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징용 문제 해법 오도는 근대사를 실증적으로 직시하지 못한 결과
그릇된 이분법적 친일과 반일 프레임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김종현 독자

19세기 중엽 캄보디아는 프랑스에 식민지를 자청하여 20세기 중엽에 와서야 독립을 이루었다. 근 100여년을 프랑스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여러 면으로 수탈을 당했지만, 캄보디아는 프랑스 덕택에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베트남으로부터 영토 잠식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도 청일 전쟁 이후부터 근 50여년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초창기 식민지배에 항거했던 사람들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식으로 모두 본토로 들어갔기 때문에, 현재 상당수 대만인들은 일본이 그들을 식민지 지배하는 동안 근대화 시켜 준 점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구한말에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끌어들인 사람은 민비였다. 자국의 민란을 제압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에 동학란의 발발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청의 본격적인 개입을 불렀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륙으로 뻗어가기 위해 조선을 교두보로 생각한 일본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결국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거머쥘 계기를 얻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은 다시 러시아를 끌어 들이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이미 세계 열강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한 분위기였다. 이를 눈치 챈 고종은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오히려 일본에 전비를 대주고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는 약싹빠른 처신을 했다. 결국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5대신이 고종의 의중에 따라 왕실을 보존(사직의 보존)하는 대가로 국권을 넘기는 당연한 수순을 밟았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조선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미 3만명 가량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승리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당연히 전리품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 양반 계급에 속했던 조선의 의병들은 국권상실에 항거하였지만, 정작 왕실은 사직의 보존을 보장 받고 일본의 왕공족으로 봉해져서 일본 정부로부터 세비를 받는 혜택을 누리면서 식민지배를 용인하였고, 하층민이었던 동학혁명의 잔당들은 오히려 신분제를 철폐한 일본의 식민지배에 호의적으로 동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조선의 신분제를 폐지하고 민법을 발효함으로써 개인의 인권과 재산권을 법적으로 보장한 점, 그리고 토지조사를 통해서 조선의 토지 가용 면적을 늘린 점은, 비록 식민지 시대의 모든 근대화를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려 한 목적 때문이라는 식민사관으로 폄하하더라도, 실제적으로 구한말 양반들의 가렴주구로 조선이 피폐했던 상황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근대화된 계기가 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조선시대 지배 계층인 어느 누구가 양반 아닌 사람들이 정규 교육을 이수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가.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정규 교육기관을 창설하고, 당시 모든 백성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근대 교육제도를 실시한 것만으로도 일본은 우매했던 조선에 어느 정도 근대 의식을 심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시에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하고, 조선의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만행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고.

물론 일본이 강제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시에 동원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전시 동원은 동일하게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도 적용된 것이었으며, 특별히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본인보다 가혹한 처우를 했거나 차별했다는 사료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은 식민지배 기간 동안 조선인들의 반발이나 항거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있었던 사료는 많이 발견된다. 이를테면, 최근 발매된 이영훈 교수의 <반일종족주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 본토로 수출할 때는 일본 현지보다 비싼 값을 쳐 주어 오히려 일본 본토인들의 반발을 산 경우라든지, 징용으로 동원된 인부들의 임금도 숙련도에 의해서만 차별하였지 결코 조선인이기 때문에 차등 지급하지 않았다는 다수의 실증적 기록들이 있다.

위안부 문제만 해도 그렇다. 흔히 우리가 알기로는 일본의 순사들이 총칼로 조선의 소녀들을 납치해서 종군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식이지만, 그런 일은 명백히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사료로서 밝혀지고 있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은, 일부 취업사기 형태로 소녀들이 꼬임에 넘어간 면은 있지만, 대부분 부모들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고, 또한 당시의 공창제의 연속선상에서 전시에 동원된 형태로 위안부제도가 시행된 점, 게다가 전시에 위안소는 엄격하게 관리되고 보호된 형태로 안전과 보상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때문에 식민지 시대 위안부들은, 6.25 당시의 한국군 위안부들이 관리되지 않은 상태로 운영되어 성병에 다량 노출된 경우와 달랐고, 월남전 당시 한국군들이 무분별하게 베트남 여인들과 관계하여 라이따이한의 비극을 만든 것과도 다르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일본이 지배한 여러 나라 가운데 왜 유독 한국만 반일감정이 강하게 된 것일까. 도대체 왜 오늘날 한국인들은 한 세기 지난 일본의 식민지배를 지금까지 죽도록 증오하고 반발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조선의 주자학적 유교 원리주의에 입각한 소중화 사상을 근본 원인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즉, 조선은 명나라를 한족을 잇는 중화의 본통으로 섬기면서 스스로를 소중화라 하여 중국의 그늘 밑에서 자부심을 뽐내었다. 그러면서 섬나라인 일본은 왜구, 왜족이란 금수 같은 오랑캐 족속으로 폄하했던 전통이 뿌리깊게 내려 온 탓일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침략과 침공에 대해서는 반감이 덜하지만,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한 점이다. 게다가 일본은 조선의 사농공상이란 유교적 전통과는 달리, 공과 상을 중시하여 직능 위주의 실사구시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조선이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일본을 폄하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런 유교 원리주의적 도덕주의와 사농공상이란 계층의식은 나라를 문약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도덕적 허례허식을 야기하고, 급기야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 시대에는 도덕적 위선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고 있지 않은가.(그런 점에서 한국이 일본에 비해 거짓말 범죄가 수백배에 달한다는 통계는 도덕적 명분주의의 허상의 결과가 아닐까.)

둘째는 과잉된 민족 의식의 발로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상대적으로 과잉된 반일 감정에서 쉽게 도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일 감정은 언제나 정치적 도구로 오용되어 오기도 했다. 이런 과잉의 민족의식은 동시에 상대적으로 반민족을 용인하기 힘들게 만든다. 때문에 이런 이분법적 구도로 편을 가르면 도덕적 명분을 세우기가 용이하므로, 과잉의 민족 감정은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당하게 된다. 바로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가 그런 이분법적 계급 투쟁의 선동에 아주 잘 먹히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고, 남한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겨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심리도 바로 그런 과잉된 국수적 민족 의식의 발로인 셈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그릇된 도덕적 우월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가 한 세기 동안 한국민에게 반일의식을 세뇌시켜 왔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우리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가치로 낙인된 면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 대한민국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로잡아져야 할 요소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한일간에 쟁점이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나 징용 문제에 대한 해법이 오도되고 있는 것은 우리 근대사를 실증적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그릇된 이분법적 친일과 반일이란 프레임에 빠진 결과여서 안타까울 뿐이다.

김종현 독자 (한의사/캐나다 밴쿠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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