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휘하에 있던 조선의용대 전 대원의 80%가 1941년 옌안(延安)으로 탈출
그 후 만주로 이동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164사단, 166사단의 주역이 되다
이들 부대가 1949년 북한으로 들어가 6·25 남침전쟁의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김원봉은 대원들에게 왕따 당한 후 광복군에 합류했으나 계속 말썽만 일으켜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그 주력이 1941년 연안으로 탈출하여 중국공산당의 품에 안겼고, 1949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북한에 들어가 6.25 남침의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그 주력이 1941년 연안으로 탈출하여 중국공산당의 품에 안겼고, 1949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북한에 들어가 6.25 남침의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열심히 띄우려다 브레이크가 걸린 김원봉과 그가 만들었다는 조선의용대의 그 후를 추적하면 충격적인 사실이 발견된다. 김원봉은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옌안(延安)으로 탈출할 때 왕따를 당해 낙오했고, 그 후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게 된다. 

옌안에서 중공군과 함께 활동했던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군의 항복 직전 조선의용군은 만주로 이동하여 중국 인민해방군 164사단, 166사단 조직의 주역이 되었고, 1949년 이 사단이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북한으로 들어가 6·25 남침전쟁의 주력부대를 맡게 되었다. 조선의용대의 행적을 정밀 추적해 본다.

김원봉이 이끄는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혁명당은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창설 당시 인원은 100여 명으로 출발하여 최대 314명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 부대 창설의 주인공은 김원봉이 아니었다.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김원봉에게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정치 선전 목적의 한국인 부대 창설을 요청했고, 김원봉이 이 요청에 의해 만든 부대였다.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고,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장제스 국민정부군 첩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Blue Shirts Society·BSS) 산하에서 일본어 교육, 정보 수집, 선전 활동, 포로 심문 등 각종 심리전과 특수작전을 수행했다(권성욱,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2015, 745쪽).

이에 자극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38년 말 ‘한국광복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했고,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이 창군되자 청년공작대는 1941년 3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다.

조선의용대 주력의 80% 중국 공산당 산하로 탈출

그런데 1941년,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이 중국공산당 프락치들의 공작에 넘어가 조선의용대 주력의 80%를 이끌고 옌안으로 탈출하여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산하로 들어가 버렸다. 이들의 탈출 이유는 이념적 성향이 공산주의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옌안으로 탈출한 또 하나 이유는 김원봉이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데 대해 대다수 대원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는 장제스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씩을 지급받는 중국 국민당군 산하 부대였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김원봉이 팔로군 근거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김원봉은 테러, 암살, 파괴 등을 자행하는 아나키스트였다. 때문에 조직과 단체의 힘을 무시하고 단독행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분자로 간주했다. 중국공산당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들이 옌안으로 탈출해 오자 중국 공산당은 김무정, 김두봉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조선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1942년 7월 10일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되었고, 팔로군 포병사령관 무정이 사령관을 맡았다. 그들은 화북과 만주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세력을 확대, 규모가 500여 명에 달했다. 이 부대의 지도급 인물이 한글학자 출신의 김두봉, 최창익 등이었다.

조선의용대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왕따 신세가 된 김원봉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였다. 김원봉은 1942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장을 맡았다. 연안으로 탈출하지 않고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의 일부 대원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김원봉은 과거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예하 부대에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다. 김원봉의 이러한 항명 행위로 인해 지청천은 광복군을 온전히 운용할 수 없었고, 지청천과 광복군이 수행한 대부분의 작전은 김원봉의 예하 병력이 제외된 채 전개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45년 8월 11일, 조선의용군에게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박일우에게 즉시 동북으로 출병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령한다”는 옌안총부(總府) 명령 제6호를 발표했다.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하기 쉽고, 100만에 달하는 만주의 조선인들을 포섭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이 출동 준비를 하는 사이에 일본이 항복하자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등 100여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연안에 집결하여 귀국 준비를 시작했다. 9월 5일, 1진 300명이 옌안을 출발, 5개성을 거쳐 4,000리를 도보로 행군하여 60여 일 만인 11월 초 선양(審陽)에 도착했다.

무장부대 놔두고 맨몸으로 입북한 연안파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선양에 도착한 지 며칠 후인 11월 10일 조선의용군 간부와 중국공산당 연석회의에서 “간부만 조선에 들어가고, 병사들은 1·3·5지대로 재편해 동북지방에 파견하여 중국 해방 전투에 참가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2차 국공내전이 재개되면서 장제스의 국민정부군이 선양으로 진공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 선발대는 부대 개편에 착수해 제1지대(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정치주임 주연)는 남만주로, 3지대(지대장 이상조, 정치위원 주덕해)는 북만주로, 5지대(지대장 이익성, 정치위원 박훈일)는 동만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군은 2,000여 명은 현지의 조선 청년들을 충원하여 인민해방군 제166사단·164사단·독립 15사단으로 개편했다.

그 사이 선양에 거주하던 한청이 1,000여 명 병력을 모아 조선의용군 선유종대(先遺從隊)라 칭하고 10월 12일 오후,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 동중학교에 집결했다. 부대원들이 집결을 완료하자 소련군 평북사령부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했고, 20일 후 소련군정 사령부가 제공한 열차 편으로 중국으로 쫓겨났다.

소련군정 당국은 조선의용군이 무장을 한 상태로 대오를 맞춰 진주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반면에 간부진들은 그들 힘의 원천인 군대는 중국에 남겨두고 맨몸으로 북한 이동을 허락했다. 그 결과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과 부주석 최창익,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한빈, 박일우, 김창만, 허정숙, 이상조 등 연안파 간부진 70여 명은 열차편으로 1945년 12월 초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이 후에 연안파를 결성하게 된다.

연안파 구성원들은 대부분 투쟁경력이나 공산당 간부로서의 지도력 등에서 김일성 일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김두봉은 겅성대학 출신의 한글학자요, 독립운동가에다가 연안에 들어가 그곳 정치학교 교장으로 있던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었다.

최창익은 조선공산당 초창기부터 핵심 간부였고,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은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무정은 중앙고보 재학 시절 여운형의 집에서 살았으며, 이때 박헌영, 최창익 등 조선공산당 초기 인물들과도 알고 지냈다.

무정은 2만 5,000리 대도주 및 대패주를 거치며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한인 간부가 되어 1937년 홍군이 개편된 팔로군에서 총사령부 작전과장, 팔로군 포병단 단장(연대장)으로 사실상 포병사령관에 오르는 등 파격적으로 진급했다.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력이 필요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1948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중국·북한 3개국 전략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에 따라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 내에 조선의용군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164·166사단을 편성하여 북한으로 보냈다. 그냥 몸만 보낸 것이 아니라 병기와 장비까지 휴대하여 보냈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됐던 이들 2개 사단은 194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입북했다. 선양에 주둔해 있던 166사단(병력 1만여 명)은 사단 정치위원 방호산이 인솔하여 7월 25일 신의주에 도착, 인민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으로 개편되어 사리원으로 이동했다. 이 부대는 한국군과 대치하던 옹진반도에서 38선을 넘어가 한국군 2개 중대를 전멸시켰다.

조선의용군 주축의 인민해방군 3개 사단 북한에 오다

창춘(長春) 지역에 주둔 중이던 164사단(병력 1만 2000명)은 부사단장 김창덕이 인솔하여 회령을 경유, 나남에 도착하여 인민군 5사단으로(사단장 김창덕) 개편되었다. 또 곳곳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족들을 모아서 1950년 3월 중공군 독립 제15사단(병력 1만 4000명)을 편성했다. 이 사단은 전우의 인솔 하에 1950년 4월 초 열차편으로 신의주를 경우, 원산에 도착, 인민군 12사단(사단장 전우)으로 개편되었다.

이밖에도 선양 혼성단, 철도병단 조선족 부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생 등 조선의용군이 주축이 된 병력 5만 5,000명에서 6만 명 정도의 병력이 인민군에 편입되어 북한군 전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됐다. 그들은 “남한에 가서 이승만 반동세력을 소멸하라”는 격려를 받고 국경을 넘어 북한에 도착했다.

6·25 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공격사단 7개 병력 중 3분의 1이 중국에서 귀환해 온 조선의용군 산하 조선족 병력이었다. 6·25 전쟁 초기부터 낙동강 전선까지의 승리는 이들 조선족 군대 덕분이었다. 미군 정보문서에 의하면 북한군 전체 장교 중 80%가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됐던 조선인이었다(양성철, 『분단의 정치-박정희와 김일성의 비교연구』, 도서출판 한울, 1987, 110쪽). 그들 중 거의 대다수는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왜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구성된 병력을 아무 대가도 없이 김일성에게 넘긴 것일까. 사실 김일성은 중국 국적자였고, 중국공산당원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북항일연군 소속 빨치산이었다. 따라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입장에서는 김일성의 북한은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 중국의 영향력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현상을 일거에 타파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우선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의 대규모 작전이 종료돼 더 이상 조선의용군 부대가 쓸모가 없어졌다. 이 부대의 해산 혹은 처리는 군사비 삭감이라는 중국공산당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 많은 친중(親中) 인맥을 북한 인민군에 심어 북한에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목적, 조선의용군이 참전하여 남한의 무력통일에 성공할 경우 전 한반도를 친중파의 수중에 넣을 수 있고, 2차 대전 후 소련에게 선수를 빼앗긴 대북(對北) 헤게모니를 되찾는 등 다목적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모태, 뿌리’라고 칭송했던 조선의용대 문제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의하면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80%가 연안으로 탈출했고, 그들이 북한에 들어와 6·25 남침의 주역이 되었다.
김원봉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환하여 남한에서 했던 활동은 신탁통치지지, 즉 찬탁운동이었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결성했던 민전지지, 좌우합작 등이었다. 그의 주장대로 갔다면 대한민국의 귀결점은 공산화였을 것이다.

6·25 남침의 주력부대 역할을 한 조선의용군

그는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월북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북한 정부 수립 후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그의 위상은 북한 정권 내 서열 7위로 정말 잘 나가는 시절이었다.

6·25 남침전쟁 때는 북한군 군량미 생산, 남파간첩 침투 등을 담당했다.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이들은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잘 나가던 김원봉도 김일성의 숙청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해임되면서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고, 한 달 후인 11월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다. 그 후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원봉의 부인과 두 아들도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의 6월 14일자 보도는 조선의용대가 결성한 조선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됐다고 기사를 썼는데, 그들은 북한 인민군의 뿌리가 된 것이 아니라 1949년 조선의용대 중심으로 조직된 3개 사단에 입북하여 6·25 남침의 주역 역할을 했고, 6·25가 끝나자 대부분 연안파 숙청 때 숙청당해 목숨을 잃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존재들을 호국영령을 기리는 6월 6일 현충일 때 망언이나 다름없는 발언을 하여 국가 전체를 패닉 상태로 만들었다. 또 청와대와 여당 일각에서는 국군의 날을 10월 1일에서 광복군 창건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광복군은 그 목표와 숭고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척박했다. 임시정부가 활동비와 지원비를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통수권 및 지휘권을 중국군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또 중국군 장교 62명이 광복군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그들이 광복군을 지휘하는 바람에 임시정부는 명목상의 통수권만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광복군 창건일을 국군의 날로 하자는 것은 중국군 지휘를 받았던 광복군이 우리 국군의 뿌리임을 만천하에 알리자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국군의 날이 10월 1일인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로서 이 나라 국군에게 37선 이북의 미수복 지역을 수복하여 통일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해 북진을 명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뭐가 그토록 못마땅해서 국군의 뿌리가 조선의용대니 뭐니, 국군의 날을 바꿔야 한다느니 뭐니 헛된 망상을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일까? 그들의 역사의식이 참으로 의심스럽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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