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며 9‧28수복 70주년이다. 또 장진호 전투 70주년이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흥남 철수 70주년이다. 그런데 이 사건들을 들먹이기 싫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정말 코로나19 때문인지 제대로 된 기념식 한 번 치르지 못하고 한 해가 가고 있다. 사실 70주년 기념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또 내년에 상황이 좋아지면 71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마련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주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 이유는 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데 우리가 꼭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자꾸 잊혀진다는 초조함 때문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사다난했던 한 해.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올해는 이 말이 정말 어울리는 해였다. 맞다. 바로 그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저물고 있다. 게다가 한일합방 110주년, 4‧19의거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사건 10주년, 나라 밖으로는 냉전 종식 30주년, 독일 통일 30주년 등, 2020년은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단위 주기를 챙기느라 바쁜 한 해였다. 그 가운데 우리가 절대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다.

나는 1960년생으로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되었을 때, 전쟁의 반작용으로 인한 베이비붐 끝자락에 태어났다. 나의 어린 시절까지도 전쟁의 상처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 중 문득문득 마주친 상이군인은 어린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서 주로 살던 그 시절 초인종이 울리면 뛰어나가 문을 여는 건 어린아이들의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조심성이 적은 아이들은 “누구세요?”라고 묻고는 그 대답을 확실히 듣지도 않고 대문을 벌컥 열곤 했다. 그때 문틈으로 불쑥 밀고 들어오는 차갑게 번쩍이는 ‘갈고리’. 그에 대한 두려움은 좀처럼 길들어지지 않았다.

비명을 듣고 쫓아나온 어머니는 그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내밀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그 돈을 땅에 내팽개쳤다.

“우리를 거지로 아시오?”

지금 가치로 1만 원 이상의 돈은 손에 쥐어야 그들은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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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호국 영령이 잠들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당시는 무섭기만 했던 그 상황이, 그들의 심정이 나이를 한참 먹은 지금에야 조금 이해가 된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다친 사람들이다. 팔을 잃었거나 다리를 잃고 생활 전선에서 무참히 밀려나버린 사람들이다. 그 당시 그들의 삶에 누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며 변변한 보훈 복지를 얼마나 베풀어주었을까? 보상은커녕 장애인이라고 무시하고 천대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던 시절. 그들의 입장이라면 얼마나 억울하며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런데 어린 나는 물론 다른 어른들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사지육신만 멀쩡했을 뿐이지 6‧25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태어난 세대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 겪은 그런 분위기를 통해, 혹은 전쟁을 직접 겪은 부모로부터 수시로 들은 이야기를 통해 6‧25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내 부모님이 전라남도 목포에서 살고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도 문제였지만 남한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더 기승을 부렸다. 자본주의의 첨병 은행원이었던 내 아버지는 부르주아 반동분자로 분류되었고 국군이나 경찰관처럼 숙청 대상으로 꼽혔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옛날에는 아녀자나 어린아이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어머니와 돌이 채 안 된 큰오빠를 집에 두고 혼자 피란길에 나섰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 거리로 나가보면 길 양쪽에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고 했다. 너무 시체를 많이 봐서 죽음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다 어머니도 경찰서로 잡혀갔다. 경찰서 지하 유치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다. 대부분 국군이나 경찰, 혹은 어머니처럼 은행원 가족들로, 여자들과 그들 품에 안긴 아이들이었다.

국립서울현충원 터키군 참전 기념비.
경기 용인시 터키군 참전 기념비.

한밤중, 취조를 받기 위해 컴컴한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데 누군가 어머니 곁을 스쳐가며 나지막히 한 마디 던졌다.

“아짐, 걱정하지 마쇼. 곧 내보내줄 것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친오빠는 없었지만 사촌, 육촌 오빠가 여럿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유학 다녀온 인텔리였다. 그런데 그들 일부는 좌익의 요인으로, 일부는 우익의 요인으로, 6‧25 때 서로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오빠 중 전쟁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아마도 그들과 관련된 사람이 어머니를 살렸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 밤에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풀려나왔다. 다음날 새벽,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지하 유치장에 사람들을 그대로 가둔 채로 불을 질렀다고 했다. 자칫했더라면 어머니도 그들처럼 철창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을 뻔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빼내준 사람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였을 그는 어쩌면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부모님 전쟁 경험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나마 내 세대는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6‧25전쟁에 대해 인식하고 그 참상을 실제 본 듯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나는 나의 자녀에게 전쟁에 대해 이렇게 생생하게 전해줄 수 없다. 교육 전체가 그런 상황이다 보니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에 북한군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침략했다는 ‘사실’마저도 진위를 따져야 하는 일이 되고 있다.

물론 이렇게 세대를 거치며 기억이 희석됨으로써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처란 마주 바라보고 상처의 원인을 제대로 인식하여 그에 맞게 치료해야 낫는 것이지 눈에 보이지 않게 덮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덮어버리면 상처가 오히려 속으로 곪아들어가 우리를 더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비극인 6‧25전쟁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하고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필요한 부분은 확실하게 매듭지어야 하는 것이다.

2020년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이며 9‧28수복 70주년이다. 또 장진호 전투 70주년이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흥남 철수 70주년이다. 그런데 이 사건들을 들먹이기 싫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정말 코로나19 때문인지 제대로 된 기념식 한 번 치르지 못하고 한 해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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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파주시 설마리 영국군 전적 기념비.

사실 70주년 기념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또 내년에 상황이 좋아지면 71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마련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주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 이유는 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다 되어가는데 우리가 꼭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자꾸 잊힌다는 초조함 때문이다. 당시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싸웠던 우리 국군 장병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70년 전 다른 나라로부터 입은 은혜에 대해서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세대가 몇 번 바뀌더라도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지난 70년을 보냈다면 먹고 살 만해진 이제는 6‧25전쟁 당시 우리를 위해 싸워준 분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의 은혜를 길이길이 기억하는 일에도 집중해야 한다. 당시 목숨을 걸고 우리를 도와줬던 분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고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90세의 고령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한 해 한 해가 그냥 지나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아쉽다.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망각의 세월로 접어들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3년 넘어 치러진 6‧25전쟁 동안 전투 이야기말고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탄생했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이고 극적인 것은 흥남 철수 이야기이다. 1950년 겨울, 중공군은 장진호 일대에 있던 미군 해병대를 포위했다. 하지만 미군은 다섯 배나 많은 수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흥남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전쟁 역사상 가장 위대한 후퇴’였다.

이미 육로가 공산군에 막혀 흥남에서 배를 타고 후퇴해야 했는데 엄청난 숫자의 피란민이 부두로 몰려왔다. 그때 국군의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통역관은 피란민들을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한다며 철수를 책임지던 알몬드 장군을 설득했다. 이에 감동한 알몬드 장군은 엄청난 양의 무기와 군수 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그 자리에 피란민들을 태웠다. 이 철수 작전으로 9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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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국 국기로 장식된 부산 유엔 계단.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배에는 음식물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흘의 항해를 마치고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피란민 숫자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다섯 명이 더 늘어나 있었다. 배 안에서 아기들이 태어난 것이다. 미군은 이 아기들에게 ‘김치’라는 임시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김치’ 아기는 1호부터 5호까지 태어났다.

그때 배 안에서 태어난 김치 아기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미 일흔 살을 넘긴 그 아기(?)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 자신들의 탄생이 정말 크리스마스의 선물이었음을 다시 한번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위기에서 벗어나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는지, 6‧25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에게 좀더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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