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으로 34곳 수정-삭제 요구...'공소장 일본주의'위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제공]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제공]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맡은 재판부가 검찰이 제출한 공소장에서 이번 사건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연결한 부분을 대다수 빼거나 삭제하라고 요구한 사실이 15일 확인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가 최근 검찰에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는 불필요한 내용인 박 전 대통령 관련 내용 등의 수정·삭제를 권고했다. 모두 34쪽에 걸친 34군데였다.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은 이례적으로 긴 296쪽이다. 검찰은 공소장 상당 부분을 이른바 ‘재판 거래’에 할애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그의 역점 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의 의중에 맞춰 재판에 개입했다는 내용 등이다.

재판 시작 전 법원에 제출하는 공소장에는 범죄 행위만 간략히 기재해야 한다는 '공소장 일본주의(公訴狀 一本主義)'를 위배했다는 양 전 대법원장 측 요구를 받아들인 것인데, 법원이 이렇게 많이 수정·삭제를 요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검찰이 피의자를 재판에 넘길 때는 범죄 혐의를 적은 공소장 하나(一本)만 제출해야 하며 그 외의 자료를 내면 안 된다는 형사소송법의 원칙으로 공소장에도 범죄 사실과 직접 관련 있는 내용만 간략히 기재하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적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재판부는 지난달 양 전 대법원장의 첫 공판기일에서도 “검찰의 공소장에 공소 사실과 직접 관계없거나 너무 장황하고 불필요하게 기재된 부분이 있다”며 재판 시작 후 30여분간 검찰 소장의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이번 사건은 전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 최고위 인사들의 직권남용 혐의 사건으로 후배 판사들에게 어떤 위법한 일을 하게 했는지를 밝히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검찰은 이와 무관한 박 전 대통령을 연결시켜 양 전 대법원장을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주요 ‘배후’로 공소장에 적었다. 검찰은 특히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에서 박 전 대통령을 배후로 집중 거론했다.

대법원은 2012년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사건에서 피해자들 손을 들어줬다. 이후 일본 기업들이 반발하자 사건은 2013년 대법원에 재상고됐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5년 이 사건에 대한 의견서 제출을 외교부에 요청했다. 앞선 대법원 재판 결과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두고 검찰은 공소장에 '박근혜 대통령 요구에 따라 (이전 대법원 선고를) 파기할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또 외교부가 이런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이 '(국가) 망신이 안 되도록, 세계 속의 한국을 유념해서 사건을 처리하라'고 외교부에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법원은 두 부분을 모두 빼거나 고치라고 했다.

차한성 전 대법관이 2013년 법원행정처장 신분으로 김기춘 비서실장 공관으로 찾아가 이 사건 재판을 논의했다는 부분도 변경을 권고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2015년 자신이 추진하던 상고법원 도입에 도움을 얻으려고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을 통해 박 전 대통령과 면담을 추진했다는 취지의 공소장 내용도 삭제를 권고받았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공소장을 고칠 경우 스스로 불필요한 내용을 적은 것을 인정하는 격이 된다고 보고 있다. 검찰은 이후 재판부가 지적한 부분을 일부 변경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디테일한 문구 수정 정도이고 주요 내용은 바뀐 게 없다"고 설명했다.

조준경 기자 calebcao@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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