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미국을 위시(爲始)한 해양 세력 진영에서 이탈해 국가의 생존이 위태로운 작금의 상황은 위정자는 물론이고 대중의 인식이 아직도 판타지 속에 있다. 해양 세력보다 대륙 세력의 궤도 안에 있고 싶어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유목민족', '만주 벌판', '고토수복', '시베리아철도'와 같은 감성적인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흔히 '말 타는 유목민족의 후예'로 먼 조상들은 만주 벌판은 물론이고 유라시아를 누렸다는 모호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민족이란 단어 자체가 유럽에서 만들어져 일본의 번역를 거쳐 수입된 지는 100여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000년 이상 이전의 역사에 민족이란 개념을 덧씌워 자랑스러워하기 일쑤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한국인은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이다. 한국인의 이같은 성향은 DNA에 뿌리박힌 것처럼 연원이 깊은 것이라고 하겠다. 6.25 침략전쟁을 '승리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며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는 변변한 항의조자 못 하면서 과거의 제국주의 일본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일원(一員)인 일본에 대해서는 유독 강퍅하다. 이 나라에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보편화된 국제외교질서의 관념이 있는가? 아직도 역대 중국 왕조의 화이질서(華夷秩序) 안에서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는 조선의 뿌리가, 썩은 듯 하면서도, 질기게 남아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미국을 위시(爲始)한 해양 세력 진영에서 이탈해 국가의 생존이 위태로운 작금의 상황은 위정자는 물론이고 대중의 인식이 아직도 판타지 속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지만, 잠재의식 속에 아로새겨진, 근거 없는 판타지는 과연 심각하다. 필자가 가장 희한하게 여기는 한국 언론의 상투적인 표현이 바로 '단군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단군 이래'라는 클리셰다.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단군 이후 고조선, 고구려 등 삼국시대 고려, 조선에 국책사업이라는 게 있었다는 말인가?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된 국책사업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라고 봐야 하는데, 비록 표현이긴 하지만,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해양 세력보다 대륙 세력의 궤도 안에 있고 싶어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유목민족', '만주 벌판', '고토수복', '시베리아철도'와 같은 감성적인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흔히 '말 타는 유목민족의 후예'로 먼 조상들은 만주 벌판은 물론이고 유라시아를 누렸다는 모호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민족이란 단어 자체가 유럽에서 만들어져 일본의 번역를 거쳐 수입된 지는 100여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000년 이상 이전의 역사에 민족이란 개념을 덧씌워 자랑스러워하기 일쑤다. 한민족은 인종학적으로는 몽골 인종에 가깝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아주 순수한 단일민족은 아니고 여러 이민족의 피가 섞였다. 과거 고구려의 강역(疆域)이 만주 벌판이라고 해서 현재의 그곳이 수복해야 할 우리 강토이라는 논리는 국제적 기준에서 보면 허무맹랑한 것이다. 같은 논리라면 현재의 벨라루시도 리투아니아-폴란드 공국의 영토다.

청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사진=인터넷 검색)
청 태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사진=인터넷 검색)

과거에 유목민족이었을 수는 있으나 한민족은 오랫동안 반도에 갇힌 농경 민족으로 지내왔다. 또 성리학적 명분론과 결합된 '아Q'(阿Q)식 '정신 승리' 고질병도 그 뿌리가 깊다, 근거가 희박한 혈족 의식도 강하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한민족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인조(仁祖)가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하고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기로 한 비운의 역사가 있다. 그후 북벌(北伐)을 꿈꾸며 정신 승리를 하느라고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조선이 망한 일제시대까지 계속 치른 바 있다.

그럼에도 엉뚱하게도 청나라의 만주족은 우리와 피가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관계가 있고 《만주사원류고》(滿洲史源流考)에도 신라와의 연고가 있다고 기록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수 천년이 지난 지금 이를 고증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긴 하다. 흔히 만주의 뿌리가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청 황실의 성(姓)인 '아이신기오로'의 한자 표기가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성의 뜻이 '신라(新羅)를 늘 사랑(愛)하고 가슴에 새긴다(覺)'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는 조작된 설화에 불과하다. 만주족은 그들 고유의 문자가 있고 중원을 장악해 청왕조를 세우면서 한어를 만주어와 병기하게 되는데, '애신각라'는 이 과정에서 '아이신기오로'를 음차(音借)해 한자로 표기 한 것에 불과하다. 우연의 일치도 아니고 중국 음운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이신기오로'를 '애신각라'가 아닌 다른 글자로 차용하려 하더라도 마땅한 음가에 의미도 부정적이 아닌 글자를 고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만주족이 한민족과 같은 혈족이라면 병자호란 당시 왜 그렇게 조선을 핍박했는지도 의문이다.

'아이신기오로', 즉 '애신각라'가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한다는 의미'라는 논리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언어국뽕'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심지어는 거란족으로 요나라의 개국 군주인 '아율아보기'(耶律阿保机)에서 '아보기'의 한어 발음이 '아바오지'라는 점을 들어 이 말이 한국어 '아버지'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는 주장하는 이들도 가끔 있다. 세계 언어에서 이처럼 발음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엄마'나 '아빠'를 공통적으로 맘마(mama), 파파(papa)로 부르는 문화권도 상당히 많지만, 이들이 모두 같은 민족일 리는 없다. 만주는 현재 중국의 영토로 돼 있는 동북삼성에 속하는 지역이다. 만주족은 남아 있지만 언어는 거의 사라지고 민족적 정체성(아이덴티티) 역시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실상 한족에 동화된 상태로써, 위구르·내몽고·티벳과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분리 독립을 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소수민족이 아닌 것이다.

이런 만주를 두고 한국인들은 '고토수복', '만주도 우리땅'이라는 잠재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 요즘엔 미중분쟁으로 인해 결국 궁극적으로는 중국이 해체될 가능성이 다소 높아졌다고 하지만, 백번 양보해 동북삼성이 분리된다 하더라도, 이 지역이 한국의 영토로 편입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국제사회는 힘의 논리만 통할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분리돼 따로 노는 한국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동북삼성(만주)이 수천년전 고구려의 영토였으니 가지라고 할 나라가 있을까? "그동안 외침을 수없이 받아 고통을 받았으니 만주는 한국이 가지세요"라고 할 나라가 국제사회에 있을까?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하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옛날 군가(軍歌)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 지가 오래돼 아득하게만 들리는 노래다. 지금은 이 노래에서 지칭하는 오랑캐가 어느 나라인지, 젊은 세대의 머릿 속에서는 지워지고 있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 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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