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시위는 체제전쟁의 신호탄
입헌자유주의와 공산전체주의의 대립
홍콩시민들과 자유의 연대를 이뤄야

송재윤(맥매스터 대학 교수)
송재윤(맥매스터 대학 교수)

2019년 홍콩에서 부는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불어가는 바람일까? 거세게 일지만 힘없이 사라지는 아닌 밤 돌개바람일까? 산을 허물고 물길을 바꾸는 희귀성 슈퍼태풍일까? 그도 아니라면 해마다 찾아오는 아열대의 계절풍일까? 종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홍콩의 미래에 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홍콩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선 세계사의 큰 판도를 읽어야 한다. 어쩌면 이번에 홍콩에서 일어난 자유혁명의 마파람은 중국을 바꾸는 허리케인이 될 수도 있다.

홍콩의 자유화 운동

2019년 6월 15일 주최 측 추산 2백만 명의 홍콩시민들이 이른바 “반송중”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시위가 동력을 잃으리란 전망이 우세했지만, 7월 21일 일요일 홍콩에선 40만이 넘는 시민들이 또 다시 노골적인 반중구호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바로 그날 홍콩의 한 지하철역에서는 백색 티셔츠 차림의 폭력배 수백 명이 시민들에 곤봉을 휘둘러 46명이 다치고 1명이 위중한 상태라 한다. 그 배후는 한 친중파 입법의원이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왜 홍콩 시민들은 중국으로의 범인 인도를 반대하는가? 중국의 공산당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홍콩과 중국 사이에는 현재 범인인도조약이 없다. 특히 도주범인 관련 인도 조약이 없는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중국 정부는 해외에 체류하는 수배자들을 직접 납치해서 자의적으로 억류하기도 한다. 2015년 스웨덴 국적의 홍콩 출판업자 계민해(桂敏海, 1964-, Gui Minhai)는 태국의 자택에서 납치되어 중국으로 끌려갔다. 2017년 1월 캐나다인 화교 출신 억만장자 초건화(肖建华, 1972-, Xiao Jianhua) 역시 납치된 후 2년 넘게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억류된 상태이다. 무엇보다 이런 납치 행위가 중국정부의 승인 아래 행해진 국가적 조치라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중국에서 홍콩의 범인들을 데려다 중국의 법정에 세운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홍콩 시민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표현, 집회, 결사, 출판, 언론, 양심의 자유가 침해당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반중 자유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는 홍콩의 정치 활동가들은 중국 정부의 위협에 직접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스페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중국과의 범인 인도 조약을 거부하고 있다. 최근 호주가 중국과 범인 인도조약을 체결하려 했으나 법률적 검토 후에 그 계획을 철회한 바 있다. 성난 홍콩의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못할 듯하다. 이제 친중파 정치인이 시위진압에 깡패까지 동원했다면, 홍콩시민들의 자유화 투쟁은 더욱 격한 양상을 보일 전망이다.

 

“반송중(反送中),” "No Extradition to China"

 

“반송중”(反送中)의 의미

현재 홍콩 시민들은 “반송중”(反送中)이란 구호를 내걸고 있다. “반송중”이란 석 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의 현실에서 “반송중”은 일단 “중앙정부 송환 반대”를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 중앙정부의 최고인민검사원(最高人民檢查院)에의 범죄용의자 송환 반대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번 홍콩의 시위는 홍콩특별행정구의 기본법에 따라 자치정부의 자율권을 보장받으려는 소극적 운동일 수 있다. 2047년까지 완전히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홍콩의 시민들은 북경의 중앙정부와 밀고 당기는 협상을 진행 중이라 볼 수 있다.

“반송중”은 그러나 “중국 송환 반대”란 의미가 더욱 강하다. 실제로 홍콩시민들은 영어로 “No Extradition To China”란 구호를 들고 있다. 홍콩은 중국의 일부이다. 홍콩 시민들이 “중국”에 범죄인을 보내지 말라 한다면, 곧 홍콩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양국양제(兩國兩制)라는 말인가. 46세 이건룡(李健龍, Lee Kin-long)씨는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는 결코 두 눈을 뜨고 중국이 우리의 자유를 침식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한 20대 여성은 길거리 인터뷰에서 영어로 부르짖었다. “우리는 독립을 원한다! (We want independence!)” 많은 홍콩 시민들은 실제로 홍콩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결국 “반송중”이란 홍콩 독립의 염원을 담은 反독재, 反전체주의 反중국의 구호이다. 이 세 글 자 구호 속에 “자유”의 핵탄두가 내장되어 있다. 이번 홍콩 시위는 전 중국의 자유화를 이끄는 체제 변혁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시민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홍콩독립(Hong Kong Indepence)"의 구호가 적혀 있다.

 

 

홍콩시위는 체제전쟁의 신호탄

현재 중국의 인권 상황은 점점 더 열악해지는 추세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공산당 일당독재의 강화에 기여한다. 오늘날 중국에선 QR코드, 바이오-매트릭스, 홍채인식, 인공지능, 빅 데이터 등등 최첨단 디지털 감시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개인 관련 모든 정보를 통합한 당안(檔案) 체제를 구축해 왔다. 초등학교 성적표부터 인터넷 댓글까지 다 모아서 개개인의 사회신용등급을 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강(新彊) 지역에선 이미 백만 명 이상의 위구르족 무슬림 교도들이 감금되어 사상개조를 강요받고 있다. 요컨대 오늘날 14억 중국인들은 현재 중국공산당 정부에 자유를 빼앗긴 상태이다. 

반면 홍콩은 어떠한가? 아편전쟁 이후 150년 간 영국의 통치를 받는 과정에서 홍콩은 자유주의의 허브로 성장했다.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 1912-2006)은 홍콩을 자유시장경제의 상징이라 칭송한 바 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홍콩은 고전경제학적 불간섭주의(laissez faire)의 세계사적 실험이 이뤄진 곳이다. 홍콩의 시민들은 최대한의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 동시에 표현, 언론, 집회, 결사, 양심,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누렸다. 물론 영국 정부가 홍콩의 총독을 직접 지명했다는 점에서 홍콩 시민들의 참정권은 제약되어 있었다. 때문에 홍콩은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체험했다. 1997년 중국으로 이양되기 전까지 홍콩의 체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입헌자유주의(constitutional liberalism) 체제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결국 2019년 홍콩의 자유화 시위는 타협 불가능한 두 체제 사이의 격돌이라 할 수 있다. 입헌자유주의와 공산전체주의의 싸움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이 두 체제가 맞부딪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여전히 관찰자들 사이에선 2019년 홍콩 시위 역시 2014년 우산혁명처럼 차츰 동력을 잃으리란 전망이 있지만,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200만이 운집한 미증유의 시민운동은 거대한 지진처럼 길고도 강렬한 여진을 남긴다. 겉으로 멀쩡해 보일지라도 일당독재의 제방엔 이미 실금이 생겨났다. 시간이 갈수록 실금은 더 벌어져 큰 틈이 될 수밖에 없다. 거시적으로 이번 홍콩시위는 새로운 자유중국을 여는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홍콩은 혁명의 메카

홍콩은 공산당 일당독재 하의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자유주의의 아성이다. 1997년 이양 합의에 따라 중국과 홍콩은 2047년까지 50년 동안 1국가 2체제로 불편한 공존을 이어가야만 한다. 과연 2047년까지 홍콩은 중공정부의 계획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개 도시로 귀속될 수 있을까? 오히려 전 중국 대륙이 홍콩과 같은 자유주의 체제로 변혁될 가능성은 아예 없을까? 세계사를 돌아보면,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사례도 얼마든지 보인다.

청나라 말기 홍콩은 중국사에서 2천 년 동안 지속됐던 황제지배체제를 종식한 공화국 혁명의 메카였다. 1895년 민국혁명의 아버지 손문(孫文, 1866-1925, Sun Wen)은 홍콩을 기지 삼아 첫 번째 무장봉기를 시도했다. 광동성의 성도 광주(廣州)를 함락하려는 이 계획은 정보의 유출로 미수에 그치고 만다. 청조의 압박 하에서 홍콩 정부는 손문을 추방하지만, 그는 해외를 떠돌며 공화혁명을 이어갔다. 결국 홍콩에서 일어난 혁명의 마파람이 황제지배체제를 무너뜨리는 공화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중국공산당 정부의 위력을 인정하며, 홍콩의 자유화 운동을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왜 손문은 홍콩에서 공화혁명의 도화선을 당겼을까? 홍콩은 자유세계의 관문이면서 동시에 화교세계의 네트워크의 절점(節點)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홍콩도 다르지 않다.

대륙의 중국인들과는 달리 홍콩인들은 열린 세계의 자유인들이다. 영어에 능통한 홍콩인들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빨아들인다. 자유와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선양한다. 공산당 일당독재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중국 전체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표면상 홍콩은 인구 8백만의 작은 섬이지만, 실은 전 세계로 열려 있는 중국 자유화 혁명의 메카이다. 현재 구미 뿐 아니라 자유진영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이 홍콩의 자유화 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동남아, 아메리카 대륙, 유럽의 5천 만 해외중국인교포들 역시 대부분 홍콩인들의 편이다.

홍콩에서 일어난 혁명의 마파람은 과연 중국의 자유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단기전망은 어두울 지도 모르지만, 장기전망은 매우 밝다. 프랑스 혁명 이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자유라는 “바이러스”는 흑사병의 전파력을 가지며, 자유의 파괴력은 핵폭탄의 위력을 발휘한다. 홍콩의 자유화 운동이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다.

반독재 투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한 한국인들은 홍콩의 시민들과 자유의 연대를 이뤄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친중(親中) 사대주의를 버리자. 유감없이 홍콩의 자유혁명을 지지하자. 그것이 바로 세계시민의 정도이다.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관련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