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한쪽이 주도하는 국제정치에 참여할 때...‘우리 민족 홀로주의’로 나갈 때 아냐
지금은 냉전 시기이자 진영싸움 시기...서푼짜리 '민족적 데탕트' 환상에 사로잡혀선 안돼

류근일 언론인

북한은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폐쇄했다.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가 표면적인 이유였다. 김정은 정권으로서는 자기들의 ‘최고 존엄’에 대한 공격을 체제위협으로까지 간주했을 법하다. 그러나 이게 다였을까? 이게 하나의 계기였을 수는 물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최근의 동북아 신(新)냉전이라는 국제환경의 변화에 대한 북한 나름의 대응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미-소 냉전 때도 보았듯이, 강대국들이 험악한 냉전, 상호포위, 패권경쟁을 벌일 때 주변 중-소국들로서는 그 세(勢)를 거슬러 제 마음대로 데탕트(긴장완화)를 하려야 할 여지가 없었다. 미-소가 으르렁거리며 싸웠을 때 북한이 저 혼자 미국이나 한국과 데탕트를 할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전역이 “미국에 줄 설레 중국에 줄 설레?”라는 양자택일에 직면한 지금, 주변 중-소국들이 “우리는 혼자서라도 긴장 완화로 나가겠다”라고 내뻗을 여지란 거의 없다. 중-소국들에는 국제정치가 주요 변수이고 국내정치는 부차적 변수다. 이걸 민족주의 감정으로 한사코 부인한다 해서 국제환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그랬다는 이야기다.

김정은 정권은 작년 4월의 미-북 하노이 회담 결렬 때까지는 문재인 정권의 거중(居中) 역할과 자신들의 핵보유국 지위를 지렛대로 삼아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 약속을 얻어낼 수 있다고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과 미-중 신냉전, 그리고 끝나지 않는 국제 제재에 임해서는 더이상 독자적 이니셔티브에 의한 미-북 데탕트와 남-북 데탕트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기로 한 것 같다.

이 점에서 김정은 정권은 국제정치의 기류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운동권 정권이 오히려 더 낡은 ‘민족해방’ 운운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국제정치를 우습게 여기는 무지몽매에 깊숙이 빠져있는 꼴이다. 중-소국들로서는 지금은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이 주도하는 국제정치에 참여할 때이지, ‘우리 민족 홀로주의’로 나갈 때가 아니다.

한국 586 운동권은 이렇듯 무식하고 무모하다. 가히 중국 의화단 운동 뺨 때리게 봉건적, 전근대적 척화(斥和) 사상에 중독돼 있다. 그들은 근대의식도, 서구적 계몽사상도, 산업화 의지도, 개인의 인권도, 사유재산주의도, 자유기업 사상도 없다. 오로지 조선조(朝) 때의 맹목적 척양(斥洋) 사상과 홍길동-일지매-임꺽정 식 “있는자 곳간 털어 우리끼리 갈라먹자”는, 배배 꼬이고 삐뚤어진 정서밖엔 없다. 반디(bandit, 산적) 사상인 셈이다.

김정은이라고 해서 남한 좌익의 이런 3류 속성을 간파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가 어쩌다 저런 삶은 소 대가리도 앙천대소(仰天大笑) 할 상대방하고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던가?”라며 후회를 했을 법도 하다.

오늘의 국제정치를 ‘민족‘이란 구호 하나로 대처할 수 있다고 망상하는 것 자체가 한없이 한심하고 후진적인 짓이다. 그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 길을 잃었다. 그리고 북한에 의해서도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모멸당했다. 문재인 정권의 대북 해바라기 정책과 탈미-친중 외교는 현재로선 도로(徒勞)가 되어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자유 국민이 저런 무지막지한 반디 사상의 광풍 앞에서 지금 풍전등화처럼 꺼질 듯 말 듯 명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찌할 것인가? 자유민주 야당도 이젠 없다. 야당 안에는 물론 개인적으로는 좋은 인사들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제도권 정치권에 중도좌파 2중대 야당은 있어도 대한민국 정통의 맥은 끊기고 없다.

지금은 냉전 시기이고 진영싸움 시기다. 혼자 살 실력도 없으면서 서푼짜리 ’민족적 데탕트‘ 환상에 사로잡혀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는 거위처럼 처신해선 안 될 때이다.

류근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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