 활동은 침체되었다. 1908년 12월 2일 함흥 헌병 분대장의 보고에 의하면 1908년 말경 경흥군 고읍 대안으로부터 러시아령 얀치허에 이르기까지 두만강 연변에는 의병의 종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연해주 참변 당시 체포 처형되었다. 연해주 4월 참변이 일어난 이유는 니콜라예프스크를 공격한 러시아 및 한인 적색 빨치산 부대가 일본 민간인과 러시아 민간인 6,0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일본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연해주 일대의 한인마을을 초토화하고 한인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한 것이다.

최재형이 만약 연해주로 이주하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머슴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연해주로 이주하여 자수성가할 수 있었고, 사업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최재형의 애국적 기부활동과 독립운동 지원 의지를 꺾어버린 것은 양반 이범윤의 갑질 덕분이다. 그가 일본군에게 처형당한 것은 일본·러시아 민간인을 학살한 한인 빨치산 부대의 만행 덕분이다.

대체 추미애가 누구인가? 그는 대한민국판 양반이자 이념적으로는 좌익이다. 지금까지 법무장관으로서 그가 한 일은 검찰총장과의 불화, 검찰 쑥대밭 만들기, 이념 코드로 법치 더럽히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법치 붕괴의 화신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유족이나 기념사업회 측과 일말의 협의도 없이 최재형상을 갖다 안겼다. 최재형 선생 사후 101년 만에 또 다시 권력의 갑질이 반복된 것이다.

죽창가를 신봉하는 집단다운 발상이다. ‘양반 권력자 갑질’이라면 치를 떨던 최재형 선생이 지하에서 이 모습을 보시고 통곡하실 일이 백주노상에서, 중인환시리에 벌어졌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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