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보수주의' 표방하는 트루스포럼, 하와이에서 첫 해외연수 진행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와이...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을 준비한 실험 무대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들과 진주만 기념관 둘러보고, 미국 태평양 국립묘지에 헌화하는 시간 가져
참가자들, 이승만 이라는 '기적' 있게 해준 창조주와 자유를 위해 희생한 미국 청년들에게 감사
대한민국의 역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제헌국회 1차 회의 기도로 열려

조평세 객원 칼럼니스트
조평세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8월 4일부터 9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 28명의 청년 보수주의자들이 모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대학청년단체 트루스포럼(대표 김은구)이 처음으로 진행한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트루스포럼의 열성 회원들만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권유에 마지못해 참석한 20살 대학생, 그동안 온라인 상에서 ‘눈팅’만 하다가 용기를 내어 참석한 93년생 회사원, 다음달 논산훈련소 입대를 앞두고 세계여행을 하다가 마지막 경유지로 트루스포럼 워크샵을 선택한 98년생 청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5일동안 함께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첫 4일은 무려 30시간에 달하는 집중강의의 연속이었다. 낮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정치인 양성기관인 리더십인스티튜트(Leadership Institute) 강사들의 “리더십과 전략” 강연,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는 트루스포럼 김은구 대표와 조평세 연구위원(필자)의 보수주의 강연이 이어졌다. 특히 김은구 대표는 강연을 통해 기독교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트루스포럼의 기본가치와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현재 한국 보수진영에 꼭 필요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 전략과 노하우를 전수받고, 또 한국에 여전히 생소한 보수주의의 가치관과 그 유대-기독교적(Judeo-Christian) 뿌리를 처음으로 심도 있게 공부하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 참가자는 ‘평생동안 잠을 가장 못 잤던 5일’이었다고 평했을 정도로 고강도 일정이었지만, 힘들었던 동시에 평생동안 손에 꼽을 만큼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특히 워크샵의 하이라이트였던 마지막 날 금요일 하루 동안은 호놀룰루에 남아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들과 진주만 기념관을 둘러보고 다운타운의 한국전쟁 기념비와 펀치볼(Punchbowl) 미국 태평양 국립묘지에 헌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전 무려 26년 동안 독립외교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건국을 준비했던 하와이에서, 그 발자취를 따라 우남의 독립정신과 그 기독교적 뿌리를 탐구해보고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뜻 깊은 기회였다. 그리고 진주만 기념관 탐방과 한국전쟁 기념관 및 펀치볼 국립묘지 헌화를 통해, 자유를 위한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며 현재 심각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하와이는 사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100여명의 최초 한인 집단이민자들이 1903년 정착한 곳이고 10년 뒤인 1913년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4천명 이상의 한인들이 하와이 8개 섬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해 9월부터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행한 <태평양잡지>를 보면 1916년 6월호에 하와이 한인사회에 대한 그의 흥미로운 생각이 드러난다. “이 여덟 섬에 한인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 팔도라. 장차 이 속에서 대 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십 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 되기를 기약하겠도다.” 하와이 섬은 그렇게 일찍부터 이승만에게 대한민국 건국을 준비하는 실험 무대였던 것이다.

그런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가장 중점적으로 몰두했던 활동은 한인들의 교육, 특히 기독교 교육이었다. 하와이 도착 후 이승만은 한달만에 <한국교회핍박>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단순히 일본의 한국기독교 핍박(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저술이 아니었다. 1904년 한성감옥에서 썼던 <독립정신>에서 밝혔듯이 이승만은 기독교의 교회가 개인의 교화를 통해 국민의 독립정신과 공화사상을 배양하는 곳임을 간파했다. 이승만이 <한국교회핍박>에서 밝힌 것은 바로,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이 교회를 핍박한다는 것이었다. 이 저술을 통해 결국 그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나라의 독립과 건국의 기초에 필수적임을 설파한 것이다. 이것은 토크빌이 미국 전역을 순회하고 비로소 “자유는 도덕성 없이 세워질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없이 세워질 수 없다”고 깨달은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이런 신념아래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부터 한인교회의 자립을 주장했고 결국 당시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의존하고 있던 한인교회를 분리해 내어 1918년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이 교회는 초기에 역시 이승만이 한인동포들의 기금으로 세운 한인기독학원에서 모이다가 1922년 첫 교회당을 건축하고 1937년에는 새 부지에 더 큰 교회당을 건축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특히 새 교회당 전면에는 이승만의 제안으로 광화문 문루가 가미되어 세워져 있다. 트루스포럼 청년들은 호놀룰루 투어의 첫 시간으로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세운 이 한인기독교회의 새벽예배에 참석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위한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다음 방문지였던 진주만 기념관도 사실 우남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1939년 워싱턴DC로 거주지를 옮긴 이승만은 1년 반 동안 일본의 전체주의적 야망을 고발하고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견한 <Japan Inside Out> (1941)을 집필하여 출간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결국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이끌어내어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진영의 승리와 한국의 독립과 건국을 가능하게 한 국제정치의 첫 단추와 같은 사건이었다.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선구자적 안목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외교력으로 나라의 독립과 건국을 이끌어 냈던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가 그 어느때보다 더 필요한 현재의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더욱 그의 혜안을 사모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진주만 기념관에 이어 트루스포럼은 한국전쟁 참전 미군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의 모든 주(州)에는 그 주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영웅들에 대한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하와이는 특히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기 전이었지만 인구대비 가장 많은 한국전 전사자를 배출한 곳이다. 하와이 주 의회 건물 서쪽 옆 뜰에는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456명의 하와이 출신 장병들에 대한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인지 트루스포럼 청년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노숙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오랫동안 관리가 안된 듯 나뭇가지와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트루스포럼 청년들은 누가 시킬 것도 없이 한 마음으로 기념비와 주변을 정리하고 미리 돈을 모아 준비한 화환을 헌화했다.

약 53,000명의 1,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펀치볼 국립묘지에서는, 특히 한국전쟁에서의 공으로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메달오브아너’(Medal of Honor)를 수상한 세 명의 묘비를 찾아 헌화했다. 르로이 멘돈카(LeRoy A. Mendonca) 병장과 허버트 필릴라우(Herbert K. Pililaau) 일병, 그리고 벤자민 윌슨(Benjamin F. Wilson) 소령이었다. 특히 르로이 멘돈카는 하와이 출신으로 그 이름이 의회 옆 한국전쟁 기념물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1951년 7월 4일 지천리 고지전에서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어 한 소대를 살린 공을 인정받아 메달오브아너를 사후 수여받은 인물이었다. 독립기념일에 치른 이 전투에서 전사할 당시 그는 19살이었다.

이 세 명의 묘비를 찾기 위해 참가자들은 수많은 묘비들을 지나가며 한국전 희생자들의 이름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 한번도 자신의 고향 마을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새파란 젊은이들이었다. 묘비 하나 하나 새겨진 이름이 누군가의 아들, 형제, 남편, 아버지일 것을 생각해보면 그 희생의 무게가 결코 만만치 않다. 워싱턴DC의 한국전 기념공원에 적혀 있듯이, 그들은 정말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꽃다운 젊은 목숨을 바쳐 희생한 것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5일간의 배움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참가자들이 나눈 공통적인 소감은 결국 ‘감사’였다. 먼저 이승만이라는 세계사에 기록될 ‘기적’을 한국에 배풀어주신 창조주의 섭리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삶과 생명을 불태운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 청년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공감은 그 위대한 역사 앞에 선 우리의 겸손과 반성이었다. ‘망해봐야 알지,’ ‘이 나라는 안돼’ 등 홧김에 내뱉았던 빈정 섞인 말들이 사실은 이 위대한 역사 속 희생들을 헛되게 하고 우습게 만드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비록 눈앞의 현실은 암담하더라도 선대의 위대한 희생과 고귀한 유산에 감사한다면, 그러한 낙담과 자포자기도 사실 사치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이 나라의 현실을 개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핏 값으로 얻은 이 나라를 끝까지 각자의 주어진 자리에서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다짐해야 마땅하다.

부모님께 등 떠밀려온 20살 막내 참가자도 이날 어머니께 트루스포럼 워크샵에 보내준 것에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트루스포럼 워크샵 참가자들이 마지막 날 체험한 이 ‘감사하는 마음’은 사실 첫 4일동안 배운 보수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저명한 보수주의 칼럼니스트인 조나 골드버그(Jonah Goldberg)는, 보수주의를 단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gratitude’ 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보수주의의 핵심가치인 자유는 결국 그 자유를 부여한 창조주의 섭리에 대한 인정과 감사, 그리고 책임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성감옥에 갇혔던 이승만이 <독립정신> 말미에 “사람마다 두려운 마음으로 악을 짓지 못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은 진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보수의 정신은 결국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회의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로 시작했던 대한민국 역사를 연 것이다. 그 해 8월 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한 후, 일흔 하고도 한 해를 넘어가는 2019년 오늘, 역사의 주관자 앞에 감사와 간구를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조평세 객원 칼럼니스트(트루스포럼 연구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