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직권남용 기준 첫판단...김기춘-조윤선 블랙리스트 2심 징역형에 "법리 오해, 다시 심리하라"
지난 9일 대법 2부는 '여검사 성추행, 인사보복 의혹' 2심 징역형 살았던 안태근 사건도 무죄취지 파기환송
前정부 인사들 하급심은 '직권남용 단죄 프리패스' 수준이더니...文정권 후반기 들어서야 '엄격한 잣대' 요구한 대법
親文 유재수 감찰 무마-울산시장 부정선거 개입 의혹 등 靑안팎 관계자 줄기소된 사건도 영향 받을 듯

문재인 정권치하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 고위급 인사들에게 직권남용 혐의를 씌워 줄줄이 징역형을 선고했던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파기환송 명령이 내려졌다. 직권남용죄에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점에 대해 엄격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알려져, 유·무죄 적용 여부가 달라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는 최근 이른바 '후배 여검사 성추행 및 인사보복' 의혹으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적용돼 항소심 징역 2년을 받았던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도 '무죄 취지' 파기 환송으로 2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된 것과 유사한 경우다. 이를 두고 문재인 정권이 전반기에는 전임 정부를 적폐로 낙인찍으며 경계선이 불분명한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줄줄이 단죄했지만, 정권 후반기 들어 친문(親文) 핵심인사들의 권력농단 의혹이 전면에 불거지자 직권남용죄 적용을 엄격하게 만들어 향후 유죄 판단을 피할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이 뒤따른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 1월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특별기일을 열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81)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박 전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해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원심도 파기됐다. 

지난 2018년 1월 2심 선고가 내려진 뒤 대법원 심리를 거쳐 약 2년여 만에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 명령되면서, 2심이 재차 진행되는 것이다. '심리 미진과 법리 오해'가 그 이유였다. 그간 '적폐몰이 수사' 등에 적용돼온 직권남용죄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놓은 최초의 판단이란 점에서 향후 관련 재판들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앞서 청와대 수석들에게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을 지시하고,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등과 공모해 문체부 고위인사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한 혐의 등으로 2017년 2월 구속 기소됐다.

1심은 "정치권력에 따라 지원금을 차별해 헌법 등이 보장하는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심각히 침해했다"며 김 전 실장에게 징역 3년을, 조윤선 전 장관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후 2심 재판부는 "정부와 다른 이념적 성향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를 좌파로 규정해 명단 형태로 관리하며 지원을 배제하는 것은 헌법 원칙에 어긋난다"며 김 전 실장에 징역 4년, 조 전 장관에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각각에게 징역 1년씩 형량이 가중된 것이다. 이 중에서도 김 전 실장에 대해 "좌파 배제에 대해 박 전 대통령과 인식을 공유하면서 위법한 지원배제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고, 조 전 장관에 대해선 "좌파 명단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보조금 지급이 이뤄지지 않게 하고 감시하는 역할은 정무수석실 역할이었다"며 "이런 역할을 인식하고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단정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8년 2월 서울고법 항소심 선고 이후 사건을 접수한 뒤 전원합의체에서 사건 심리를 진행해 왔다. 특히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성립 여부에 대해서 집중적인 검토를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대법원이 그간 적폐몰이 수사 등에서 적용됐던 직권남용죄에 대한 판단 기준을 어떻게 세울지가 핵심 쟁점이었다고 한다.

그간 법조계에서는 형법 123조 직권남용에서 공무원 '직권'의 범위 및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점에 대한 해석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돼 왔고, 유·무죄 판단을 내림에 있어 하급심에서의 판단이 엇갈린 경우도 있었다.

과거 헌법재판소는 지난 2006년 직권남용죄의 명확성 원칙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사건에서 합헌 의견을 내렸지만, 소수의견을 통해 '공무원의 직권은 내용과 범위가 언제나 법령의 규정을 통해 객관적으로 명확히 확인되는 것으로 볼 수 없어 직권남용의 적용 범위가 사실상 무한정 넓어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비판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인사들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 하급심에서 깡그리 무시되다시피 했다. 

(왼쪽부터) 김기춘 전 박근혜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박근혜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사진=연합뉴스)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의 양면 격인 화이트리스트 사건 재판으로도 옥고를 치러왔다. 이른바 화이트리스트는 김 전 실장 등 9명이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전경련을 압박해 33개 친정부 성향 보수 단체에 모두 69억원을 지원하게 했다는 의혹이다.

지난해 4월12일 서울고법은 김 전 실장에게 6개월 전 있었던 1심과 마찬가지로 1년 6개월을, 조 전 수석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특히 김 전 실장에 대해 직권남용 혐의 1심 무죄를 깨고 2심은 유죄로 인정했다. 

한편 지난 9일 대법원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2010년 수원지검 여주지청장 시절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했다가 5년 뒤(2015년) 법무부 검찰국장으로서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가 두려워 여주지청에서 창원지검 통영지청으로 보내는 '보복 인사'를 인사실무자에게 지시했다는 혐의로 2심 징역형까지 받았던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파기환송한 바 있다.

서 검사는 현 여권발(發) 이른바 미투(나도 성추행 당했다) 폭로에 동참하면서 안 전 국장을 재판에 회부하기에 이른 인물이다. 9일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안 전 검사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쟁점은 경력검사인 서 검사를 연속해서 부치지청(차장검사는 없고 부장검사만 있는 소규모 지청)에 보내는 인사안 작성이 '경력검사 부치지청 배치제도'에 어긋나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였다. 대법원은 서 검사를 통영지청에 보낸 게 인사 재량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항소심 대비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인사권 자체는 인사권자에게 있는 것이지만 안 전 국장이나 인사실무자 신모 검사에게도 여러 인사기준과 고려사항을 종합해 인사안을 작성할 '재량'이 있다고 봤다. 인사실무자에게 고유 권한과 역할이 있어야 그 기준을 어길 때 위법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력검사 부치지청 배치제도에 관해 대법원은 "부치지청에서 근무한 경력검사를 차기 전보인사에서 '배려'한다는 내용에 불과하다"며 "일의적·절대적 기준이라고 볼 수 없고, 다른 인사기준 내지 다양한 고려사항들보다 일방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직권남용 혐의 적용에 대법원이 갑자기 엄격해진 잣대를 잇따라 제시하면서, 친문 핵심 일원인 유재수 전 금융위원회 국장 뇌물 비리에 대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특별감찰반 감찰 무마 지시, 2018년 6.13 지방선거를 앞둔 청와대 민정비서관실발(發) 울산시장 부정선거 개입 등 의혹 관련 줄줄이 기소된 정권 핵심인사들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 적용이 향후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기호 기자 hkh@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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