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베테랑 외교관의 소회 뜬금없었으나 지금 보니 맞는 말
박근혜 정부는 뭐라도 하려 했으나 문재인은 피해자 외면하고 철저히 정치적 계산으로 일관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2015년 연말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나온 뒤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은 “지난 20년을 회고해 보면 박근혜 정부처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많이 할애한 정부가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10억 엔의 피해자 지원금을 출연하기로 의결한 2016년 8월에 나온 발언이었다. 한일 간 최대 쟁점이었던 위안부 문제가 합의에 이어 구체적 조치로 실행되자 40년 베테랑 외교관으로서 지난 소회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자화자찬이었다. 당시에는 “차라리 아무 소리 말고 가만히 있지”라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위안부 합의에 대해 문재인 당시 야당 대표는 “10억 엔에 우리 혼을 팔아넘겼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합의 문구 등에 대한 시중 여론도 호의적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박근혜 정부가 이 문제에 매달리느라 치른 외교적인 기회비용도 막대했다. 이 와중에 눈치 없이 무슨 자랑인가 싶었다.

하지만 최근 이용수 피해자 할머니의 폭로에서 시작된 위안부 문제가 윤병세 장관의 그 말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과연 위안부 문제만을 놓고 볼 때 역대 정부들은 각각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공론의 장으로 나오게 된 것은 1991년 8월 김학순 피해자 할머니의 공개 증언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전까지는 역사적 기억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해당 정부들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까지 모두 6개 정부가 된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경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이후 정권들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3월 일본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직접 지원하겠다고 했다.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때 중국이 일본에 대해 전쟁 피해 청구를 포기한 선언을 연상시키는 접근방식이었다. 그 대신 일본 측에 위안부 문제의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이후 위안소 설치와 운영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하는 유명한 ‘고노 담화’가 1993년 8월에 나왔다.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금전적 지원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도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의 일이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에서 ‘게임의 룰’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노무현 정부가 2005년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고부터다.

1965년 한일협정을 맺고 국교정상화를 할 때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으로 무상 3억 달러를 일본 측으로부터 받았는데 위안부 피해에 대한 몫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게 노무현 정부의 결론이었다.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는 목적 자체가 ‘굴욕 협상’임을 부각시켜 당시 협상을 주도한 박정희 정권을 폄하하려는 ‘과거사 정치’였다.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의 공식 배상을 받지 못했으면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받아낼 의무가 있다. 문서 공개 이전에 비해 정부 역할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더구나 위안부 문제는 2007년 미국 하원과 유럽 의회가 일본 정부에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낼 정도로 그 사이에 국제적 이슈가 되어 있었다.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 공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나섰다.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건 위헌이 아니냐고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낸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결론을 내린 것은 노무현 정권이 끝나고 나서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던 2011년 8월이었다. 예상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위헌이라는 의미에서 ‘부작위(不作爲)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이명박 정부도 일본과 물밑 협상을 벌였으나 소득 없이 끝나고 책임은 다시 박근혜 정부로 넘어갔다.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다. 노무현 정부는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위안부 할머니들의 배상 권리를 만들어줬다는 생색만 내고, 박근혜 정부는 나라 혼 팔아먹은 ‘굴욕 협상’을 했다는 욕만 먹은 꼴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당시의 위안부 합의를 무효화하면서도 파기나 재협상은 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만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위안부 문제에서 사실상 위헌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추궁하자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 문제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내세웠던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피해자에게 공을 떠넘기고 있다. 교묘하고 사악한 책임 전가다.

그 배경에는 문재인 정부가 일본 측에 파기나 재협상을 선언하게 되면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한 ‘부작위’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문제가 있다. 즉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로 일단 이 문제는 위헌 상태에서 벗어났다. ‘굴욕 협상’이든 뭐든 정부의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합의를 파기하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파기와 재협상은 안 하겠다는 것은 이전 정부의 합의를 인정하기도 싫고 새로 합의를 만들어내는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그들로서는 ‘절묘한 한수’이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는 집권 3년이 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직무 유기 중이다.  

문 대통령은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에 대해 지난 8일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는 글자 수로 1800자 짜리의 발언에서 ‘위안부 운동’이라는 말을 12번이나 입에 올리면서도 윤미향 의혹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의 활동방식이나 행태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특유의 동문서답으로 넘어갔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길 기대하는 말은 “30년 동안 재주는 내(이용수)가 넘고 돈은 그들(윤미향)이 벌었다”는 절규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일 텐데 그는 외면했다. ‘피해자 이용수’보다 ‘동지 윤미향’이, ‘위안부 문제’보다는 반일(反日) 효과를 위한 ‘위안부 운동’이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다시 박근혜 정부 얘기로 돌아가자면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협상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 안 되면 다른 한일 관계도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당시 3년 6개월 동안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위안부 문제와 한일정상회담을 직접 연계했기 때문이다. 현안이 산적해 있는 대일(對日) 외교로서는 낙제점이라고 해도 틀림없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에 공을 들인 것만 놓고 본다면 박근혜 정부가 가장 많이 들였다는 윤병세 장관의 평가가 틀리지 않다. 현 집권 세력은 우파 정부에 돌을 던지는 데는 ‘프로’들이지만 본인들이 정작 그 일을 맡게 되면 이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드러낸다. 경제 문제 등 다른 분야 국정도 늘 이런 식이다.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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