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일찍이 콜롬보 선생께서는 범죄 현장에서 세 가지를 주목하라 알려주신 바 있다. 있었는데 없어진 것, 없었는데 있는 것 그리고 위치가 옮겨진 것이다. 개인의 범죄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집단 혹은 국가의 범죄라고 다를 리 없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거대한 반反문명적이고 반反이성적인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는 현장이다. 있었는데 없는 것 중 대표적인 게 원전이다. 탈脫원전에 대한 이 정부의 신념은 신앙에 가깝다. 전기 요금 상승, 전력 수급 불안, 온실 가스 배출이라는 빤히 예상되었고 이제는 현실로 다가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알게 뭐람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 대외적으로는 원전수출 부진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에, 대내적으로는 협력 업체 직원들(2만 5천 가구쯤 된다고 한다)의 생계위협은 이미 낡은 소식이다. 개보수에 7,000억 원이 들어간 월성 1호기의 영구 정지에 이어 월성 2~4호기도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는 소식에는 한숨만 나온다. 그래놓고도 사업자인 한국수자력원자력은 “원전 이용률을 높이는 게 최우선의 목표”라는 경영목표 보고서를 냈으니 이것은 아이러니인가 코미디인가 정신분열인가 자아해체인가. 가압수加壓水형인 한국형 원전에서는(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이래서 전문가라는 게 있는 거다) 수소 폭발로 격납용기가 뚫리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같은 사고가 발생할 수 없다는, 한국형 원전의 개발자 이병령 박사의 학자로서의 양심을 건 발언은 진흙탕에 처박힌다. 한마디로 반이성의 절정이요 미신과 몽매의 금자탑이다. 탈脫원전의 반反문명성은 더욱 심각하다. 산림청 조사에 따르면 원전 대신이랍시고 태양광 시설을 설치한 면적이 2445ha로 축구장 3,000개 규모란다. 이게 어떻게 조성한 푸른 산인데 원전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햇볕을 잡아보겠다고 날린다는 말인가.

‘나는 자연인이다’의 원조 화전민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산은 누렇거나 시뻘건 흉물이었다. 서독에서 아우토반을 달린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들어 온 게 도로 양 옆으로 끝없이 이어진 푸른 산이다. 원래 게르만족이 숲을 숭상하는 종족이라 이들에게는 당연한 조림造林이었지만 박대통령에게는 달랐다. 그에게도 산이란 황폐해야 정상이었는데 막상 울창한 산림을 보자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인지 깨달은 것이다. 얼마 후 전국의 산마다 입산금지 팻말이 걸린다. 산에 들어가는 것만 막은 게 아니다. 산에 있던 사람들을 내몰았다. 티브이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게 있다. 이것의 원조가 화전민인데 도저히 먹고 살 방법이 없어 산으로 들어가 숲을 태워 농사를 지어 먹고 산 사람들이다. 4인 가족이 산 하나 해먹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전국의 산이 메마른 게 당연했다. 이들이 있는 한 푸른 산은 요원했다. 1965년에서 1979년까지 소개 정책으로 산에서 쫓겨난 화전민의 숫자는 40만 명에 달한다. 이런 눈물 나는 사연 끝에 만들어진 게 지금 대한민국의 푸른 산이다. 그런데 탈脫원전으로 그걸 마구 훼손하겠다니 대체 제 정신인가. 이 반反문명적인 발상과 실행에 나는 질리고 또 질린다.

보이지 않는 상실, 자유自由

정치적 자유 못지않게(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경제적 자유다. 헌법에도 나온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제 23조 1항).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제 37조 2항). 이 정부의 헌법수호 의지빈약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반드시 보장되고 침해되지 말아야 할 자유까지 이렇게 짓밟을 줄은 몰랐다. 최근의 12ㆍ16 부동산 대책이 특히 그렇다. 나는 이 대책이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멱살을 틀어잡고 협박과 공갈을 퍼부은 희대의 폭거라고 감히 단정한다. 대출 규제와 세제 강화로 화끈하게 패 줄 테니 집 사고 싶으면 한 번 사봐, 하며 국민과 대결의지를 불태우는 게 과연 정상적인 정부인가. 주거의 자유를 침해하고 행복의 추구를 막고 재산권의 확대를 봉쇄하는 이 대책은 정부 스스로 정부이기를 포기한 선언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죄에 벌이 따르는 것은 맞지만

없었는데 있는 것은 황당한 경제 정책과 난폭한 정치 제도의 신규 도입이다. 경제학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월급을 줘보기는커녕 월급을 받아본 적도 없는 경제 무능력 인간들이 ‘취향’으로 경제를 운용하다보니 최저 임금의 무작정 인상, 주 52시간 근무 같은 듣기에만 아름다운 정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노동자를 사랑하고 싶으면 그에 앞서 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도 기업을 죽어라 미워하니 애꿎은 노동자만 덩달아 죽는다. 공수처가 정식으로 간판을 거는 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을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 힘이 미칠지 모르는 이 괴물은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삼권분립을 밟고, 야만의 시대로 정주행할 것이다. 위치가 옮겨진 것은 너무나 많다. ‘국익’이 ‘우리끼리’로, ‘국민’이 ‘인민’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직접 혹은 ‘광장’ 민주주의로, 전문가가 시민단체로 옮겨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직접 한번 해보시라. 적어나가시다보면 아마 놀라실 것이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가 떠올라 기가 차실 것이다. 이런 정부 치하에서 해를 두 번이나 더 넘겨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증이 오실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제목에 ‘죄’와 ‘벌’을 함께 넣은 것은 단순히 대구對句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죄가 있으면 벌이 따라야 한다는 상식 때문이다. 그 상식을 실현할 날이 다가온다. 그 날은 누군가에게는 공포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될 것이다. 정의는 부르짖는다고 성취되지 않는다. 기회를 실현하는 것은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 노력에 힘을 하나로 모으지 않는다면 죄는 벌에서 멀리 떨어져 유유히 산보하며 또 다른 죄들을 무럭무럭 생산해 낼 것이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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