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의한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지는 대의제 민주국가 뿐만이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그 지도자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교체된다. 3대 세습을 이어온 북한에서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지도자의 변화가 있어 왔다.

이러한 국가 지도자들 중에 누가 성공했었고 실패했었는지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면 될 것인가? 해당 지도자의 취임 이전의 국가와 퇴임 이후의 국가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객관적 평가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위상이 올라가고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며 미래 세대를 위한 업적을 남겼다면 해당 정권의 집권기간은 성공한 시대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존경 받는 지도자들과 비난 받는 지도자들을 가르는 요인을 무엇일까? 단순히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개인적 호감도, 사회 분위기 등 주관적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 나아가 일반 대중들은 자신의 생각이 아닌 군중 심리에 의하여 그들의 지도자를 칭찬하기도 비난하기도 한다. 언론이 통제되는 독재국가에서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지도자들도 집권기간 동안에는 (최소한 국내에서는) 존경 받는 인물로 기억되기도 한다.

존경 받는 지도자가 영도하는 성공한 정권이 지속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실정치 세계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우며 대중들은 명백히 실패한 정권임에도 감성적인 이유로 그 지도자를 칭송하기도 하고 큰 업적을 남긴 성공적인 정권임에도 그 지도자를 사소한 이유로 맹비난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 역사상 실패한 정권의 존경 받는 지도자들과 성공한 정권의 비난 받는 지도자들의 사례를 비교 분석하여 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지도자들에 대하여는 아직도 역사적 평가에 논란이 있으므로 1800년 전후의 유럽으로 무대를 옮겨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 - 1821)와 오스트리아의 클레멘스 메테르니히 (1773 - 1859)의 사례를 살펴 보기로 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 중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Egalité, Fraternité)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유럽 대륙에 전파하는데 기여도가 가장 큰 사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집권기간에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대륙이 나폴레옹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세계사에서 유럽의 강대국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나폴레옹 집권 이전의 프랑스와 나폴레옹 집권 이후의 프랑스를 비교해 보면 과연 그가 성공한 지도자로 분류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프랑스의 황제가 되기 이전의 군인 시절의 전쟁 수행능력, 제1통령 시절의 프랑스 은행 설립과 나폴레옹 법전의 제정까지 포함시키면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로서의 12년 (1804 - 1815)은 그에 대한 공과를 철저하게 비교해 보아야 한다.

우선 황제 나폴레옹의 집권기간을 전후하여 프랑스의 영토 변화를 보면 집권 이전에는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하고 있었으나 그의 몰락 이후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국경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에 더하여 전후 처리를 위한 빈 회의 (Vienna Convention)에서 결정된 바에 따라 러시아는 폴란드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에 벨기에를 양도하고 그 대신 이탈리아 북부를 획득하며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주요 지역을 양보하는 대신 라인강 유역을 얻게 되어 유럽대륙의 주요국가들이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영국은 지중해의 군사 요충지인 몰타의 영유권을 인정받고 네덜란드로부터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와 스리랑카를 양도받으면서 더 이상 프랑스가 도전할 수 없는 최강대국의 위치를 굳히게 된다. 지정학적 변화를 볼 때 나폴레옹 집권기간은 프랑스에게 상당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내 정치에 미친 영향을 보면 1870년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배할 때까지 대혁명 이전 부르봉 왕조의 지지자들 (왕당파)과 대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나폴레옹의 지지자들의 대립이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는 현대 프랑스의 좌우 대결과 같은 극단적인 좌우 대결의 시작점이 되었다.

역사학자 P. Bairoch의 연구에 의하면 프랑스의 세계 제조업 생산량 점유율은 1800년 4.2%에서 1830년 5.2%로, 1인당 산업화 수준(1900년의 영국=100)은 1800년 9에서 1830년 12로 증가한 반면 주요 경쟁국인 영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량 점유율은 4.3%에서 9.5%로, 1인당 산업화 수준은 16에서 25로 증가하여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영국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지속적인 열세를 보이게 된다. 나폴레옹의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령 (Continental System)이 프랑스 산업혁명의 진행을 막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결론적으로 나폴레옹 개인은 위대한 인물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으므로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황제 나폴레옹의 집권기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나폴레옹 정부가 역사적으로 성공한 정권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비될 수 있는 인물로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메테르니히를 들 수 있다. 그의 정치인생은 1789년부터 1815년까지의 프랑스 대혁명 및 나폴레옹 제국에 대한 투쟁의 시기와 1815년의 빈 회의부터 1848년 2월 혁명으로 인한 실각 이전의 빈 체제 (Vienna System)하에서 유럽의 강대국 중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추구하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 내의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탄압한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역사가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나 그의 등장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메테르니히 정권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그에 대하여 역사의 발전을 막은 구체제의 반동 지도자로 평가하기 전에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중이던 유럽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는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유럽의 통합을 추구하는 현대 유럽인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다양한 민족들이 하나의 정치체제 하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의 시대에 맞는 해답을 제시하려 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메테르니히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게 된 1789년과 그의 주도 하에 성립된 빈 체제 하의 1815년의 유럽지도를 비교해 보면 오스트리아는 본국과 분리되어 있던 벨기에를 네덜란드에게 양보하는 대신 수도 빈에 인접한 북부 이탈리아 영토를 획득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벨기에는 프랑스의 영토 확장의 1차적 목표가 되는 지역이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에 속하던 시절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의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을 회피할 수 없었으나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국가적 부담을 네덜란드와 영국에게 성공적으로 전가하고 상대적으로 방어가 용이한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독일어 사용지역 내에서의 메테르니히의 정책도 성공적이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하여 해체된 신성로마제국을 대신하여 35개국과 4개의 자유시로 구성된 독일 연방을 재건하고 오스트리아가 의장국이 되도록 하여 기존의 신성로마제국 내에서의 합스부르크가의 권리를 성공적으로 복원하였다.

이러한 정책적 성공에 의하여 오스트리아는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대외적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주의 시대의 대표적 다민족국가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지속하면서 제국의 수도 빈은 런던, 파리와 함께 유럽의 문화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 나가게 된다.

반면, 그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는데 1834년 프로이센이 제안한 독일 내 관세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대표적인 실책으로 보고 있다. 독일 연방의 의장국임에도 오스트리아 제국 내 산업계의 반대로 자유무역을 위한 관세동맹에 가입하지 못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북부 독일지역과 경제적 이해관계의 불일치가 심화되고 산업발전의 속도가 늦어지면서 장기적으로 프로이센에게 독일 연방 내의 경제적 주도권을 내어주게 된다.

P. Bairoch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 오스트리아의 세계 제조업 생산량 점유율은 1830년 3.2%에서 1860년 4.2%로, 1인당 산업수준(1900년의 영국=100)은 1830년 8에서 1860년 11로 증가한 반면 독일어 사용권 전체의 경우 세계 제조업 생산량 점유율은 1830년 3.5%에서 1860년 4.9%로 1인당 산업수준은 9에서 15로 증가하여 프로이센 등 기타 독일어 사용국가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뒤쳐지게 된다.

더 나아가 주로 수도 빈 (Vienna)와 프라하 (Prague) 지역에 밀집해 있는 국내 자본가들의 반대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독일 관세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선진지역 산업자본가들을 위하여 후진지역의 농민, 노동자들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제국 내의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켰던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당대에도 후대에도 메테르니히는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는 소위 반동적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며 그 평가는 앞으로도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지도자의 취임 이전의 국가와 퇴임 이후의 국가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에 입각하여 평가한다면 메테르니히 정권은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국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하고 국민들에게 장기간의 평화를 주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명을 100년간 더 유지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실패한 정권이라고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

현대의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유권자들은 선악 논리에 입각한 좋은 지도자, 나쁜 지도자의 기준보다는 정책 결정의 결과에 의해 평가되는 성공한 정권, 실패한 정권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보다 나은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일 것이다. 만약 자신들의 지도자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도 그의 정책에 의하여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경우와 자신들의 지도자를 깊이 존경하지만 그의 정책 결정상 오류로 발전이 정체된 국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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