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독재정권이라고 자리매김하는 것은 철부지 운동권, 주사파들의 논리의 판박이다. 김대중 고문은 천박한 철부지 운동권, 주사파 논리를 빌어다 건국의 아버지, 흥국(興國)의 주인공 이승만·박정희를 모욕하고 저주했다.

#. 노예상인 로버트 모리스를 아십니까?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를 아시는가?

모리스는 1734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다. 13세에 선박회사 견습사원으로 입사하여 금융과 무역을 익혔고, 31세 때 인도와 유럽을 왕래하는 해운업, 노예 매매업으로 재산을 모아 미국 최고의 갑부 대열에 올랐다. 그의 회사 소유 선박이 청나라 광저우(廣州) 무역에 참여하여 떼돈을 번다.

당시 미국 상인들은 영국인들과 함께 열심히 아편을 중국에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모리스도 청나라 무역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아편 무역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달리 터키 아편을 중국에 팔았다.

뭐든 돈이 되면 지옥이라도 달려가는 것이 자본주의 상인들의 미덕이다. 그러한 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인물이 로버트 모리스였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대륙회의는 부자인 모리스의 등을 떠밀어 억지로 초대 재무관(재무부장관)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모리스는 노예와 아편을 팔아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자신이 태어난 모국 영국과 싸웠다. 그의 사재 출연은 독립전쟁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미국 화폐 단위를 달러로 정한 사람이 모리스다.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회사 소속 선박들은 영국 선박들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열심히 하여 한밑천 땡겼다.

독립전쟁 후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모리스에게 재무장관을 맡아달라고 했으나 그는 공직을 마다하고 다시 돈벌이에 나섰다. 이번에는 토지에 전 재산을 쓸어 넣어 땅 투기로 한몫 챙기려 했으나 나폴레옹 전쟁 덕에 자금 유입이 끊겨 파산했다. 말년에는 채무자로 전락하여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모리스를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사람, ‘혁명의 재무관’, ‘독립 영웅’이라고 추앙한다.

노예무역으로 돈을 번 로버트 모리스. 그는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노예무역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독립전쟁을 도왔다. 한국 같았으면 이런 악덕 상인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할까?
노예무역으로 돈을 번 로버트 모리스. 그는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노예무역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독립전쟁을 도왔다. 한국 같았으면 이런 악덕 상인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할까?

#. 친영파, 정략결혼의 대가, 물장사의 달인 조지 워싱턴

버지니아 주의 한 마을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워싱턴은 민병대 소령으로 활동한다. 그는 프랑스와의 영토 분쟁으로 야기된 프렌치인디언전쟁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대령까지 진급한다. 그는 영국군과 한편이 되어 싸우면서 지휘 능력을 배운다. 한국 사회였다면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과 협력하여 싸웠으니 영락없는 친영파로 찍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 분명하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결혼한다. 이 결혼으로 그는 막대한 자산가가 되어 버지니아 주 최고 갑부 가운데 한 명이 된다. 한국 사회였다면 재산을 노린 정략 결혼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 조지 워싱턴은 재정 확보를 위해 위스키세를 신설했다. 그러자 이에 저항하여 1794년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워싱턴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진압군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선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워싱턴은 대통령이었지만, 한편에선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을 진압한 사건의 여진이 가라앉기도 전에, 워싱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1797년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증류소를 만들어 위스키와 브랜디를 제조하여 팔았다. 위스키의 연간 생산량은 1만 1,000갤런.

한국 같았다면 이런 부류의 인간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했을까?

조지 워싱턴도 하자가 많은 인물이었다. 영국을 위해 싸웠으니 친영파였고, 부와 권력을 쥐기 위해 과부와 정략결혼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위스키 제조에 앞장섰던 물장사였다. 그런 인물도 미국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한다. 한국 같았으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을 인물이 분명하다.
조지 워싱턴도 하자가 많은 인물이었다. 영국을 위해 싸웠으니 친영파였고, 부와 권력을 쥐기 위해 과부와 정략결혼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위스키 제조에 앞장섰던 물장사였다. 그런 인물도 미국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한다. 한국 같았으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을 인물이 분명하다.

#. 역대 대통령과 맞서 싸웠던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언론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지금도 조선일보에 간간이 ‘김대중 칼럼’을 기고하는 현직 언론인이기도 하다. 2015년 6월 1일, 기자 생활 50년을 맞았으니, 올해로 기자 생활 55년째다. 필자에게는 조선일보 대선배이기도 한데, 이 대언론인께서 기자 생활 50년을 정리하는 인터뷰(조선일보 2015년 5월 30일자)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았다.

김 고문은 1965년부터 25년은 현장에서, 1990년 주필이 된 이후엔 칼럼과 사설로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지켜봤다. 인터뷰를 한 강인선 기자는 김대중 고문을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정의했다. 김대중 고문의 힘은 논리와 비판을 장착한 글의 힘에서 나왔으며, 마흔 살 때부터 지금까지 칼럼니스트로서 거의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때로는 어딘가 딴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기자였다고도 했다. 그래서 망명 가듯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하고, 세무조사와 계좌 추적을 받기도 했단다.

이날 김대중 고문은 “아부 안 해도 되고,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신문기자로 산 게 좋았다”, “권력 압박·유혹 있었지만 다른 직업 생각하지 않아”, “논객은 소통하는 직업 아냐 자기의 생각을 얘기할 뿐”, “우리에게는 어제가 없다. 어제에 매달리면 회한만 쌓인다. 우리는 내일도 개의치 않는다. 내일에 집착하면 자칫 몽상가가 된다. 우리는 오늘을 살되 치열하게 살면서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생명력은 짧아도 생동감 넘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게 내가 신문기자로 살아온 방식이다” 등등 자신의 언론철학을 설파했다.

김대중 주필은 그 동안 대통령에 대한 비판 칼럼으로 인기를 유지해 왔다. 그가 대통령을 주제로 비판의 필봉을 휘둘러댄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과의 대칭관계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사건건 정부가 하는 일에 찬성하려면 뭐하러 언론을 하나. 싸울 때는 누구랑 싸우는 게 제일 좋은가. 상대방의 보스와 싸워 넘어뜨리면 나머지와 안 싸워도 된다. 우리는 보스와 싸우는 게 본업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게임을 좋아하지 않나.”

이승만, 박정희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장기 집권을 하려다 비운을 맞게 되었다고 비판한 김대중 고문의 칼럼(조선일보 2019년 12월 31일자 칼럼 캡처).
이승만, 박정희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장기 집권을 하려다 비운을 맞게 되었다고 비판한 김대중 고문의 칼럼(조선일보 2019년 12월 31일자 칼럼 캡처).

#. 이승만·박정희가 권력욕에 눈이 먼 독재자였다고?

김대중 고문이 맛이 가도 한참 간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파문이 일었다. 그것도 2019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에 말이다. 칼럼 제목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말로를 보다’였다.

“이승만·박정희가 장기 집권의 권력욕에 집착하다가 국민 저항에 부딪쳐 물러났다. 문재인도 독재자 짓을 하고 있으니 그들 뒤를 따라 ‘어리석음의 기록’을 걸을 것이다.”

이것이 2019년 12월 31일자 김대중 칼럼의 요지다. 이 칼럼을 보고 필자는 김대중 고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되었다. 문재인을 비판하기 위해 이승만·박정희를 동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분이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으신지 번지수를 영 잘못 짚었다. 이승만·박정희를 독재의 대명사로 몰아간 것이다. 지금까지 김 고문은 역대 정권을 조지고, 패고, 씹는 데 앞장서 왔으니 뭐 눈에는 뭐만 보였던 것 같다.

#. 먹고 사는 문제 해결되어야 민주주의 가능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

민주주의의 석학(碩學) 로버트 달(Robert Alan Dahl)은 오랜 연구 끝에 한 나라가 서구식 개념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려면 1인당 4,000~7,000달러의 산업적 기반, 탄탄한 중산층, 그리고 중산층들이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이 갖춰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승만 시절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 박정희 시절은 80~100달러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가 소위 말하는 ‘민주화’ 시대로 이행한 것은 1987년 6·29 선언 무렵이다. 한국은 이때 비로소 로버트 달이 설파한 1인당 소득 4,000달러 시대에 돌입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왜 민주주의 하지 않고 독재를 했냐고 비판하는 것은 우물가에 가서 숭늉 달라는 식이다. 이승만·박정희 시대는 오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가 가능케 하기 위한 물적 토대를 닦기 위한 권위주의 정부 시대였다는 것이 양식 있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미국인들은 과거의 노예상인·아편상인, 친영파 장교, 부와 권위를 위해 과부와 정략결혼을 하고, 위스키 물장사를 했던 ‘때 묻은’ 인간들도 독립에 앞장 선 부분을 높이 평가하여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하고 존경한다. 적어도 ‘독재자’ 소릴 들으려면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처럼 자기 나라 국민들 몇 백 만, 몇 천 만 명 정도는 재판절차 없이 굶겨죽이고 때려죽이고, 가둬 죽였어야 한다.

이승만·박정희는 로버트 모리스나 조지 워싱턴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준동하는 공산주의자들, 좌파들과 싸워가며 이 나라를 건국하고 국민들 먹여 살리는 물적 토대를 닦느라 수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들이 정말로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장기 집권을 했다고 믿으시는가?

이승만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고, 박정희가 3선 하지않고 물러났다면 김대중이 집권했을 것이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면 이 나라는 지금쯤 어떤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시는가?

그처럼 엄중했던 시대를 독재정권이라고 비하 자학하는 것은 철부지 운동권, 주사파 논리의 판박이다. 김대중 고문은 그런 천박한 운동권, 주사파 논리를 빌려다 건국의 아버지, 흥국(興國)의 주인공 이승만·박정희를 모욕하고 저주했다. 역사관이나 사고가 이쯤밖에 안 되는 인물에게 펜을 쥐어주는 것은 정신병자에게 총알이 장전된 자동소총을 안겨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이러한 쓰레기 글이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지면에 버젓이 실리는 것이 오늘날 조선일보의 사시(社是)인 모양이다.

기자는 문제의 저질 칼럼이 실린 2019년 12월 31일을 조선일보의 언론으로서의 장례식 날이자 ‘언론인 김대중’의 장례식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김대중 주필은 붓을 놓을 때가 지났다. 집에 가셔서 손주 돌보며 여생을 편히 쉬시는 것이 애국 시민들 정신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길임을 후배 언론인으로 정중히 권한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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