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도력의 위기에 관한 근원적 성찰
-우파는 反共을 國是로 삼되 反共은 反北으로, 국시는 우파 국시로 부르자
-反北을 大同으로 삼되 다른 小異는 포용하자

강 위 석(언론인. 전 월간 에머지 대표이사)

시간이라는 것은 진화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진화는 물리학 용어를 빌리면 작용과 반작용의 동학(動學)적 계기(繼起)다. 변증법 용어를 쓴다면 작용은 테제, 반작용은 안티테제다. 생물학적으로는 돌연변이와 자연의 선택이 각각 여기에 해당하겠다.

진화의 시작은 돌연변이(변화)다. 그 다음에 이 돌연변이를 자연(환경)이 어떻게 받아 주느냐가 따른다. 진화 자체는 좋은 진화가 있고 나쁜 진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진화는 가치에 중립적이다. 다만 돌연변이의 결과 중에는 자연의 선택을 받아 그 개체나 종(種)을 번창하게 하는 것이 있고 자연의 버림을 받아 빨리 멸절(滅絶)되게 하는 것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지금 위기에 빠져있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의 운명과 관련지어 쓴다. 경제적으로는 자유 시장의 효율성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나는 내 개인과 가족의 삶의 환경으로서, 그리고 한 시인의 창작 활동의 환경으로서 염두에 두고 바라본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 나의 입지(立地)는 개인과 문화다.

박정희는 5.16 혁명 공약의 첫 조항에서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간접침략을 분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된 이승만의 정치적 목표를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정신이었다.

이승만은 남한 인민을 위한 자유민주주의를 남한의 분리 독립으로 구체화하였고 박정희는 그것을 반공이라고 재확인한 것이다. 사실 남한의 탄생과 존립의 정당성은 반공 이데올로기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어쨌거나 이승만이 견지했던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박정희가 훌륭하게 계승하는데 성공한 것이야말로 현대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권력(줄여서 북이라 부르겠다.) 아래로 편입되지 않고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그 제일의(第一義)다. 공산주의가 반(反)자본주의인 것과 같은 이치로 자유민주주의는 반(反)공산주의인 것이다.

조선을 차지하려고 벌어졌던 청일(淸日), 노일(露日) 전쟁을 2, 30대 청년기에 목도한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눈에 1945년 세계 2차 대전 종전이 가져 온 가장 긴박한 테제는 ‘아시아 공산화’였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이미 중국의 공산화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조선의 공산화는 대세로 보였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이른바 남북정치협상을 통해 새 나라의 이념과 정부 형태를 결정하자는 것이 대중적으로 쉽게 어필했던 대목이다. 이승만을 그걸 거부했기 때문에 위대한 정치인,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남아있다. 당시 이른바 대세의 흐름이라는 걸 그냥 놔두면 모택동 식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흘러갈 것을 가로 막고 자유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2차대전 종전 후의 소련과 공산주의는 인류의 대의(大義)를 모두 독점한 듯 보였다. 자연의 선택을 듬뿍 받은 돌연변이로서 등장하였다. 반(反)제국주의 투사, 평화의 사도, 평등의 실천자, 산업화의 챔피언 등…. 이 가운데 오늘날 와서 기이하게 들리는 것은 마지막에 든 산업화의 챔피언이다.

소련제국이 해체되기 직전인 1986년 당시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블라디보스톡 연설에서 소련의 실패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 경쟁에서 패배한데 있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특히 사회주의 경제는 기술발전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한두 세대 전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이루어진 이른 바 비교경제학 연구들에 의하면,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1920년대와 1930년대 당시 두 후발공업국인 스탈린 치하의 소련경제가 같은 시기의 일본 경제보다 더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2차대전 이후였다. 진화는 자체의 실상을 드러내기에 앞서 한참 뜸을 들이는가 보다. 고르바초프의 말대로 공산주의 계획경제는 개인의 창의력과 시장의 테스트가 합작하여 만들어 내는 기술 발전을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1945년 당시 공산주의와 소련은 열렬한 반일(反日)투사였던 이승만에게 또 다른 제국주의, 또 다른 침략자로 보였을 것이다. 한일합방 때에는 대세(테제)였던 일본의 식민지에 편입되기 보다는 상해에다 피난살이 임시정부를 차리는 데 가담한 그였다.

시대가 변하여 이번에는 소련과 공산주의가 대세로 등장하였더라도, 그리고 통일이 민족의 숙원이 되었을지라도 통일되어 공산주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 보다는 남한 단독 정부를 차리고 인민의 자유를 확보하자고 생각한 것은 그에게는 당연하였다.

분단된 반공 정부를 세울 수 있는 환경적 호(好)조건도 충분했다. 다름이 아니라 북한에는 소련이 진주하고 남한은 미군이 점령했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반공은 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고스란히 분단되어 독립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과 거기서 받은 고등교육을 통하여 미국이 소련에 비하여 경제, 정치, 문화, 이 모든 면에서 월등한 성공을 거두고 있음과 그 원인은 자유민주주의 생활방식과 제도가 공산주의의 그것이 비할 바 없이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공 대한민국을 세운 것은 민족에 대한 반역이기는커녕 지금 와서 보면 민족을 살리고 융성시키는 위대한 사상이었고 결단이었고 지도력이었다. 북이 한국 민족에게 가져다 준 것은 전쟁, 빈곤, 폭정 밖에 더 있었는가. 남한 좌파의 엉뚱한 주장과 달리 분단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남한이 아니라 그들이다. 그들 쪽에서 실패를 자인하고 물러선다면 독일의 경우와 같이 통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화 역사를 말할 때 빼어 놓지 못 할 것이 6.25 전쟁이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부장관 애치슨이 이른 바 애치슨라인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미국의 서태평양 방어선을 표시한 것으로서 일본과 필리핀은 포함되고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북은 전면적 대규모 6.25 남침 전쟁을 터뜨렸다. 남한에 생긴 방어력의 공백을 본 것이다. 6.25는 북이 기회만 있으면 남한을 전면전을 무릅쓰고 침략할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다. 북은 이 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북에게 남북통일은 남한 공산화의 위장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평화, 통일, 자유는 각각 전쟁, 분단, 공산의 반대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평화다. 남북은 세 가지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남북이 각자 독립국으로서 정치적 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강박관념 없이 서로 수교하고 양국 인민의 여행과 교류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공존이다. 그러나 6.25 전쟁이라는 지나간 거울을 보건대 북은 이런 상태를 만들지도, 유지하려 들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남한은 이런 평화공존을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남북한 둘 가운데 하나가 쉽게 말하면 자멸하여 다른 쪽으로 안겨 오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적 흡수통일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경우가 얼추 이와 같았다. 김일성 사후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이 북한이 경제 실패로 인하여 이와 같이 자멸하는 것을 꿈꾸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남한도 박근혜 탄핵 시기를 전후해서부터 정치혼란 때문에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박정희가 말한 북의 간접침략이 틀림없이 개입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큰 이것이 우파의 자멸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한 편 지금 북도 핵과 미사일 실험 강행 때문에 국제적 재제로 인한 경제 파국의 길로 들어섰다.

흡수 통일을 이루는 데는 한 쪽의 자멸 외에도 다른 쪽의 막대한 흡수 능력이 있어야 한다. 통독의 경우에는 서독에게 이런 흡수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환경의 축복도 있었다. 동독의 막강하던 후견국이던 소련이 이때쯤에는 해체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북의 후견자인 중국의 기세는 아직 성장하는 국면에 있다. 북이 자멸하면 중국이 받아 갈 수도 있다. 하회가 어떻게 될지는 역시 진화론적 문제일 것이다.

셋째는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가 한국의 통일을 가져 올 확률은 50% 이하다. 6.25 전쟁은 통일을 가져오지 못 했다. 국지전으로만 끝났다. 지금 남북 간 전쟁이 벌어지면 세계대전으로 번질 확률이 대단히 커 보인다.

민족의 통일이라는 화두는 약간의 북 장단만 곁들여도 분단된 나라 인민의 피를 끓게 한다. 많은 사람들을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만들고 자기가 속하는 민족을 개인의 유일한 아이덴티티로 삼도록 한다. 20세기에는 민족주의만큼 호소력이 큰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적으로 없었다.

민족 통일은 민족 해방(National Liberation, NL)과 짝을 이룬다. 북은 민족 통일과 민족 해방을 가지고 남한 인민의 자유주의 정신을 마취 혼미 시키고 남한에다 반일(反日)은 물론 반미(反美) 감정까지 심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북의 남한 공산화 통일 전술의 일환이고 간접침략인 것이다.

이승만이 재임 중이었던 1958년경에 이르러 남한의 생산능력은 6.25 전쟁의 복구를 끝내고 전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1958년에 이르면 물가가 하락하고 경기는 후퇴기에 들어갔다. 실업이 늘어나고 인민은 사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50년 3.15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자유당의 전국적인 대규모 부정선거가 야당 참관인에 의하여 발각되었다. 이것이 4.19혁명을 일어나게 하였다. 이 혁명이 가지고 온 정치와 사회 혼란은 북에게는 남한을 향한 간접침략의 또 하나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 때 자신이 공산주의자였고 군에서 정보를 다루었던 박정희는 이 사회혼란이 북의 간접침략에 의한 것이라고 간파하였고 과감히 혁명 공약 1항에서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고 명쾌하게 못 박았다.

자유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서 군사 쿠데타를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4.19 혁명 후 한해 남짓 동안 엄청나게 커져 가던 친북 내지 종북 목소리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군사쿠데타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의 생명을 최후의 순간에 구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중(1961~1979) 한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취를 해석하는 눈은 여러 가지다. 우파 가운데도 국가주의적 우파와 자유주의적 우파는 다르게 본다. 국가주의적 우파는 이 기간의 경제적 성공이 거의 전적으로 박정희와 그 행정부 및 관료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박정희‘덕분으로(thanks to)’ 한국민이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우파는 경제 성장의 중심축은 시장에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개입이나 간섭이 개재되면 아무리 잘 해도 시장에 맡겼을 때 보다는 못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간섭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한국 경제가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한국경제의 성공이 ‘박정희 덕분’이기도 하고 ‘박정희에도 불구하고’이기도 하다고 본다. ‘덕분’은 정부의 경제 정책 덕분이 아니라 국시(國是)였던 반공과 간접침략 분쇄 덕분이었다. 만일 4.19 직후의 혼란이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시장 경제 자체가 작동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 국시‘덕분’이 총 성공의 8할 쯤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남한의 국민총생산은 지금 북의 그것의 40배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지금 남한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위기(crisis) 단계를 지나 이미 재난(catastrophe) 속에 들어 가 있다. 이 재난은 본질적으로 남한 우파의 실패에서 왔다. 결코 여느 좌파나, 나아가서 종북적 좌파의 성공 때문도 아니다. 북의 힘 때문은 더욱 아니다. 북이 새로 들고 나온 핵 탄두나 미사일도 상수(常數)이지 돌연변이는 아니다.

문제는 북의 이 상수에 반작용할 남한 우파의 상수인 이데올로기와 지도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남한 우파의 이데올로기는 자유민주주의다. 박정희는 남북의 적대적 대치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구체화하여 반공이라 부르고, 이데올로기란 말 대신에 격을 한참 높여 국시(國是)라고 불렀다.

지도력의 상실은 이데올로기의 상실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일는지 모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마도 유일한 허물도 지도력의 상실이었을 것이다. 김무성, 홍준표, 유승민,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도 지도력을 던져 버리고 소영웅주의에 빠져 우파의 분열을 내부에서 만들었다.

우파의 재건에는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우파는 다시 반공을 국시로 삼아야 한다. 다만 ‘반공’ 대신에 ‘반북’으로 고치고, ‘국시’는 ‘우파 국시’로 말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 한다.

우파가 개헌을 주도할 수 있는 때가 오면 ‘통일이 달성되기까지 반북을 국시로 한다’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맹서가 필요하다. 우파는 철저한‘반북’을 대동(大同)으로 삼되 다른 소이(小異)는 서로 포용하는 것을 지도력의 근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반북이 그리고 반북만이 남한 우파의 아이덴티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위석(언론인, 전 월간 에머지 대표이사)

*이 글은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에서 펴내는 계간 <박정희정신>에 게재됐던 원고입니다. 저자의 양해를 받아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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