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통계학에 의하면 이번 세기말에 한국의 인구는 반 토막이 날 것이고, 경제력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세상일의 대부분은 미래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인구통계는 거의 확실하게 예측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사회 현상 중에 들어간다. 사태가 그렇다 보니, 지난 시절 인구 억제에 큰 노력을 기울이던 정부가 이제 아이를 출산하면 천만 원을 준다느니, 각종 지원제도를 개발한다느니 말들이 많다. 그러나 아직 이런 복지적 혜택으로 상황이 나아졌다는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결국 자녀를 낳고 키우는 문제는 국가 차원의 거시적 주제이기 이전에 개인 차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누가 일찍 작고했는데, 어느 지인이 “그 집안이 망해서 매우 애석하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집안은 재산상으로 망한 것은 아니어서 내 상식으로는 그 말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재산 상으로 망한 것보다 요절한 것이 훨씬 더 크게 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럴 때에도 ‘망한다’라는 말이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태어난 데는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 있을 텐데, 일찍 죽는 것보다 더 크게 망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본인이 평생 해야 할 중요한 소명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일단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

만약 그 소명이라는 것이 기업을 창업해서 큰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과업은 한 사람의 일평생으로도 달성하기 어렵다. 세월이 지나 창업자가 경영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선택안의 하나는 그 기업의 창업자와 한 팀이 되어 기업을 키워 온 파트너 중 적임자에게 총수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적 풍토에서는 아무래도 대기업 총수 일가 중에서 경영능력이 출중한 후계자를 키워서 경영을 물려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야만 창업자로부터 면면히 전해진 기업문화가 계승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 기업 내외부의 구성원들이 ‘타당하다’라고 여기는 ‘정당성’이 생겨서 그 기업의 지속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대기업 재벌은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대기업 총수에 있어서 가업을 승계할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은 기업의 존속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이런 예를 대우 그룹의 경우를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한때 한국 재벌 중 자산 가치 2, 3위권의 대기업 대우가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해체된 역사를 알고 있다. 비록 하나의 가설로서 상상해보는 수준이긴 하지만, 당시 대우 김우중 회장의 장남이 미국 유학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불행한 사건이 없었다면, 대우 그룹은 어쩌면 당시 외환위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하나로 건재할 수도 있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대우의 고 김우중 회장이 막 개방된 동유럽 등 세계를 향해 사업을 전개해 나가던 1990년 당시, 24세로 미국에서 유학하던 장남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는 김우중 회장은 54세였고 자신의 ‘세계 경영’을 자신감 있게 서술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바로 그 전 해에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기였다. 세계경영을 이어받을 장남이 이제 장성해서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을 만할 때 일어난 이 불행한 사고가 김 회장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상심이 컸을 것이다. 장남 아래의 자녀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기업 승계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 뒤 10년쯤 후 대우는 IMF 금융 위기를 맞아 기업을 해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되었는데, 세월이 지난 후 대체로 수렴하는 분위기는 대우가 일종의 ‘기술적 도산(technical insolvency)’을 맞았다는 것이다. 기술적 도산이란 영업도 활발하고 이익도 충분히 내고 있는데, 일시적으로 현금흐름이 막혀서 도산하는 것이다. 당시 정부 관료들은 처음으로 맞는 국가 부도 사태 속에서 대기업들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대우를 겨냥한 듯한 수출금융의 중단 등의 불운이 겹치면서 대기업 대우는 해체되었다.

필자는 기업이라면 늘 겪게 되는 불확실성이라는 요인, 여기서는 예기치 않은 외환위기 사태, 그리고 갑자기 대기업에 비우호적으로 변했던 정부 정책 등 이미 많이 제기된 문제는 제쳐 두고, 대우 재벌가의 불행이 대우 사태에 어떤 영향을 가져왔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앞에 언급한 불의의 사고는 대우 그룹의 내외부에 그룹 총수의 2세 승계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총수에 대한 충성도, 이는 기업문화의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우 그룹이 해체되던 1999년 당시, 만약 총수의 2세가 34세 정도의 나이로 기업 내에서 중요한 부문을 책임 맡으며 후계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면, 대우 그룹 내부와 외부, 정관계 인사들의 대우에 대한 태도가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총수에 대한 충성도에 있어서 후계자가 없는 경우와 후계자가 잘 자리 잡고 있는 경우는 아주 다르다고 한다. 당시 그 기업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IMF 외환위기의 희생양을 찾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김우중 회장에 대한 배신적 태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대우 그룹의 경영을 꼭 김우중이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식의 질문에 대해 - 그런 질문 자체가 기업해체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 “꼭 그렇지 않다. 누가 해도 된다.”라는 식의 대답이 오가는 식으로 김우중 회장을 폄훼하는 분위기가 일었다고 한다. 예전에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사원 하나를 뽑더라도 관상을 보는 사람을 대동하여 그 사람이 배신할 상이 아닌지 보게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는 국면이다.

어쨌든 사람은 약하고 죄 짓는 존재다. 이번 논의는 대우 그룹의 인맥들 중에서 누가 배신자고 누가 의리를 지켰는지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대기업 재벌이 관료주의의 엉터리 해체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재벌의 자식 농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키워 놓은 대기업을 놓고 보면, 예컨대 돈줄을 통제하는 금융 전문가 관료라 해도 능히 대기업 그룹을 잘 경영할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다만 이때의 ‘경영’이라는 것은 기업가적인 혁신과 개척은 없고, 관료주의적인 안전과 형식 논리 속에 서서히 침몰하는 기업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이미 일구어 놓은 기업이라 해도 대기업 경영을 그런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만용이다.

이번 글의 논의는 대우가의 사례를 들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젊은이들의 자녀 출산에 관한 것이다. 사례에서의 ‘자식 농사’를 더 확대해서 대기업 총수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적용하면 우리 사회의 인구절벽 문제와 관련이 된다. 프랑스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인 몽테뉴는 자신의 저술 수상록에서, 자식이 죽어서 크게 상심하고 있는 자기 부인에게 “그 아이들이 원래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상상해 봐라.”라고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배운 대로 조언을 해 주었더니 효과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금은 엉터리 같은 조언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논리를 반대로 적용해보면, 예컨대 아이를 하나만 낳은 부부는 셋이나 둘 낳았다가 아이가 일찍 죽은 것처럼 ‘망한 것’이다. 인생을 길게 보면, 어느 집안은 키우기는 힘들었겠지만 서넛이나 되는 자녀가 장성해 있고, 또 다른 집안은 자손이 없거나 겨우 하나만 있는 경우를 비교하면, 후자는 전자와 비교하면 ‘망한 집안’이다.

얼마 전 미국 미시간주에 사는 45세 된 부부가 14명의 아들에 이어 첫 딸을 낳아서 그 지역사회가 축하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었다. 그 부부는 그 많은 아이를 키우면서도, 남편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부인은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가운데 대학 때 만나 결혼한 그 동갑내기 부부의 모습은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경력단절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아이를 너무 안 낳는 것은 어쩌면 편협한 생각이고, 국가의 장래는 접어두고라도 우선하여 자신의 인생에 그리 현명한 결정은 아닐 것이다.

문근찬 자유경영원 대표, 전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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