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문재인 대통령의 친북·친중·반일·반미 외교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 고립무원의 신세다. 러시아·중국 군용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하고, 북한이 신형 미사일과 핵폭탄으로 위협하고, 일본이 한국을 무역 보복해도 속 시원히 대응할 수단과 방법이 없다. 북한이 스스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거두어주길 정화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것 외에 무슨 대응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하릴없이 거북선횟집이나 찾고, “아직도 우리에게 12척의 배” 운운할 때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여, 제발 박정희를 배우시기 바란다. 적폐는 박정희가 아니라 바로 풍성한 말잔치로 국민을 호도하고 실제로 나라의 안보를 담보할 수단이나 방법론은 없는 당신들이다. 당신들이야말로 NATO(No Action, Talk Only)라 불리는 시대착오적 돈키호테들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에서 시도지사 회의에 참석한 후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날 회의 끝나고 점심식사를 한 장소가 거북선횟집이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에서 시도지사 회의에 참석한 후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이날 회의 끝나고 점심식사를 한 장소가 거북선횟집이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24일 부산을 방문, 누리마루 APEC 하우스에서 열린 규제자유특구 관련한 전국 시도지사 간담회에 참석했다. 행사를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전국 시도지사들과 오찬을 했다. 장소가 하필이면 거북선횟집이었다. 대통령 점심식사 장소는 청와대 대변인이 올린 SNS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뭐 점심 한 끼 식사장소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 날 문재인 정부의 국가안보실장 정의용이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면담하는 사진이 공개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북선 모형이 놓여 있었다. 언론들은 ‘한미 안보 수장 사이의 거북선’ 운운하는 보도를 냈다.

왜 하필 이 비상시국에 ‘거북선’을 계속 발신하는 것일까? 사정과 이유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금 대통령이 거북선 타령하고 다닐 때인가? 일본이 무역보복을 감행하여 기업들이 초죽음 일보 직전이다. 경제 위기가 얼마나, 어디까지, 언제까지 심화되어 국가가 고꾸라질지 모르는 엄중한 상황 아닌가. 러시아와 중국 군용기의 독도 영공 침범, 한국 공군기의 위협사격, 일본은 “독도는 우리 영토” 발언, 북한 김정은의 SLBM 발사용 3000톤 급 신형 잠수함 공개, 또 다시 미사일 도발….

일촉즉발의 국가 안보 및 경제 위기 경보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비상 상황이란 사실을 대통령은 알고나 있나? 엊그제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사람은 동학을 연상케 하는 ‘죽창가’를 외치고, 대통령은 거북선횟집서 식사를 한다. 김정은을 위인으로 떠받드는 자들이 일본 언론사 한국지부에 난입하여 시위를 한다. 국가안보실장은 미국 정부로부터 호르무즈 해협 해상 안보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위한 한국군 파병 요청을 받는 자리에 거북선을 소도구로 동원했다.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언행은 천금보다 무거워야 한다. 이 절체절명의 난국에 이 나라 국가지도부가 쇼나 다름없는 행위로 국민들을 선동 자극하고, 눈과 귀를 가린다고 해서 근본적인 위기가 사라진다고 믿는 것일까?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의 SNS에 대통령의 점심식사 장소로 공개한 횟집.(사진 연합뉴스 제공)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의 SNS에 대통령의 점심식사 장소로 공개한 횟집.(사진 연합뉴스 제공)

박정희였다면 이 난세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경제 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이 안보 위기다. 안보를 실수하면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다. 자나 깨나 국가안보에 모든 역량을 다 바쳤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의 안보철학은 지극히 간단했다. “타국을 침략할 정도의 군사력까지는 필요하지 않지만, 적국이 우리를 먹으려고 드는 경우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공격 자세를 취할 정도의 자위력은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박정희 식 자주국방론의 핵심이다. 남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도발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고슴도치론’이다. 그의 자주국방 철학도 간단했다. 자기 집에 불이 나면 무조건 그 집 식구들이 먼저 불을 꺼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발언이다.

“자주국방이란 이를테면 자기 집에 불이 난 경우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총동원돼 불을 꺼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이웃 사람들이 달려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 주고 소방대가 달려와 지원도 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도 그 집 식구들은 끌 생각을 않고 이웃들이 도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소방대가 와서도 기분이 나빠 불을 꺼줄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이 총동원돼서 꺼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1972년 연두 기자회견)

1968년 1월 21일,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 북괴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 바로 옆까지 침투하여 비상이 걸렸다. 주한미군이 경비하던 휴전선 지역이 북한 게릴라들에게 뚫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박정희는 한밤중에 전화로 포터 주한미국대사를 호출했다.

박 대통령은 포터 대사에게 “대북 보복을 위해 이틀 내에 평양에 결사대를 보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포터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으나 미국은 동조할 수 없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즉각 국방부장관과 각 군 참모총장을 불렀다.

국군통수권자인 박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권이 유엔군에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에게 있다. 우리도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보복을 위한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본 스틸 유엔군 사령관은 공군 고문관으로부터 한국군이 대북 보복 공격을 위해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본 스틸 사령관은 한국 공군참모총장에게 “한국군이 작전권을 무시한다면 미군 철수를 고려하겠다”고 알렸다.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진지 48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동해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미국 해군의 정보수집선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다. 이번에도 미국은 사건을 흐지부지 덮으려 했다. 미국은 한국군과 미군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수행 중인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긴장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은 국군의 단독 행동을 막기 위해 국군에 대한 유류 공급을 중단했다.

박정희의 대북 보복 막기 위해 특사 파견한 미국

분노가 폭발한 박정희 대통령은 2월 8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김일성이란 자는 해적이자 도둑놈이다. 그는 함정을 납치하고 청와대를 습격한 범죄자”라며 2시간 30분 동안 강력 항의했다. 포터 대사는 이날 박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미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통령은 2시간 반에 걸쳐 그 동안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지금까지는 한국 정부가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높기도 하거니와,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할 경우에는 잠자코 가만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 정부는 만약 박정희가 대북 보복공격을 진행할 경우 미국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는 한국군 참모총장들을 설득하여 대통령의 명령에 ‘불복종’하도록 만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박정희가 미국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북 보복공격을 감행하려 할 경우 쿠데타를 일으켜 박정희를 제거할 수도 있음을 밝힌 것이다.

미국 정부는 사이러스 밴스 특사를 서울에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 자리에서 밴스 특사가 한국군의 대북 보복작전을 반대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주월 한국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말했다. 밴스 특사는 “그렇다면 우리도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벤스 특사는 서울 방문 후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귀국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한국군이 DMZ를 넘어가 북한군을 응징한 사례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국방장관이란 사람은 정말 위험한 인물입니다. 휘하에 엘리트 침투부대를 조직해서 국경을 넘어 북한 지역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남침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대북 보복공격 사실은 밴스 특사의 보고에 그 내용이 보다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보고서 내용에 의하면 지난 7개월간 한국군은 월 평균 2회 꼴로 대북 보복작전을 수행했다. 12명의 한국군 특수대원은 1967년 11월 휴전선을 넘어가 인민군 사단사령부를 폭파하고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전원 생환했다. 한국 정부도 자체 침투부대를 운용 중이며, 그중 일부가 DMZ를 넘어 북한을 습격했다는 것이다(송승종, 『미국 비밀해제 자료로 본 대통령 박정희』, 북코리아, 2015, 306~307쪽).

밴스 특사는 “한국인이라는 인종 가운데는 비둘기나 매는 거의 없고, 온통 호랑이들뿐인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서울 방문 소감을 밝혔다.

이진삼 대위의 대북 응징작전

밴스 특사 보고서에서 언급되어 있는 1967년 11월 인민군 사단사령부 습격사건을 직접 지휘한 인물은 당시 방첩부대 대위였던 이진삼(후에 육군참모총장·자유선진당 의원 역임)이었다.

1967년 인민군이 휴전선을 넘어와 우리 군 GP를 잇따라 습격하고 주한미군 막사를 파괴하는 등 수없는 군사 도발을 감행했다. 이진삼 대위는 북에 대한 응징작전을 위해 무장공비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전향한 사람을 훈련시켜 특공대를 조직했다.

제1차 응징보복작전은 1967년 9월 27일 시행되었다. 이날 이진삼 대위와 특공대원 김상혁·백태산·김의행 등 4명은 강원도 화천군 원동면 날근터 아군 7사단 경비지역에서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침투했다. 특공대는 고무튜브를 이용하여 북한강 금성천을 도하, 용호마을 우측으로 빠져나가 인민군 13사단 쪽으로 향했다. 특공대는 지뢰 설치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인민군 군관(장교) 1명을 포함한 13명의 인민군을 사살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제2차 작전은 17일 후인 10월 14일 전개되었다. 침투 장소는 1차 작전 때와 비슷한 강원도 화천, 아군 7사단 경비지역이었다. 북한에 침투한 이진삼 대위와 특공대 3명은 새말과 피루개 사이의 소성동에서 금성천을 도하, 광대골 서쪽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하지만 2차 작전은 인민군이 곳곳에 매설해 놓은 지뢰와 경계병력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했다.

제3차 작전은 1967년 10월 18일 진행되었다. 침투 예정지역은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의 베티 고지로 바꾸었다. 이진삼 대위가 지휘하는 특공대 3명은 인민군 689GP의 내무반에 수류탄 8발을 투척하고 기관단총 사격으로 GP를 완전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적 20명을 사살했으나, 총격전 도중 특공대원 김의행이 적이 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진삼 대위의 적진 침투 응징작전은 10월 24일 오전 11시, 청와대에 보고되었다. 이날 이진삼 대위가 방첩부대장 윤필용 장군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 박정희 대통령에게 적진 침투 응징작전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이 장면은 이진삼 장군의 자서전 『별처럼 또 별처럼』 내용을 인용한다(이진삼, 『별처럼 또 별처럼』, 황금물고기, 2016, 130~132쪽).

<박 대통령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러면서 탁지 위에 놓인 보고서의 첫 장을 뒤적이며 “고향이 부여…” 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네, 충청남도 부여입니다. 나이는 서른 한 살입니다.”

“결혼했구먼, 딸린 식구가….”

대통령의 말이 끝나기 전, 윤필용 장군이 끼어들었다.

“이 대위가 곧 셋째를 볼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 대통령은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수고했어. 작전도 작전이지만 공비들을 포섭해 역이용한 발상이 좋았어. 이제 그만해, 명령이다. 베트남은 다녀왔나?”

“예. 맹호부대 기동대장으로 다녀왔습니다.”

내 말에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 서랍에서 봉황이 그려진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빳빳한 500원권 지폐가 빼곡이 들어 있었다. 뒷면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대통령이 지금 거북선횟집이나 다닐 때인가?

두 손으로 봉투를 받은 나의 정복 상의 견장을 손으로 다독이던 박 대통령은 되뇌듯 “앞으로 군 생활 잘 해서 장군 돼야지” 하고는 윤 장군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이 대위를 잘 돌봐줘요”라며 당부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윤 장군과 내가 동시에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내 키가 작아 보였는지 박 대통령이 물었다.

“이 대위, 자네 키가 몇인가?”

“네. 165cm입니다.”

“그래, 나보단 1cm 크군. 몸무게는?”

“네, 63kg입니다.”

“날쎄 보여.”

박 대통령과의 대화는 짧지만 강렬했다.>

박정희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벌어진 후 ‘제2의 국군’인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이들을 무장시키기 위해 ‘번개사업’을 통해 국산 병기 및 지대지 미사일, 핵폭탄 개발에 돌입했다. 목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한국군 전투부대 2개 사단을 베트남에 보내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19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에게 함락되면서 패망했다. 안보 환경이 점점 위태롭게 되자 박정희는 초당적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1975년 5월 21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이날 박정희는 김영삼 총재에게 북괴의 남침준비 현황 및 휴전선 부근에 병력을 전진 배치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안보와 관련한 야당의 초당적 협력을 당부했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의 안보관은 박정희의 절박함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대한민국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 한 북한의 남침은 없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남침 위협을 과장하여 유신독재를 이어가는 것을 막는 일이다. 민주주의 체제로의 복귀를 위해서는 유신헌법 폐기가 급선무다. 독재자 박정희는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무기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미국에 호소하여, 미국의 압력을 통해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는 유신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

향토예비군 폐지, 군비 감축 주장한 김대중

이런 입장이었기에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선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현역병 15만 명 감군, 미·일·중·소 등 4대국에 의한 한반도 안전보장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금 한국은 문재인 대통령의 친북·친중·반일·반미 외교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 고립무원의 신세다. 러시아·중국 군용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하고, 북한이 신형 미사일과 핵폭탄으로 위협하고, 일본이 한국을 무역 보복해도 속 시원히 대응할 수단이 없다. 북한이 스스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거두어주길 정화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것 외에 무슨 대응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하릴없이 거북선횟집이나 찾고, “아직도 우리에게 12척의 배” 운운할 때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여, 제발 박정희를 배우시기 바란다. 적폐는 박정희가 아니라 바로 풍성한 말잔치로 국민을 호도하고 실제로 나라의 안보를 담보할 수단이나 방법론은 없는 당신들이다. 당신들이야말로 NATO(No Action, Talk Only)라 불리는 시대착오적 돈키호테들 아닌가.

나라 망하는 것도 모른 채 지도층이 음풍농월하고 있으니, 또다시 의병들이 죽창 들고 봉기하여 핵 미사일, 잠수함과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죽창 들고, 총알 피해간다는 부적 가슴에 붙이고 최첨단 무기를 향해 자살 돌격하다 개죽음 당하는 것은 동학운동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은가? 대체 국민들이 얼마나 더 죽어나야 이 나라 지도층들 정신을 차릴까....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