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의 얘기다. 성(性)이나 인종, 종교 차별을 막는답시고 불분명한 근거로 어설프게 언어에 혼란을 초래하고 언어를 통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여자이지만 ‘남녀차별적 소지를 없앤다’라는 이유로 만들어내는 ‘신어’ 체계에도 무조건 동조할 수 없다.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옳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현대 소설로서 미래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여 화제가 된 두 작품이 있다. 1949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1984》와 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소설 《1984》는 쌍방향 모니터 등으로 전체 감시 체계가 갖춰진 상황을 담고 있다. 오늘날 정말 쌍방향 모니터의 개발은 물론, 곳곳에 설치된 CCTV, 위성 카메라, 휴대폰 위치 추적 등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남에게 노출되고 있다. 또 《멋진 신세계》는 복제 인간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과 1백 년도 안 된 과거였지만 이 소설들이 쓰인 시대와 지금의 기술력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가는 ‘절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의 상황을 상상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두 작품 중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조지 오웰의 《1984》이다. 오늘날 개개인의 정보가 자의든 타의든 필요만 하다면 여지없이 노출될 수 있음은 여러 가지 사례로 확인되고 있다. SNS에 나타난 청바지 광고를 무심코 누르면 몇 달 동안 청바지 광고들에 시달려야 하고, ‘수원에 사는 62세’인 나는 ‘수원에 사는 60세 이상의 여성’을 찾는다는 ‘맞춤형’ 광고에 가끔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광화문을 지나며 잠깐 휴대폰을 열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는데 그 장소에 있었으니 코로나19 검진을 받으라는 문자가 득달같이 배달되었다는 얘기며 가게는 물론 거리에 촘촘하게 걸려 있는 CCTV 덕분에 범죄자를 잡았다는 얘기 등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의 사생활을 누군가에게 다 내놓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이 조지 오웰의 예언이었는지 저주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은 그가 얘기한 대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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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속을 강조하는 구 소련 시절의 포스터. 언어 통제는 여러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감시 체계뿐만 아니다. 《1984》에 나오는 또 다른 예언이 오늘날 여지없이 실현되고 있다. 그것은 ‘신어’에 관한 것이다. 물론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고 발전 혹은 퇴보한다. 같은 국어라 하더라도 17세기 국어, 아니 19세기 국어도 현대 국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조지 오웰이 말하는 ‘신어’는 이런 자연스러운 변화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다. 문제는 소설에 나오는 상황과 같이 권력에 의해 강제로, 있던 언어가 사라지고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청소년’이라는 용어가 남자만을 가리키는 거라며 ‘소년 소녀’처럼 ‘청소년 청소녀’라고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내가 겪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미 4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신어’를 만드는 권력은 조금씩 세상을 움직여 왔다.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1월 초 미국 민주당 의원이자 목회자인 임마누엘 클리버 하원의원은 117대 의회의 출범을 알리는 개회 기도에서 “아멘과 아우먼(amen and awoman)”으로 기도를 마쳤다. 이는 ‘성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겠다는 새 의회의 공식 운영 규칙에 따른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이 규정에서는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고모, 삼촌 등 성별 관련 용어(sex-specific terms)도 금지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성 정체성 존중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어떻게 ‘모든 성 정체성이 존중’될지는 알 수 없다. 또 ‘아멘’은 ‘그러할지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으로, 성별과는 상관없는 용어이다. ‘맨 혹은 멘’이 들어간 말만 보면 경기(驚氣)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개인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에 대해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으로 ‘신어’를 만들고 이로써 세상을 뒤흔들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시누이를 ‘아가씨’로, 시동생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이 여성 비하라며 버려야 할 용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친족 호칭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 내가 의식 없고 고루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그런 호칭을 바꾸자거나 복잡하니 없애자는 얘기에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남녀차별적 소지가 있어서’ 바꾸거나 버려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몰고 가는 것 자체가 권력 행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부모가 며느리의 이름을, 손위 시누이가 올케의 이름을, 올케가 손아래 시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또 손윗사람을 친족 관계에 상관없이 무조건 언니, 오빠, 누나, 형으로 부르는 것이 좀더 개방적이고 쿨한 행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일까? 알 수 없다. 오히려 오랜 세월 다듬고 정착시켜온 친족 호칭을 한꺼번에 버리고 나면 어정쩡한 호칭만 남을 수도 있다. 친족 간에 어떤 호칭을 쓰든지 그건 상관이 없다. 다만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그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옛것이어서 무조건 버려야 한다거나 여성 차별적이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시누이를 ‘아가씨’라고 부른 여자와 그냥 이름을 부른 여자의 결혼 생활 행복도 등을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호칭 사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몰랑’이란 속어가 있다. “아, 나는 몰라”라는 말을 줄인 말이다. 조금은 무책임하고 지각없는 말 같지만 그 말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아몰랑’이라는 말이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최초에 여성의 대화에서 만들어졌고 ‘아몰랑녀’는 있어도 ‘아몰랑남’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몰랑’이라는 말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말의 리스트에 올라갔다.

앞으로는 결혼중개업자가 상대방의 얼굴, 키, 몸무게 등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표시·광고도 할 수 없게 된다. 여성가족부는 결혼중개업자가 키나 몸무게를 표시하는 것을 인권 침해라고 보았다. 이를 위반하면 행정처분과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행정처분은 1차 영업정지 1개월, 2차 영업정지 3개월, 3차 등록취소 등이 단계적으로 부과된다. 결혼중개업자가 키나 몸무게를 표시하는 것이 정말 인권을 침해하는 것일까? 수요자의 입장에서 상대가 키가 큰지 작은지, 말랐는지 살이 쪘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 정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내용을 표시하는 것도 성의 상품화로 간주되는 것이다. 신체에 관련된 사항을 무조건 ‘성(性)’과 연관시키는 것도 과잉 반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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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옳은 방법이 아니다.

《1984》에서의 ‘신어’는 비슷한 말이나 반대말을 없앤 것이다. 즉 ‘좋다’라는 말의 반대말로 ‘안 좋다’만 있으면 되지 ‘나쁘다’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훌륭하다’든지 ‘탁월하다’ 등의 비슷한 말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신어’를 만드는 것은 새로운 말을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단어들을 없애는 작업이다. 버리고 남은 것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언어 체계가 ‘신어’인 것이다.

겉으로는 ‘청소녀’나 ‘아우먼’이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청소년’이나 ‘아멘’ 등 성 중립적으로 사용해왔던 말이 사라지고 여성용인지 남성용인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성별 용어만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경고한 것처럼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낱말로 표현될 것이고 그 뜻은 엄격하게 제한되며 다른 보조적인 뜻은 제거되어 잊혀질 것”이다. 또 “세월이 흐를수록 낱말 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지게 될 것”이다.

갈수록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말에 대한 제약이 많아진 것이다. “당신 참 건강해 보이는군요”, “미남이시네요” 혹은 “다리가 참 예쁘네요” 등 성별에 상관없이 상대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성희롱 범주에 들어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미국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맘대로 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정치인들의 공약으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금지되는 말이 늘어나고 있다. 언어 통제는 여러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불편하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의 얘기다. 성(性)이나 인종, 종교 차별을 막는답시고 불분명한 근거로 어설프게 언어에 혼란을 초래하고 언어를 통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여자이지만 ‘남녀차별적 소지를 없앤다’라는 이유로 만들어내는 ‘신어’ 체계에도 무조건 동조할 수 없다. 자유롭게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옳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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