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대한민국 어느 곳이 백선엽의 묘역 아닌 곳이 있는가?
[특집]대한민국 어느 곳이 백선엽의 묘역 아닌 곳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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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살린 진정한 영웅의 죽음 하나 기리지 못하고, 여직원 성추행 사실이 들통나자 스스로 목숨 끊은 사람을 영웅으로 둔갑시키려는 나라라면 차라리 대한민국은 해체되는 것이 맞다.

백선엽(白善燁).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올해 100세.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 졸업, 만주군 육군 중위 시절 조국광복. 해방 후 귀국하여 평양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 신의주 반공의거 직후인 1945년 12월 월남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에 투신, 국군 제5사단장, 1950년 제1사단장 재임 중 6·25 참전. 1952년부터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단.

대한민국 제1호 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했고 박정희 정부 시절 제19대 교통부 장관(재임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일제 하에서 한반도에 태어난 이 땅의 엘리트 청년이 걸었던 길을 온몸으로 관통해 온 그의 삶이 7월 10일 마감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 상황에서 꿈과 야망이 누구보다 컸던 조선 청년들의 입신양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백선엽 장군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일제에 충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치하에서 입신양명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일제에 충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치하에서 입신양명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들이 만주로 간 까닭은?

만약 그가 일제 하 양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는 청년이었다면 만주군관학교 따위의 천대받는 군문에 들어설 필요는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자랐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좌절 절망하기보다는 인생에 도전하는 편을 택했다.

평안남도 강서 약송소학교를 거쳐 평양사범학교 졸업 후 교직에 종사하다가 만주로 떠나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한다. 박정희의 인생도 백선엽과 거의 동일 궤적을 그리고 있다.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구미보통학교,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안정된 삶을 박차고 만주로 떠나 신경군관학교로 진학한다. 

당시 만주국은 만주국군에 필요한 인재 확보를 위해 1933년 4월, 봉천에 2년제 군관학교를 개설하고 조선 청년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이렇게 되자 일제하의 식민지 조선 땅에서 태어나 뜻을 펴지 못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젊은 인재들이 신천지로 떠오른 만주국에서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로 모여들었다. 이 학교 4기생이 계인주와 김응조, 5기생이 신현준(해병대사령관 역임), 김일환(이승만 정부에서 국방부차관, 상공·내무장관 역임), 정일권(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 역임) 등이다.

봉천의 육군군관학교는 9기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1940년 12월 체제를 개편하여 4년제 장교 양성기관인 신경(新京)육군군관학교로 새 출범하게 되었다. 두 학교를 합쳐 통칭 만주군관학교라 부른다. 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생 중 한국인은 박임항, 이주일, 김동하 등이 있었고, 2기 졸업생이 박정희, 이한림이다. 강문봉은 5기, 김윤근이 6기로 졸업했다. 당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한국인들의 성적이 대단히 우수하여 봉천군관학교의 송석하(5기)·백선엽(9기), 신경군관학교의 박임항(1기)·박정희(2기)·장은산(4기)·강문봉(5기)이 수석을 차지했다.

조선의 열혈청년들이 군국주의 파시즘에 열광해서, 혹은 일제에 부역 내지 적극 협력하기 위해 군관학교의 길을 택했을까? 아니다. 일제 하에서 머리 뛰어나고 재주 왕성하나 가난한 집안 아들들이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의 실력에 의해 고등관에 오르는 길 뿐이었다. 고등관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존재했다. 하나는 오늘날의 행정고시, 사법고시라 할 수 있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년 정도 시보 생활을 하면 고등관 자격이 주어진다. 다른 하나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 임관을 하면 고등관에 오른다.

불행하게도 일제 치하에서 고등관에 올랐던 사람들은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에 의해 전원이 친일파 명부에 자동으로 이름이 올라가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들이 일제 치하에서 구체적인 친일 행위를 했는가의 여부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무조건 일제 치하에서 고등관에 올랐던 자들, 즉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 임관자는 전원이 친일파로 매도 당한다. 일제 하에서 흙수저 출신들이 죽어라 고생하여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올라 금수저를 무는 데 성공한 인물 전원을 친일파 딱지를 붙여 사회적 집단 이지메를 가하는 전체주의 파시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간도특설대 활동의 진실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에 몸담게 된다. 백선엽 회고록에 나타난 간도특설대 멤버는 백선엽 외에도 김백일·임충식·신현준·김석범·김동하·이동화·송석하·이용·박춘식 등이 있었다(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169쪽).

좌익 및 공산주의자들은 백선엽 장군의 간도특설대 경력을 트집 잡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고 나섰다. 간도특설대 요원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고군분투했던 독립군을 때려잡았으니 영락없는 친일파요 민족반역자, 매국노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저들의 서슬 퍼런 위압에 눌려 지금까지 이런 주장에 대해 단 한 번도 사실 여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제 당사자가 영면하셨으니 그들의 주의주장에 대한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이 도리다.

만주국은 1939년 3월 간도특설대를 조직하여 강력한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간도특설대는 하사관과 사병은 전원이 한국인이요, 장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반반씩 섞인 한국인 위주의 부대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산하에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여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 관동군 및 만주군에 저항했다. 그런데 저항 과정에서 만주로 이주한 불쌍한 한국인들을 행대원으로 포섭하여 일-만주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토벌 과정에서 체포된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을 심문해 보니, 거의 대부분이 만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을 총알받이로 내몬 사실이 밝혀졌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의 조선 사람들을 동원하여 일-만주군을 공격하도록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구사한 것이다. 이런 수법에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을 일본이 아니었다. 그들은 즉시 한국인 위주로 토벌부대를 편성했으니, 그것이 간도특설대다.

나라를 잃고 입신출세를 꿈꾸며 만주로 달려간 조선의 청년들은 한쪽에선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이 되어 총을 들고 나섰다. 다른 한쪽에선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만주군에 소속되어 총을 들고 빨치산과 싸웠다. 만주벌판에서 1930~40년대에 중공과 일제를 대리한 한국인들이 동족상잔의 피 흘리는 전투를 자행한 것이다.

양측 모두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에 총부리를 겨누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만 영웅, 다른쪽은 악마로 매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만주군 쪽에 섰던 자들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면, 중공 쪽에 섰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은 친중파 민족반역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공 편에 섰던 자들에 대해서는 찬란한 '항일무장투쟁'이란 월계관을 씌워주고 영웅으로 대우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동북항일연군이 조선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만주국 군경은 1939년 10월 1일부터 1941년 3월 말까지 8만여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만주 일대에서 공산 빨치산 격멸을 위해 ‘동남3성 3개년 치안숙정(肅正)공작’을 전개했다. 토벌군 사령관은 관동군 소속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소장이었다.

한국인 위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도 노조에 토벌대 산하에 편입되어 맹활약했다. 특히 간도특설대는 만주 진출 한국인들의 협조를 얻어 쉽게 정보를 구했고, 이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마비고산(馬屁股山), 열사산(烈士山), 연로포(蓮老泡) 등의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의하면 간도특설대는 조선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던 조선독립군을 토벌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들이 토벌한 것은 만주 일대에서 중화(中華)조국의 옹호와, 동북실지(東北失地, 즉 만주)의 회복, 항일운동을 통해 중국을 구하기 위한(抗日救中國)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성격의 동북항일연군을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토벌했으니 확고부동한 친일파 민족반역자, 매국노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중국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부대가 조선독립군이었다는 말인가? 정말로 당신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 중공인이라고 만천하에 떠드는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은 중국 국적으로 취득하고, 중국공산당 산하에서 “중화조국의 옹호”와 “실지동북의 회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의 ‘불편한 진실’이다.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대원들 중 만주로 이주해 간 한국인이 상당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이 조선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싸운 ‘조선독립군’이었다는 주장은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없는 허구요 사기 날조극이다.

참고로 중공 당국이 항일 전쟁기에 희생된 사람들을 열사(烈士)로 인정하는데, 열사는 반드시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중국 공산당 지휘 아래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1928년부터 1945년 9월까지 간도 연변 지역에서 희생돼 항일투쟁 열사로 공인된 사람은 모두 3,125명인데, 이 가운데 한인이 3,026명으로 거의 98%를 차지한다(김효순, 앞의 책, 79쪽).

우리 쪽에서 아무리 “조선 독립을 위한 위대한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고 외쳐대도, 중공 측 입장에서 보면 만주의 한국인들은 중국 인민의 해방과 동북 실지 회복, 중화조국의 옹호를 위해 투쟁하다 열사가 된 것이니 착오 없으시기 바란다.

다부동 전투를 지휘한 국군 제1사단장 시절의 백선엽 장군. 그는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조선독립군을 토벌한 것이 아니다. 그가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을 때는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소련령으로 도주한 후였다. 그가 토벌한 것은 만주의 마적떼였다.
다부동 전투를 지휘한 국군 제1사단장 시절의 백선엽 장군. 그는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조선독립군을 토벌한 것이 아니다. 그가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을 때는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소련령으로 도주한 후였다. 그가 토벌한 것은 만주의 마적떼였다.

백선엽이 상대한 적은 동북항일연군이 아니라 마적단

이제 더 확실한 사실을 밝힐 때가 되었다. 만주국과 일본 관동군이 간도특설대를 조직한 것은 1939년 3월이었다.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시기는 1943년 2월이다. 그 때는 이미 노조에 쇼토쿠 소장의 토벌대가 만주 일대를 이잡듯, 쥐잡듯 싹쓸이하여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을 궤멸시켰다.

1941년 3월까지 일-만주군의 강력한 토벌로 생존해 있는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은 500명 미만이었다. 생존자들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지시를 받아 각자도생을 위해 소-만 국경을 넘어 소련령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로 도주했다. 빨치산 부대는 완전 격멸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소련령으로 도주하자 노조에 토벌대는 1941년 3월 19일 빨치산 토벌 승리를 위한 축하연을 개최했다(서대숙 지음·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25~26쪽).

기록에 의하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북항일연군의 중간급 간부(그가 북한 수령이 된 김성주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은 노조에 토벌대의 토벌전을 피해 1940년 12월, 대원 20여 명과 함께 훈춘현에서 메이리라는 삼림지대를 경유하여 두만강변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했다. 서대숙은 김일성이 1941년 3월 훈춘을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된 메이리라는 산림지대를 타고 소련령 하바로프크스로 탈출했다고 주장한다. 연구자들에 따라 김일성의 소련으로의 탈출 시기는 몇 개월 차이가 난다.

정리하자만 만주 일대에서 암약하던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은 거의 대부분 사살되었고, 생존자들은 1940년 12월~1941년 3월을 기점으로 모두 소련령으로 도주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시기는 동북항일연군 생존자들이 모두 소련령으로 도주한 후였다.

미안한 얘기지만,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을 무렵 만주 일대에는 마적질, 비적질이나 일삼는 화적떼들만 우글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한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는 마적질, 비적질 하던 도적떼를 소탕한 것이지 조선독립군을 때려잡은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간도특설대가 조선독립군을 토벌했으니 백선엽 같은 사람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시비 거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질 사기극일 뿐이다. 오죽했으면 함석헌 선생 같은 분도 자신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만주에서 비적질 해먹던 것들이 해방군이라 설쳐대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다고 기록을 해놓았겠는가.

일본이 패망한 후 귀국한 백선엽은 평양으로 돌아와 조만식의 비서로 일했고, 학병에서 돌아온 동생 백인엽이 조만식의 경호를 담당했다. 그는 이때 동북항일연군에 몸 담았다가 소련군 대위가 되어 돌아왔다는 김일성(김성주)·최현·최용건·김책 등과 마주쳤다. 백선엽은 양복 차림에 약간 마른 몸매의 이 인물이 간도특설대가 쫓던 그 김일성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김효순, 앞의 책, 356쪽).

박정희를 살려낸 백선엽

1945년 12월, 월남한 백선엽은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으로 1946년 2월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중위가 되었다. 1948년 그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며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내에 침투한 좌익들을 때려잡는 숙군사업을 총 지휘했다. 이때 군부 침투 남로당에 연루되어 체포된 박정희 당시 소령의 구명운동에 앞장선다. 정일권, 백선엽, 김정렬 등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선배들의 적극적인 구명운동 덕분에 국군 창설의 아버지 제임스 하우스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박정희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면에 의해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를 현역에서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구해낸 것은 백선엽의 노력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군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를 문관 신분으로 육본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월급도 나오지 않아 육본 정보국 장교들이 십시일반으로 갹출하여 박정희 문관의 생활비도 대 주어 생존시켰다.  백선엽의 노력 아니었으면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박정희. 그를 살려내 재기의 기회를 마련해 준 인물이 백선엽이고, 그가 살려낸 인물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역이 되었으니 이 또한 백선엽의 찬란한 공적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백선엽은 949년 7월 제5사단장을 거쳐 6·25 직전인 1950년 4월, 개성을 관할하는 제1사단장에 임명되어 6·25를 맞게 된다. 그는 6·25 당일에는 시흥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재훈련 교육을 받고 있었다. 즉시 부대로 복귀한 백선엽 제1사단장은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의 공격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된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 청주, 대전, 보은, 문경, 영주를 차례로 점령했고, 8월 초에는 낙동강을 끼고 배수의 진을 친 국군과 미군의 마지막 방어선에 도착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1950년 8~9월은 풍전등화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긴박함의 연속이었다. 포항-영천-대구-마산으로 이어진 동서 80㎞, 남북 160㎞의 ‘낙동강 방어선’이라 불리는 마지막 보루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처절한 항전을 계속했다. 어느 한 곳이라도 전선이 뚫리면 부산이 하루 이틀 사이에 공산군 수중에 떨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백선엽, 대한민국 구하다

낙동강 방어전에 임한 아군은 국군 5개 사단, 미 8군 3개 사단 등 총 8개 사단이었다. 통상 사단 방어 정면은 아무리 길어야 15㎞인데, 8개 사단이 240㎞를 방어하자니 1개 사단이 통상 방어구역의 2배인 30㎞를 담당해야 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국군은 왜관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북쪽을, 미군은 왜관에서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방어에 나섰다.

그 무렵 북한 인민군은 김천에 전선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선 사령관은 김책이 맡고 있었다. 북한군 총병력은 2개 군단(총 13개 사단)으로 미8군 정면에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 국군 정면에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2군단, 예비로 3개 사단을 편성해 놓고 있었다. 김일성이 김천에 나타나 사단장과 군단장 전원을 모아놓고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외쳤다(정일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1996, 183쪽).

대구 북방 22㎞에 위치한 다부동에서는 백선엽의 제1사단이 인민군 3개 사단을 상대로 장렬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2만 4000여 명,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혈전이 55일간이나 계속됐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L-19 경비행기를 타고 전선 상공을 누비면서 마이크를 잡고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당시의 통신시설은 오늘날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부대와 부대까리 통신이 잘 되지 않아 서로 위치를 모른 채 부딪치기도 했다.

워커 장군의 전속 조종사인 린치 대위는 워커의 공중지휘를 잘 보좌하는 기술이 있었다. 워커 사령관이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면 어떤 때는 엔진을 끄고 땅에 닿을 정도로 지상에 가까이 비행하곤 했다. 엔진을 끄고 마이크를 사용하면 그만큼 지상에서 소리가 잘 들린다. 워커는 마이크를 잡고 “적은 저기 있다. 오른쪽을 공격하라” “왼쪽으로 우회하여 궁지에 빠진 우군 부대를 구하라” 라는 등의 현장 명령을 내렸다(정일화, 『아는 것과 다른 맥아더의 한국전쟁』 앞의 책, 43~44쪽).

대구 서쪽의 낙동강 방어선을 담당한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1, 6 사단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현풍에서 왜관에 이르는 지역을 담당했는데, 직선거리로는 40㎞지만 강을 따른 거리는 56㎞로 늘어났다. 이 넓은 지역을 3개 연대가 방어하려니, 자연히 중간 중간에 빈틈이 많이 생겼다.

국군 제1사단은 왜관에서 북쪽으로 낙동리에 이르고, 다시 강을 따라 동쪽으로 약 10㎞ 지역을 맡았으며, 국군 제6사단은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3㎞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했다. 제1사단장은 7월에 준장으로 진급한 28세의 백선엽이었고, 제6사단장은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춘천·홍천을 사수하여 대한민국을 구해낸 김종오 대령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4성장군에 오른 백선엽 장군.
대한민국 최초의 4성장군에 오른 백선엽 장군.

탄약 떨어지면 야전삽으로…

이에 맞선 북한 인민군은 낙동강을 따라 10, 3, 15, 13, 1사단 등 5개 사단이 105기갑 사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인민군 1·3사단, 국군 제1·6 사단은 북한군 3사단 일부 및 15, 13, 1사단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북한군은 8월 5일부터 대구 정면의 낙동강을 건너 대구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8월 5일 낮, 북한군 13 사단 예하 21연대는 국군 제1사단 구역인 낙동리를 건너다 도중에 국군에 발각되었다. 국군의 박격포 포격과 미군의 전투기 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적은, 다시 강 너머로 도망갔다.

그날 밤 북한군 19연대는 소화기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수심이 낮은 지역을 통해 낙동강을 건넜고, 8월 6~7일에는 23연대가 2개 포병대와 함께 뗏목 위에 무기를 싣고 낙동리 남쪽에서 도강에 성공했다. 8일에는 수중교를 설치하고, T-34 탱크까지 도강에 성공한다. 이들은 대구로 진출하려다가 다부동에서 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당시 인민군은 독전대(督戰隊)라는 것을 운영했다. 부대원들을 감시하고 공격을 독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직이었다.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낙동강에 누가 목숨 걸고 뛰어들겠는가. 대대장들을 모아놓고 강을 건너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독전하고, 무단 후퇴한 병사들을 뒤에서 쏴 죽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 병사들은 목숨 걸고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국군들은 소총·기관총으로 도하를 저지하다가 탄약이 떨어지면 야전삽으로 둑을 기어오르는 인민군을 때려눕히는 방식으로 장렬하게 맞서 싸웠다.

8월 7일, 북한군 15사단 45연대가 선산 남쪽의 강창에서 도강에 성공했다. 강을 건넌 북한군은 201고지와 346고지로 올라가 부대를 편성한 후, 16일에는 유학산 부근에 집결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인민군 13사단이 백선엽의 국군 제1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제1사단 12연대장 김점곤의 방어지역은 수암산에서 유학산까지의 8㎞였다. 이곳에서는 매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바위산이었던 유학산에서는 양군이 바위틈에 붙어 서로 수류탄전을 벌였다. 수류탄을 얼마나 던졌던지, 부대원들 오른팔이 뻐근할 정도였다.

사단장이 선두에서 돌격작전 감행

유학산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 12연대는 3,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신임 소위가 계속 보충되어 왔지만, 대부분이 유학산을 올라오다 적의 포격에 희생되곤 했다. 각 부대마다 소대장·분대장이 모자라 현지에서 임관하는 일들이 많았다.

워커 사령관은 소방부대를 끌고 다니면서 위급한 지역을 도왔다. 마이켈리스 대령이 이끈 25사단 27연대가 바로 그 소방부대였다. 다부동이 위험하다고 하면 워커는 즉각 마이켈리스 부대를 다부동에 투입하고, 진동고개가 위험하다고 하면 곧바로 27연대를 그쪽으로 끌고 갔다. 27연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급한 불을 꺼 한국전의 위대한 별이 되었다. 마이켈리스 대령은 후에 4성 장군으로 진급하여 주한 유엔군사령관이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이 연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중 이웃한 연대의 방어선이 뚫려 유학산 아래 다부동으로 인민군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이탈하고 있다”면서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사단장 백선엽은 권총을 뽑아들고 “내가 앞장서 나갈 테니 너희들은 뒤를 따라라. 만약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쏘라”고 외치며 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돌격을 감행했다. 다부동에서 백선엽의 제1사단은 사단장이 선두에서 돌격을 감행하는 전무후무한 분전끝에 대구를 노리고 달려드는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전세는 일거에 역전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일제히 뚫고 나온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동서 양 전선에서 북진했을 때 국군의 두 지휘관은 서부전선에서는 백선엽, 동부전선에서는 김백일 장군이었다.

미 제1군단 예하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였다.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1사단은 38선 고랑포에서 약 170㎞ 떨어진 평양을 10월 19일에 점령했다. 하루 평균 20㎞를 진격한 것이다. 김백일 장군의 제1군단 산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진격하여 원산을 점령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올 때 간도에서는 “정일권과 백선엽을 잡으러 가자”는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김효순, 앞의 책, 358쪽). 두 사람 모두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서 활약했던 존재들이다.

이 부분은 중대한 시사를 한다. 6.25 때 맹활약하여 공산군 남침을 저지한 인물들은 거의 모두 만주군관학교를 비롯하여 일제 하에서 사관학교 졸업생, 지원병, 학병 출신들이다. 좌익들은 백선엽 등등을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려는 남침을 막아내고, 공산당을 격멸하는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비난하는 것이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참뜻이다. 백선엽 같은 사람만 아니었다면 6.25 때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두고두고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구한 백선엽 장군이 묻힐 것은 어디인가? 백선엽 같은 영웅을 국립현충원에 모시지 못하는 나라는 '국가'의 자격이 없다. 차라리 대한민국은 해체되는 것이 맞다.
대한민국을 구한 백선엽 장군이 묻힐 것은 어디인가? 백선엽 같은 영웅을 국립현충원에 모시지 못하는 나라는 '국가'의 자격이 없다. 차라리 대한민국은 해체되는 것이 맞다.

누가 진정한 영웅인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4성 장군,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가장 존경했던 한국 군인,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교”, “최상의 야전지휘관이자 위대한 군사작전가”란 평을 들었던 분이 백선엽 장군이다.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백선엽 장군을 찾아가 전입신고를 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낙동강 전선 중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영웅. 이제 그 영웅이 눈을 감았다.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많은 분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것이 고인에 대한 국가적 예우이니까. 하지만 그곳에 그를 위한 공간은 없다. 대전으로 가란다. 그리하여 대전국립현충원에 묘역이 마련되었다.

이 나라의 핵심부를 장악한 좌익들은 국립묘지 파묘법이란 것까지를 만들 기세다. 백선엽 장군의 묘역을 두고 좌익 진영에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은 안 된다”고 결사반대한다. 백선엽 장군도 살아생전에 그런 논란을 지켜보았다. 만에 하나, 그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할 경우 수많은 부하들이 죽어간 다부동전투 현장인 칠곡에 묻힐 생각까지 했다. 이를 위해 칠곡 근방에 묘역을 위한 땅을 사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백선엽 장군이 서울 국립현충원에 묻히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국가’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대한민국 어느 곳이 백선엽의 묘역 아닌 곳이 있겠는가. 영웅의 죽음 하나 기리지 못하고, 여직원 성추행 사실이 들통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영웅으로 둔갑시키려는 나라라면 차라리 대한민국은 해체되는 것이 맞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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