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의 거시 구조적 기원은 명백히 한국전쟁이었고, 그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일으켰으니, 김일성은 6·25 남침이라는 나비 효과로 5·16의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박정희를 역사의 전면에 불러낸 셈이 됐다.

군생활 시절 남로당 활동 혐의로 졸경을 치렀고 군에서도 파면되었던 박정희. 그는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현역으로 복귀했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박정희 입장에서 볼 때 6.25 남침이 그를 다시 살려내는 역할을 했다. 사진은 박정희가 군인 시절 권총 사격을 하는 모습.
군생활 시절 남로당 활동 혐의로 졸경을 치렀고 군에서도 파면되었던 박정희. 그는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현역으로 복귀했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박정희 입장에서 볼 때 6.25 남침이 그를 다시 살려내는 역할을 했다. 사진은 박정희가 군인 시절 권총 사격을 하는 모습.

인간 박정희. 그의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은 군인이었다. 만주국의 신경군관학교(1940~42), 일본 육군사관학교(1942~44), 해방 후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1946) 등 3개국 사관학교에서 수학했고, 미국 오클라호마주 포트실 육군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훈련과정 유학을 다녀왔다.

6·25는 박정희의 인생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49년 초만 해도 그는 잘 나가는 군인으로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보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남로당 가담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고, 숙군과정에서 현역 파면 명령을 받았다. 강제로 군에서 쫓겨났으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만주군관학교 선배들의 주선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할 수 있었다.

그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상황실장 비슷한 일을 담당했다. 하지만 직책도 직위도 없는 비공식 문관(文官) 신분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육사 8기 엘리트들로 구성된 장교들이 있었다. 1949년 후반부터 북한은 월북한 남로당원들을 강동정치학원에 입교시켜 게릴라 훈련을 시킨 다음 대대적으로 남파하여 남한 전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남파된 게릴라들은 험준한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와 오대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등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육본 정보과 상황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박정희는 정보국 반원들과 함께 38선 부근에서 적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분석한 결과 조만간 적들의 남침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박정희, 6·25 터지기 6개월 전 “남침 임박” 보고서 작성

육본 전투정보과는 유양수 과장의 지도하에 ‘연말종합적정 판단서’라는 연례보고서를 작성했다. 북한의 남침전쟁 준비 상황이 여러 정보와 첩보를 통해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욱 의미심장할 때였기에 이 보고서는 어느 때보다 신중한 내용을 담았다.

1949년 12월 17일 육본 정보국은 이 판단서를 상부에 보고했다. 총론 부분은 박정희가 직접 작성했는데 판단서의 결론은 “1950년 봄을 계기로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 기능을 동원하여 전쟁 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 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는 내용이었다.

해가 바뀌면서 38선 일대는 더더욱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6월 8일 포천 파견대 양문리 초소에서 “일단의 장교를 대동한 인민군 고급지휘관이 전방 고지에 나타나 종일 정찰을 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6월 9일에는 비슷한 보고가 동도천과 고랑포 건너편 고지에서도 올라왔다. 전곡의 지방 도로를 따라 인민군 차량행렬이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유양수 전투정보과장은 6월 15일 무렵 장도영 전투정보국장에게 또 다시 ‘남침 임박’을 강조하는 정보 보고를 했다. 하지만 장도영은 이 보고를 무시했다.

6월 19일 동두천 파견첩보대장 김정숙 대위는 전곡과 연천 사이에서 움직이는 전차 여러 대를 발견했고, 다음날엔 더 많은 전차와 자주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6월 22일 고랑포 파견대장 김병학 중위는 육본 전투정보과의 김종필 중위에게 “남천에 있던 인민군 1사단이 38선 바로 북쪽 구화리까지 남하했다”고 보고했다.

6·25 남침을 예상한 박정희 문관은 조만간 적의 전면 남침공격이 예상되니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군 수뇌부에 보고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말이다. 당시의 안타까웠던 정황에 대해 박정희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남침 징후를 6개월 전에 예측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침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 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 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1949년 말 정보국 작전판단서는 전쟁이 발발 후 포로와 적 문서에 의하여, 또는 귀순자들의 제보에 의하여 너무나 정확하게도 적중하였다.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무능과 무위와 무관심이 가져온 국가재산과 인명, 문화재의 피해가 그 얼마나 컸던가. 후회가 앞설 수는 없지만 너무나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박정희 지음·박정희 탄생 100돌기념사업추진위원회 엮음, 『남편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 어디서 배웠노』, 기파랑, 2017, 116쪽)

6·25 발발 소식 듣고 급거 상경

1950년 6월 21일, 박정희는 어머니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 구미로 내려갔다. 1년 전 모친이 별세했으나 숙군 수사의 회오리에 휩싸여 있던 막내아들 박정희는 모친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예감이 좋지 않았던지 김종필, 이영근 중위 등 휘하의 반원들에게 “아무래도 북괴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것 같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구미경찰서를 통해 연락해 달라”고 당부하고 구미로 향했다. 무슨 까닭인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6월 23일 24시를 기하여 인민군의 대규모 훈련에 대비하여 78일간 유지해온 대북 경계령을 해제하고 “예하부대는 휴가를 실시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6월 24일 토요일 오전 10시, 김종필 중위는 장도영 국장에게 “적의 전면공격이 임박한 것 같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전방부대에서 외출을 내보낼 텐데, 불길한 예감이 든다. 뭔가 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상황 보고를 했다.

30분 후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종필 중위는 “적이 기습 공격을 한다면 일요일 미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전군에 비상 태세를 명령할 것. 대통령에게 긴급 상황을 보고하고 정부의 대비를 건의할 것. 적의 주공로(主攻路)로 예상되는 동두천과 조공로(助攻路)로 예상되는 개성 정면에 정찰조를 침투시켜 적정을 확인할 것. 비상 경보망의 정비. 이 시간 이후 정보국과 작전국이 합동근무반을 편성하여 작전상황실에서 근무토록 할 것” 등 긴급 대책을 건의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했던 다른 참모들은 시큰둥한 입장이었다. 6월 24일 정보국 야간 당직장교는 김종필 중위였다. 38선 일대에서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인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6월 25일 새벽 3시, 포천에 나가 있던 첩보파견대장이 김종필 중위에게 “전차군을 동반한 대병력이 양문리 만세교 일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제1보가 날아왔다. 이어 38선 곳곳에서 인민군 포탄이 아군 진지로 날아오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이 벌어졌을 때 박정희 문관은 구미 상모리 고향 집에서 어머니에게 제사를 올린 후 문상객들과 사랑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2시 조금 지났을 무렵, 구미읍 경찰서에서 순경 한 사람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뛰어왔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이 경찰을 통해 보낸 긴급전보였다.

전보에는 “금조(今朝) 미명(未明)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목하 전방부대 3개는 적과 교전 중, 급히 귀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간신히 한강 건너 시흥으로

긴급전보를 받은 박정희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1975년 6월 25일자 박정희의 일기를 통해 그 긴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오후 2시경 집을 떠나 도보로 구미로 향하다. 경부선 상행열차에 병력을 만재(滿載)한 군용열차가 계속 북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 야간 북행 열차를 탔으나 군 병력 전송 관계로 도중이나 역에서 몇 시간씩 정차를 하고 기다려야 했다. 이 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7시경이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가 불안에 싸여 있었고 위장을 한 군용차량들이 최대한도로 거리를 질주하고 서울의 거리에는 살기가 감돌기만 하였다. 용산 육본 벙커 내에 있는 작전상황실에 들어가니 25일 아침부터 밤낮 2주야를 꼬박 새운 작전국 정보국 장병들은 잠을 자지 못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고, 질서도 없고 우왕좌왕 전화 통화 관계로 실내는 장바닥처럼 떠들썩하고 소란하기만 했다.’(박정희 지음·박정희 탄생 100돌기념사업추진위원회 엮음, 『남편 두고 혼자 먼저 가는 버릇 어디서 배웠노』, 기파랑, 2017, 118쪽)

6월 28일 새벽 2시, 인민군 전차 2대가 홍릉 숲을 돌파하여 청량리 쪽에 나타났다. 육군 공병대는 새벽 2시 30분, 적들에게 한강 교량을 빼앗길 경우 결정적인 위기가 발생할 것을 고려하여 한강에 걸려 있던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상행선·하행선), 천호동 쪽의 광진교 등 세 개의 다리를 폭파했다.

육군본부 요원들은 새벽 2시 경 용산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한강 교량은 이미 폭파된 후였다. 전투정보과 소속의 육사 8기 출신 서정순 중위는 한강 다리 폭파 상황을 확인 한 후 뚝섬 쪽으로 가는 박정희의 모습을 보았다.

장도영 정보국장으로부터 의정부 쪽 전선 상황을 조사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육군본부 정보국 5과장 차호성 소령은 6월 27일 밤늦게 육본으로 돌아와 오니 사무실에 서류 등이 널려 있고 텅텅 비어 있었다. 차호성 소령은 부하들을 데리고 한강 인도교 쪽으로 나갔다. 이미 다리는 끊겨 있었고, 주변엔 사람 시체, 추락한 자동차들이 강에 쳐 박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부하들과 광나루까지 걸어가서 수심이 낮은 곳을 골라 헤엄쳐서 한강을 건넜다. 천호동 쪽에 도착하니 날이 밝았다. 저쪽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루한 작업복에 모자를 쓴 박정희였다. 고향에서 연락을 받고 밤차로 서울에 올라와 육군본부로 갔더니 엉망이었고, 한강에 나가 보니 다리가 끊겨 겨우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6월 28일 새벽 육본이 철수할 때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사실을 알고 서빙고 쪽에서 간신히 쪽배 한 척을 구해 정보국 장병들과 함께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당시의 급박했던 정황에 대한 설명은 동아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냈던 강성재 기자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7월 14일 소령으로 복직

1968년 진해를 방문한 박 대통령 내외는 진해에서 한가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종찬 장군(육군참모총장·국방부장관 역임) 부부를 초청하여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화제는 6·25가 터진 직후로 옮겨졌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비공식 문관 신분으로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후 천신만고 끝에 한강을 도강하기까지 다음과 같은 비화를 털어놓았다.

“6월 28일 새벽 인도교가 폭파되자 할 수 없이 정보국 장병들을 이끌고 서빙고 쪽으로 돌아서 간신히 보트 하나를 구해가지고 몇몇이 타고 한강을 건너오는데 보니까 김창룡이가 타고 있었어요. 그때 군을 이간시키는 이 자를 권총으로 쏘아 죽일까 하다가 참았는데, 그 후에 특무부대장으로 있으면서 날뛰는 것을 보고 그때 결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강성재, 『참군인 이종찬 장군』, 동아일보사, 1988, 209쪽)

간신히 한강을 건넌 박정희는 걸어서 시흥으로 갔다. 육군본부는 시흥에 위치한 보병학교로 이전했다. 장도영 정보국장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직후 김백일 육본 참모부장과 함께 작은 보트를 구하여 손바닥을 노 삼아 저으면서 간신히 한강을 건넜다. 아침 일찍 보병학교에 도착해서 보니 전투정보과 장교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장도영 국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요원들 가운데 ‘좌익 전력자’ 박정희가 끼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육본은 28일 오후 다시 수원으로 옮겼다. 6월 30일 오전 수원국민학교에 임시로 설치된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갔다. 학교에는 박정희 문관과 장병들이 무사히 도착해 있었다.
전투정보과의 김종필 중위 일행은 시흥의 임시 육본으로 갔다가 다시 수원으로 이동했다. 임시로 설치된 육본 정보국으로 가자 박정희 문관이 정문에 서서 자신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김종필 중위는 “저분은 역시 북으로 가지 않으셨구나” 하고 안도했다.

그 무렵 박정희는 육군본부 내의 선후배들로부터 남로당 활동 경력 문제로 인해 사상적 의심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6·25 남침전쟁 소식을 듣고 어렵게 서울로 올라와 육군본부에 합류했다. 만약 그가 좌익사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남침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다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 문관이 수원에서 전투정보과 사람들을 맞는 모습을 본 상사와 부하들은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깨끗이 거두게 된다. 장도영 당시 정보국장도 “28일 새벽에 서울에 적이 침입한 상황으로 봐서 박 문관(박정희)은 그가 원했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확실한 근거도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심을 버렸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군 수뇌부는 남침 전쟁이 터진 혼란의 와중에 북으로 도망가지 않고 한강을 넘어온 박정희를 보고서야 박정희의 사상 전력에 대한 논란을 거두었다. 박정희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황에서 한강을 건넘으로써 그를 족쇄처럼 옥죄고 있던 ‘사상시비’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육군본부는 수원에서 대전으로 이전했다. 박정희도 후퇴하는 육군본부를 따라 수원에서 평택으로, 대전으로 이동했다. 그가 다시 현역 육군 소령으로 복직된 것은 7월 14일 대전에서였다. 복직과 더불어 그는 현장에서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면된 후 1년 2개월 만의 복직이었다.

김일성이 박정희 도운 셈

그를 복직시키는 일은 장도영 작전국장의 아이디어였다. 전쟁이 터졌는데 유능한 장교가 필요하다는 점, 또 6·25 발발 당시 그가 취했던 행동 등이 그런 결정을 하도록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장도영은 채병덕의 후임으로 임명된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박정희의 현역 복직을 요청했고, 정일권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신 장관은 즉석에서 허락하여 인사발령이 난 것이다.

전쟁 통이라 현역 복귀한 희에게 지급할 철모와 계급장조차 없었다. 당시 정보국에서는 철모의 내피인 파이버를 쓰고 있었는데, 박정희의 소령 복직 소식을 들은 김종필이 파이버 하나를 구해 와서 상황판 정리용 색연필로 철모에 빨간 태극문양이 든 소령 계급장을 그려 넣었다.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전쟁이 박정희를 다시 군으로 불러들이는 ‘나비 효과’를 연출한 것이다.

2개월 후인 9월 15일 박정희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했고, 10월 25일에는 신설된 제9사단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보병 9사단은 1950년 10월 25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9호로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바로 이날 국군과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던 중 청천강 북쪽 운산에서 국군 1사단이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국군의 거의 모든 병력이 북진 대열에 참여하면서 텅 빈 집처럼 된 수도권과 후방을 방어할 목적으로 육군 제 28·29·30연대를 묶어 창설된 것이 9사단이다. 이 부대는 후에 ‘백마부대’란 명칭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된다.

신설된 9사단의 초대 사단장은 박정희보다 나이가 6살이나 어린 장도영 준장이었고, 참모장에는 장도영의 추천에 의해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중령이 임명되었다. 9사단 창설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여 훈시를 했는데, 바로 그 자리에 이 대통령의 명령으로 숙군 과정에서 살아남은 박정희 참모장이 있었다.

6·25 전쟁은 박정희의 군인으로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사형 구형과 파면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동기생들보다 빠르게 진급을 거듭했다. 그만큼 박정희의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뜻이다.

다양한 보직을 거치며 경력도 탄탄하게 쌓았다. 전쟁 후반기에는 확장일로에 있는 포병병과로 전과한 후 군단 포병단장을 역임하며 전투지휘관으로서의 역량도 키워나갔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는 인맥도 형성했다. 박정희의 능력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상관들과 박정희를 인격적으로 따르고 존경하는 후배 장교들과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박정희는 5.16의 군맥을 하나 둘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김일성의 6.25 남침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해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살다가 필부필부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6·25로 인해 박정희의 사상 문제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고, 군인으로 복직하여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6·25 남침전쟁을 휴전으로 매듭 짖기 위해 미국은 휴전협정을 끝까지 반대하는 이승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70만 대군의 건설을 약속했다. 이후 한국의 군대는 국가 예산의 50% 이상과 선진 과학기술·행정·조직 시스템의 선두주자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결국 5·16의 거시 구조적 기원은 명백히 한국전쟁이었고, 그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일으켰으니, 김일성은 6·25 남침이라는 나비 효과로 5·16의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박정희를 역사의 전면에 불러낸 셈이 됐다.

남북의 국력이 역전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남한 안보의 강화였다. 이것을 가능케 해 준 것이 김일성이었다. 그는 또 박정희가 좌익 혐의로 예편 당했을 때 군부 복직 기회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김일성은 사후 역전 및 자기 패배의 조건들을 스스로 미리 제공한 셈이다(박명림, 「박정희와 김일성-한국적 근대회의 두 가지 길」, <역사비평>, 2008년 봄호·통권 82호).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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