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는 패배자가 되고, 소수자가 되고 있다...기독교계도 예외 아냐
우파 시민사회에 만연한 인지부조화, 확증편향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일반 시민들의 싸늘한 시선...우파 시민들은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정치적 경험의 공유와 확산은 정치 토론을 통해서 이뤄져
우파가 선동꾼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이런 집단지능의 결여에 원인 있어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는 현실 정치에서 패배한 영웅이 무속 숭배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대표적이다. 신기를 강화하기 위해 원한의 여인 장희빈 무덤에 찾아가는 무당도 있다고 한다. 무속 신앙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역사적 패배자로 각인되었다는 의미이다. 숭배받는다는 게 곧 패배의 증거가 되는 역설이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던가. 노무현의 자살 이후 나는 그가 최영 장군 등 역사적 패배자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사적 평가를 거부하고 극소수 팬덤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됐다. 우파의 정신적 지주인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는 무당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노무현을 몸주로 모시는 무당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지금까지는 내 예상이 섣불렀던 것 같다.

우파는 패배자가 되고, 소수자가 되고 있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역사의 광장이 아니라 무당 푸닥거리의 음습한 공간인 산골짜기로 쫓겨난 것이다.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21대 총선 과정에서 기독교계 정당의 당원이신 여자 집사·권사님들과 함께 총선 결과를 전망한 적이 있었다. 소속 정당은 달랐지만 우파로서의 동질감을 공유했기에 가능했던 대화였다.

그분들은 선거 결과에 대해 확신을 갖고 계셨다.

"우파 정당들이 합쳐서 최소한 180석을 얻습니다."

나는 정반대로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분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물어봤다.

"우파가 이길 거라고 판단하시는 근거가 뭔가요?"

그러자 나오는 답변.

"기도에서 응답 받았어요."

나 역시 크리스찬이고 저런 식의 표현은 일상적으로 접해왔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예상하는 대화에서 저런 발언이 나오는 것은 충격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정반대로 응답 받으신 분들도 계신 것 같던데요..."

내기라도 하자는 그분들과 더 길게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암담한 심정이었다.

21대 총선 이후 열성적인 우파 시민들 사이에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부정선거 규탄 운동도 그 집사 권사님들과 비슷한 심리상태 아닌가 싶다.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보니 일종의 인지부조화에 빠지신 것 아닐까.

더 우려스러운 것은 부정선거론을 믿는 우파 시민들이 현실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생각을 재검토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신념을 더욱 강화해가는 확증편향이다. 현실 세계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3일 치러진 미국 대통령선거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극단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21대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믿는 분들과 최근 미국의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믿는 분들은 겹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다만, 미국 대선 부정투표론의 내용이 한국 총선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다채롭고 스케일도 방대하다. ‘음모론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싶을 정도로 환상적인 시나리오가 많다.

우편투표 부정론이야 언급 자체가 새삼스럽고, 심지어 독일에 있는 CIA 서버를 미군 델타포스가 급습해 압수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트럼프가 계엄령을 선포하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다는 바람은 너무 간절해서 지켜보기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이런 음모론에 의하면 미국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은 지금쯤 정의로운 트럼프의 손에 의해 일망타진되어 미군 영창에 갇혀 엄중한 취조를 당하고 있어야 한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이런 체포론의 단골이다. 최근에는 아예 교황도 체포의 대상이 됐다. 반역자들을 한꺼번에 척결하기 위해 트럼프가 일부러 패배한 척한다는, 트럼프 초인론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의혹들은 몇 가지 문제만 지적해도 근거를 잃게 된다. 우선 트럼프가 막강한 미합중국 대통령의 권력을 갖고서도 왜 부정투표 음모를 저지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음모론은 전혀 답변하지 못한다.

트럼프는 본격 선거운동에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우편투표 등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적극 제기해왔다. 자신의 입으로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적극 제기했으면서도 왜 철저하게 그런 음모를 사전에 예방하지 않았을까. 트럼프도 그 지지자들도 여기에 대해 속 시원한 해명을 한 적이 없다.

트럼프에 충성하던 공화당 인사들이나 각료, 백악관 보좌진들까지 트럼프의 부정선거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자신의 수족을 직접 쫓아낸 사례도 많다. 그러다 보니 트럼프의 옆에는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시드니 파월 변호사 등 극단적인 인사들만 남게 됐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선거결과를 두고 누구의 전망이 더 정확했는지 가리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는 나 역시 평범한 우파 시민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우파 대중이 우리 사회의 평범한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점점 잃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그것이다. 이래서는 우파의 정치적 전망은 명약관화하다. 그냥 소멸하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만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부정투표론이 옳으니 음모론이 나쁘니 하는 얘기들은 모두 소모적일 뿐이다.

지난해 총선이 부정선거라며 이른바 검은우산 시위를 벌이는 우파 시민들과 정치권 인사들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그런 움직임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시민도 많을 것이다. 우파이면서도 검은우산 시위에 비판적인 어떤 청년은 이런 얘기를 전해줬다.

“요즘 젊은이들이 부정선거 주장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아세요? 그냥 찌질한 것들이래요.”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에는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며 추궁하는 주인공의 심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나는 공포스럽게 보이고 싶었지, 우스꽝스럽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우파 시민들이 열심히 부정선거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활동하는 심리도 비슷한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주인공은 자신의 모습이 아내의 눈에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걸 알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우파 시민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우스꽝스럽게 비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점 아닐까.

대깨문 좌파들이 허접하다고 우파 시민들은 비웃는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상대적 비교우위를 가진 자들을 선택해왔다. 이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예외 없는 철칙이다. 지금 우파 대중의 태도가 대깨문 좌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인 얘기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정치인들의 수준은 어차피 지지자들의 수준을 가리키는 바로미터일 뿐이다.

좌파들의 정치이념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계획도시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양 합리주의 전통 위에서 치열한 지적 탐구와 성찰을 통해 나름 정밀한 세계관을 구축했다. 거기에 러시아의 엄혹한 짜르 체제를 돌파하는 실천을 통해 갈고닦은 레닌의 정치투쟁의 이론적 무기가 결합했다.

설계주의에 기초한 이런 정치이념은 현실세계에서 한계를 드러내지만, 자신들의 이념적 프레임 안에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반면 경험론에 기반한 우파는 자기완결적인 체계를 갖춘 세계관도, 정밀한 정치투쟁의 노하우도 별로 없다. 한국 우파는 이런 한계가 더욱 두드러진다. 직접 싸워 주류가 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그 지위를 공짜로 받았기 때문이다.

좌파의 이론도 허접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허접한 이론을 가진 정치세력과 그런 이론조차 갖지 못한 정치세력이 대결하면 허접한 이론이나마 가진 세력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파는 정치투쟁도, 집권도 포기하고 마이너의 위치에 만족해야 할까?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그런 타협이 가능하다. 이른바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일상화된 경우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특히 문재인 집권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건 그냥 우파의 패배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붕괴 그리고 개화기 이후 우리가 피땀 흘려 쌓아온 근대화와 문명의 성과가 송두리째 날아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파의 이념은 주로 시니어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정밀한 이론체계는 없지만 ‘좌파 이론이 그럴싸해도 우리가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라는 경험칙에서 나오는 지혜가 작동하는 것이다. 좌파의 이론이 성문법이라면, 우파의 이론은 불문법 또는 일종의 암묵지에 가깝다.

우파는 이런 정체성과 장점을 극대화해 좌파를 극복하는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고 확산하는 훈련이 그것이다. 이게 조직화의 성과로 이어진다. 우파가 부정선거론 같은 싸구려 음모론에 쉽게 현혹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훈련이 백지상태인 데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다.

정치적 경험의 공유와 확산은 정치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조직이 정당이다. 다른 어떤 조직도 이 기능을 대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 토론은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민주정치 체제에서 모든 정치 이슈는 선거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정당의 후보로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가 토론의 핵심인 것이다. 당비 납부 등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당원에게 공천권이 주어져야 비로소 이런 토론이 위력을 갖게 된다.

해외에서 수입한 이론을 기반으로 하향식 설계주의를 지향하는 좌파는 전체주의와 독재를 지향하기 쉽다. 우파는 다른 가치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 현실의 경험을 토론으로 녹여내고, 이를 집단지능과 조직화로 연결해야 한다. 이런 경험의 상향식 공유가 세대와 세대, 계급과 지역의 갈등을 극복하는 무기이다.

우파가 선동꾼들에 속아 소중한 기회와 자원을 낭비하는 것도 이런 집단지능의 결여에 원인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스마트하고 학력과 경력이 발군인 우파 인사들이 의외로 싸구려 음모론에 취약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토론을 통해 우파 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한 부대로 만들지 못하는 한 우파에게도, 대한민국에게도 희망이 없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부대가 진성당원이다. 진성당원을 통한 정당정치의 혁신에서 우파는 새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투쟁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과 미국의 부정투표론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과제라고 본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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