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방남(訪南)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김여정,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남조선 동무들이래, 앞에서는 살살 웃으며 뒤에서는 등에 칼을 꽂는 데 아주 기겁을 했네.”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말이다. 아시다시피 김여정은 평창이라는 스포츠 행사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김여정의 대한민국 방문은 철저히 외교의 한 방식으로 최소한 펜앤드마이크의 독자들이라면 이면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잘 못 인용되고 있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치의 ‘연장’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전쟁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전략적ㆍ전술적 그리고 기타 규칙이나 관점을 가진 것이다) 외교 역시 정치의 연장이 아니라 독자적인 논리를 가진 전쟁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외교에서 언어가 30이면 장소는 70

이번 외교에서 대한민국은 김여정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외교에서 언어만큼 중요한 것이 장소다. 장소는 상징이자 메시지이며 어떤 경우 목적 그 자체이기도 하다. 가령 예를 들어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했다고 치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일본이 승리했다고 치면 그들은 항복 조인식을 어디서 치룰까. 미국의 심장부인 백악관에서 사인을 한다면 그건 너무 일차원적인 사고다. 소생이 승전 당사자라면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아니면 그들이 항복 조인식을 했던 동경만 앞바다에서 할 것이다. 미국이 공격했던 도시라는 상징이거나 자기들이 항복 조인식에 사인을 했던 치욕의 장소에서 하는 것이 외교적 발상이라는 얘기다. 김여정의 방남 일정을 들여다보자.

보라 너희의 흉수(凶手)가 누구를 죽였는가

북한 예술단 삼지연관현악단이 공연을 한 곳은 서울 국립국장이다. 국립국장이 어디인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 문세광에게 피격을 당한 곳이다. 2010년에는 북한의 인권유린을 고발한 뮤지컬 ‘요덕 스토리’가 올라 관객들을 울린 곳이다. 바로 이곳으로 우리 정부는 김여정을 불러냈다. 기억을 되살려 주자는 것이다. 너희의 흉계로 영부인이 사망하고 너희의 폭정으로 신음하는 북한 동포의 삶을 그린 작품을 상연한 곳에서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 어떤지 제대로 느껴보라고 심리적 압박을 가한 것이다.

북한 악단의 두 번째 공연은 강릉아트센터였다. 강릉이 어디인가. 1996년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곳이다. 이 도발로 우리 군 11명이 전사하고 27명이 다쳤다. 우리 정부는 또 다시 장소를 빌어 북한을 엿 먹인 것이다. 자, 너희 아버지가 이 곳에서 한 짓을 봐라. 김여정 아마 속으로 뜨끔했을 것이다. 조금 더 잔인한 계획이었다면 당시 공비 토벌에 나섰던 우리 군 장병들을 공연에 초대해서 일부러 김여정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앉혔을 것이지만 우리 정부는 그렇게까지 모질지는 않았다.

원수를 기리는 곳에서 잤는데 악몽들은 안 꾸셨나

북한 예술단이 묶은 장소는 광진구의 워커힐호텔이다. 6ㆍ25전쟁 당시 북한군과 맞서 싸운 월튼 워커 장군의 이름을 붙인 호텔인데 북한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조국해방전쟁’을 망친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원수다. 이 호텔에서 이들은 이틀을 묵었다. 호텔 안에는 워커 장군 추모 기념비까지 있다. 북한 예술단은 이 기념비를 여러 차례 지나쳐야 했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달동네 정부(문정부를 소생은 이렇게 부른다)는 무능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계획된 일정 아래 북한 백두 혈통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낯 뜨겁게 만들었다. 누가 뭐래도 이번 평창 외교 전쟁의 승자는 대한민국이다. 이렇게 멋진 외교전을 펼치는 정부를 그동안 비난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이 기회를 빌어 진심으로 사과하고 ‘화이팅!’을 외쳐주고 싶다. 뭐라고? 그런 의도 전혀 없었다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백두 혈통에게 정말 잘 해주고 싶었는데 그런 의미가 담긴 곳마다 초대해서 오해할까봐 갑자기 걱정이 태산이라고? 하아, 이거 참. 허어, 그거 참.

칼럼은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의 기사에서 힌트를 얻어 쓴 것입니다. 감사 드립니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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