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식 장군 서거로 또 한 시대 저물어...'도솔산 싸움'으로 해병대 無敵海兵 휘호까지 받아
68년 전 요새 속 적군 물리치려 분투한 영웅 추모하며 멜빌 '프레데릭스벅의 메어리스 하이츠를 위한 비명' 뇌어봐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공정식 장군이 서거했습니다. 이제 6.25전쟁에서 싸운 해병대 주요 지휘관들 가운데 살아계신 분들은 몇 분 안 될 것입니다. 또 한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시려왔습니다.

공 장군은 우리 마음에 ‘도솔산 싸움’과 함께 새겨졌습니다. 그는 많은 싸움들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역시 우리에겐 치열했던 ‘도솔산 싸움’에서 그가 세운 공이 부각됩니다. 아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해병대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빼놓으면, 그 싸움도 거의 잊혀진 듯합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6.25 전쟁에서 처음부터 미국 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실질적으로 1해병사단의 한 부분으로 작전하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런 인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솔산 싸움’은 1951년 6월 4일에서 19일까지 이어진 싸움이었습니다. 1951년 중공군의 공세가 실패하고 휴전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제연합군 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안정적 주저항선을 확보하는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그런 작전의 일환으로 미국 1해병사단 예하 5해병연대가 도솔산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5해병연대는 1950년 겨울의 ‘장진호 싸움’에서 장진호 서북쪽 유담리까지 진격했던 부대였습니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사단 전체가 포위되었지만, 병력에서 10배 가량 되는 중공군에게 오히려 손실을 강요하면서, 성공적으로 철수했습니다.

그처럼 강인한 부대였지만, 험준한 산줄기를 따라 지뢰들을 촘촘히 매설하고 견고한 진지들 속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결국 예비대였던 한국 1해병연대가 그 구역을 맡아 공격에 나섰습니다. 당시 연대장은 김대식(金大植) 대령이었습니다. [김 대령은 뒤에 제3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냈습니다. 당시 1대대장이었던 공정식 소령은 제6대 사령관을 지냈습니다.]

한국군 1해병연대도 처음엔 고전했습니다. 그러나 야간 기습으로 적군의 저항을 무너뜨렸습니다. 야간 전투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즐겨 썼으므로, 적군의 의표를 찌른 전술이었죠.

힘든 싸움이었던 만큼, 양측의 피해는 컸습니다. 북한군은 2천 넘게 죽고 44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한국군은 사상자는 700명 가량 되었습니다.

승전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현지까지 찾아와서 치하하고 ‘무적해병(無敵海兵)’ 휘호를 내린 일은 잘 알려졌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처럼 잘 싸우는 해병 부대가 수도권을 지켜야 한다면서,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8군 사령관에게 부대 이전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미국 1해병사단과 예하 한국 1해병연대가 서쪽 해안 지역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해병대를 서쪽 해안 지역으로 돌린 것은 군사적으로도 합리적인 조치였습니다. 해병대는 본질적으로 연안에서 활동하는 군대입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 지역에 배치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그런 비합리적 배치는 6.25전쟁 초기에 미국 1해병사단이 미국 10군 예하로 들어간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로 군대의 관료주의와 사령관들 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리지웨이나 밴 플리트도 손을 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대통령의 요청이 밴 플리트는 내심으로 반가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해병대는 대통령의 기대에 잘 부응했습니다. 수도를 노리는 중공군을 맞아 큰 타격을 입히면서, 수도로 가는 길목을 지켰습니다. 휴전이 될 때까지 이어진 이 긴 싸움은 ‘장단 지구 싸움’이라 불립니다. 바로 이 시기에 공 장군은 1연대 부연대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장군님, 미국 해병대가 실패한 작전을 한국 해병대가 완수한 비결은 무엇인가요?” 늘 궁금했던 일을 공 장군께 여쭈어본 적이 있습니다. 공 장군은 선뜻 대답했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미군의 화력 지원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 부대에 오현고 졸업생들이 많았다는 것이고.”

1연대가 도솔산 공격에 나서기 전에, 1해병사단장 제럴드 토머스(Gerald Thomas) 소장이 연대에 찾아와서 지휘관들에게 “내가 도와줄 것이 있소? 무엇이든 말해 보시오”하고 물었답니다. 미국 해병들이 실패한 작전을 아직 전투 경험이 적은 한국 해병들에게 맡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겠지요.

그러자 공 소령이 건의했습니다, “장군님, 화력 지원만 충분하다면, 저희는 목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단장은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실제로 ‘도솔산 싸움’에 관한 기록들을 살피면, 공격준비사격이 철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병대 훈련소가 제주도에 있어서 제주도 오현고 학생들이 많이 해병대에 지원했다고 합니다. 한라산의 가파른 오름들을 많이 탄 덕분에 오현고 졸업생들은 강원도의 가파른 산을 잘 탔다 합니다. 1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 24개를 점령하는 데, 제주도 건각들이 큰 몫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제 마음 속에선 공 장군께서 말씀하지 않은 부분이 – 지휘관들과 하사관들의 분투가 –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물론 공 장군 자신에겐 지휘관들의 분투는 언급할 필요가 없는 기본적 사항이었을 것입니다.

68년 전 요새 속의 적군을 물리치려고 험준한 태백산맥 줄기를 올라간 영웅들을 추모하면서, 멜빌(Herman Melville)의 <프레데릭스벅의 메어리스 하이츠를 위한 비명(Inscription for Marye’s Heights, Fredericksburg)>을 뇌어봅니다.

              큰물진 강 건너

              하늘 깃발에 눈길 준 채

              언덕을 올라

              죽음의 소란을 뚫고

              죽음까지 나아간 그들에게: 그들에게 이 비석을 –

              그들이 쓰러진 곳에 우뚝 선 –

              승리보다 더한 것의 기념비를.

 

               To them who crossed the flood

               And climbed the hill, with eyes

               Upon the heavenly flag intent,

               And through the deathful tumult went 

               Even unto death: to them this Stone –

               Erect, where they were overthrown –

               Of more than victory monument.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23)

오웰의 암울한 전망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인공지능의 발전은 대체로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술들은, 물리적 기술이든 사회적 기술이든,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구조와 특질에 따라 모습과 역사가 결정된다. 즉 경로종속적(path-dependent)이다.

정보처리를 돕는 기술들은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전을 돕는 기술들은 그런 효과가 크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와 몽골 제국의 역참 제도와 미국의 철도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은 국가의 시민들에 대한 장악력을 혁명적으로 늘릴 수 있다.

민주적 전통을 지녔고 시민들의 자유가 사회 제도들에 의해 확보된 사회들에서도 인공지능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작지 않다. 특히 시민들의 사생활이 점점 위협받는다.

민주적 전통도 없고 자유를 지키는 제도들도 약한 사회에선 시민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다. 이런 사회들에서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되면, 시민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은 더욱 커진다. 그리 멀리 않은 미래에 조지 오웰이 걱정한 국가(Orwellian state)가 실제로 나올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중국이다. 원래 전체주의 사회인지라, 그곳에선 국가 권력에 의한 시민들의 통제가 철저했다. 이제 인공지능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 모든 중국 시민들의 모든 행동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자유로운 사회를 이루었던 적이 없으므로, 중국에선 자유주의 전통이 약하고 시민들이 그리워할 자유로운 사회의 경험도 없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회교도 원주민들의 저항이 거센 신강 지역에선 이미 <1984>에서 오웰이 그린 압제적 사회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신강 지역 전체가 거대한 굴락(Gulag)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알리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한다. 그들이 소수 민족이므로, 이 일에선 공산당 정권의 압제적 정책이 주류 한족의 지지를 받는다.

근자에 나온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그런 위험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홍콩 시민들이 누리는 자유와 인권을 야금야금 갉아 없애려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행태는 마침내 홍콩 시민들의 저항을 불렀다. 걱정스럽게도, 그들을 지지하고 도와야 할 미국과 영국은 손을 놓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홍콩 시민들에 대한 지지는 미미하다. 게다가 홍콩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현수막을 중국 사람들이 훼손하고 항의하는 한국 학생들을 위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국 법을 어기고 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그런 행태에 대해 현 집권 세력은 못 본 체 한다.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우리의 주권을 크게 해치고 두 나라 사이에 건전한 관계가 나오는 것을 막는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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