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로스버드, '하이에크적 전향' 명명하며 우파 포퓰리즘 공개적 수용 주장
자유를 위한 전략, 훨씬 더 능동적이고 공격적이어야...사상 보급과 함께 구체제 가면 벗기기도 중요
많은 사람들, 먹고 사느라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느라 바빠 시간을 리버테리언 이론 읽는 데 못 써
리버테리언한 세계에서 상태가 더 나을 것인지 여부 납득시키는 과정과 약간의 건전한 포퓰리즘 필요
리버테리언 포퓰리즘, 양날의 칼 될 수 있지만...포퓰리즘 무시하면 우리 자신이 위험해져

리버테리언 전략은 항상 성가신 주제였다. 국가주의 선거 운동 수사(修辭)로 채워진 대통령 선거 해들은 존재론적 고통을 야기하고, 국가의 규모와 범위를 줄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우리 앞에 놓인 근본적인 질문의 재검토를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 주어져 있고 전술적 선택지들의 범위가 주어져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더욱 리버테리언한(libertarian) 사회를 지금 여기에서 현실적으로 창설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주된 과제는 대학, 금융, 그리고 정치 엘리트들을 우리의 관점으로 개종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지적(知的)인가? 아니면 상향식 전략, 즉 포퓰리스트 메시지들과 일반 대중의 정치적 행동주의에 집중하는 전략이 우월한가?

우리의 투쟁은 지적인가 포퓰리스트적인가?

머리 로스버드(Murray Rothbard)는 오늘날 직면하는 것과 똑같은 다수의 쟁점들을 리버테리언들에게 제공한 선거 해인 1992년에 쓴 단연 반(反)정치적 올바름(un-PC) 에세이에서 이 접근법 양쪽 다 역점을 두어 다루었다. 그는 자기가 “하이에크적 전향(Hayekian conversion)”이라고 명명한 과정, 즉 엘리트 사상가들에 영향을 미치는 목표를 논하고, 그것을 포퓰리스트 메시징을 통해 대중들에 도달하는 목표와 대비한다.

로스버드에게 전형적으로, 그는 리버테리언 견해들에 대한 인기를 추구하는 것과 제1원칙들을 고수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고유한 대립도 발견하지 않았다. 엘리트들에 호소하느냐 아니면 대중들에 호소하느냐에 대해서, 그는 양쪽 다 제안한다. 그러나 그 논문의 진정한 주제는 머리가 겁내지 않고 접근하는 주제, 포퓰리즘(populism)인데, 리버테리언들은 국가와 그것의 아첨꾼들, 구체적으로 “국가 체계에 대해 그리고 그것의 관료제의 지위에 있는 직원에 대해 변명하는 ... 기술 관료들(technocrats), ‘사회 과학자들(social scientists),’ 그리고 미디어 지식인들(media intellectuals)”에 반대를 일으킬 가장 빠른 수단으로서 우파 포퓰리즘을 공개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의 25년이 지난 후, 머리의 분석은 아주 선견지명이 있는 것 같이 들린다.

리버테리언들은 종종 그 문제를 간단하게 보았지만, 사회적 변화의 전략가로서 그들은 실패했다. 소위 “하이에크 모형(the Hayek model)”에서 그들은 올바른 사상을 보급할 것을 요구했고, 그리하여 최고 철학자들로 시작해서 그다음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흘러내려 언론인들과 기타 미디어 여론 형성자들을 개종시키는 데까지 지적 엘리트들을 자유(liberty)로 개종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물론 사상이 열쇠이고 올바른 학설을 보급하는 것은 어떤 리버테리언 전략이든 그것의 필수 부분이다.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이야기될지 모르지만, 장기 전략은 중요하고, 오직 현 선거 동안 두 악 중 덜한 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러므로 장기는 말할 것도 없고 중기에서도 패배하는 공식적인 보수주의의 비극적인 무의미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진짜 실수는 장기에 대한 강조라기보다 그 문제가 그저 지적인 실수만이 아니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에 있다. 그 문제는 지적 엘리트들이 현 체제로부터 이익을 얻는다는 점, 중대한 의미에서 그들이 지배 계급의 일부라는 점이다. 하이에크적 개종의 과정은 모든 사람이, 적어도 모든 지식인들이, 오로지 진실에만 관심이 있다고, 그리고 경제적 자기 이익이 결코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어쨌든 지식인들이나 대학 교수들을 알고 있는 누구든 이 관념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고, 빨리 그렇게 될 것이다. 지식인들과 여론 형성자들이, 실수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기 이익이 지배 체제에 매여 있기 때문으로도, 근본적인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어떠한 리버테리언 전략도 인정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왜 내부 붕괴하였는가? 그 이유는 결국 그 체제가 아주 나쁘게 작동하고 있어서 심지어 특권 계급(nomenklatura)조차도 질려서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 계급이 사기가 저하되고 권력에의 의지를 잃을 때 사회 체제가 붕괴한다고, 공산주의 체제의 명백한 실패가 그 사기 저하를 일으켰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단지 엘리트들에게 올바른 사상을 가르치는 것에만 의존하게 되면, 우리의 전 사회가, 소련의 사회와 같이, 산산이 부수어졌을 때까지 우리 자신의 국가 체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자유를 위한 전략은 훨씬 더 능동적이고 공격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리버테리언들에게나 최소 정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갑옷을 입고 원투 펀치(one-two punch)를 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올바른 사상을 보급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패한 지배 엘리트들의 가면을 벗기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기존 체제로부터 어떻게 이익을 얻는지, 더욱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지, 폭로하는 것도 중요하다. 엘리트들에게서 가면을 벗기는 것은 그것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부정적 선거 운동(negative campaigning)”이다.

이 두 갈래의 전략은 (a)올바른 사상에 기초하여, 우리 자신의 리버테리언들, 최소 정부 여론 형성자들의 핵심 그룹을 증강하는 것과, (b) 일반 대중에게 직접 청하는 것, 지배적인 미디어 및 지적 엘리트들을 피해 지나가는 것, 사람들의 일반 대중에게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기들을 약탈하고 있고 자기들을 혼란시키고 있으며 자기들을 억압하고 있는 엘리트들에 대항해서 분기(奮起)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추상적인 것들과 구체적인 것들을 융합해야 한다. 그것은 추상적으로 엘리트들을 공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존 국가 체제에도, 바로 지금 지배 계급들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도 집중해야 한다.

리버테리언들은 누구에게, 어느 집단들에게 접근할지에 관해 오랫동안 난감했다. '모든 사람에게' 라는 단순한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적절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억압받고 또한 가장 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할 집단들에 전략적으로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스버드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을 하는데, 둘 다 믿지 못할 정도로 간단하고 따라서 종종 간과된다.

 

• 첫째: 엘리트들은 지적인 사상, 선한 의도, 혹은 사회의 개선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다른 사람과 같이 자기 이익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우리가 엘리트들에게 리버테리언 사상이 더 낫다고 납득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더욱 리버테리언한(libertarian) 세계에서 상태가 더 나을 것인지 여부이다.

국가와 연고가 있는 많은 엘리트들에게, 그 대답은 결정적으로, 아니요, 이다―그리고 이것은 하이에크적 개종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엘리트들이 리버테리언 메시지에 반대할 강력한 유인에 관해 순진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가와 그것의 고객들―중앙 은행가들, 학계, 연고 법인들, 방위 계약자들, 연방 근로자들, 그리고 전 정치적 계급―은 우리에 대항해서 제휴하고 있다.

그러나 로스버드가 단정하듯이, 우리는 그런 엘리트들 가운데서 잠재적 동맹자들을 식별하는 일을 단념할 수 없다. 볼커 기금(Volker Fund), 인문학 연구소(IHS), 그리고 미제스 연구소는 개종자들을 얻고 리버테리언들에게 학계에 직장을 구해 주는 데 성공해 왔고, 확실히 우리는 도저히 고등 교육을 전적으로 진보주의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 우리는 또한, 피터 틸(Peter Thiel)과 마크 스피츠나겔(Mark Spitznagel) 같은 사람들처럼, 가능한 어느 곳에서든 기업계와 투자계에서 엘리트 리버테리언들과 동맹을 추구하기도 해야 한다.

 

• 둘째: 어떠한 성공적인 리버테리언 전략도 약간의 건전한 포퓰리즘을 포함해야 한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리버테리언 이론은 쉬운 효과적인 어구들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밈들(memes)에 종종 힘을 쏟지 않는다. 그러나 지적 논의들은 홀로로는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효과적인 포퓰리스트 메시지들은 보통의 조(Joe)나 제인(Jane)을 만족시키는, “그 안에 나를 위해 뭐가 있는데?”라는 질문에 대한, 암묵적인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그저 “나는 모든 젊은이들이 평등한 성공 기회를 가지도록 대학을 무료로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에게 900페이지의 ≪인간 행동(Human Action)≫을 넘겨주고, “이것을 읽어라, 그러면 당신이 이해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그러나 어쨌든 그것을 시도하라).

많은 미국인들은 간신히 먹고 사느라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느라 너무 바빠서 자유 시간을 경제학이나 리버테리언 이론을 읽는 데 쓸 수가 없다. 기껏해야, 보통 사람은 선거 운동 시기에 대해 약간의 가벼운 관심을 기울이고 대부분의 선거들에서 투표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포퓰리스트 메시지는 이해하기 쉽고 납득시키기 쉬우며 중산 계급이나 근로 계급 선거구민들에게 명백히 이로워야 한다. 포퓰리스트 메시지란 정의상 발견하고 채택하는 데 많은 작업을 필요로 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 좋은 예: 론 폴(Ron Paul)은 자기의 2008년과 2012년의 대통령 선거 운동 동안 “연방 준비 제도를 없애라(End the Fed),”와 “중동에서 철수하라(Get Out of the Middle East),”라는 두 개의 포퓰리스트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수천 명의 새 리버테리언들을 그럭저럭 모집했다. 양 메시지는 [여러] 이데올로기적 계열들에 걸쳐서 호감을 샀고, 양 메시지는 나라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정확히 담고 있었다.

2008년의 붕괴 후에, 많은 미국인들은 더욱더 월스트리트를, 그리고 그것이 연방 준비 제도와 재무부 양쪽 다와 가지는 유착 관계를, 경계하였다. 월스트리트는 구제 금융을 받았고,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중심가)는 그렇지 않았다. 연방 준비 제도가 무엇을 하는지와 그것이 정확하게 어떻게 엘리트 은행 계급을 창설하는지에 관한 대중의 이해는 분명치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연방 준비 제도는 보통 사람의 반사적 관점(reflexive viewpoint)이 꼭 그대로 우연히 동시에 옳기도 하고 리버테리언하기도 한 쟁점의 훌륭한 예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다수의 다른 쟁점들에 대해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론 폴은 직감적인 반(反)연방 준비 제도 감정을 이용할 수 있었다.

폴 박사는 비슷하게 우리의 중동 연루에 대한 피로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라, 라는 또 하나의 간단하고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포퓰리스트 메시지를 사용함으로써 이용했다. 그렇게 하는 데서, 그는 9/11 사건들 이후 생긴 개입주의 감정이 지나갔다고 정확하게 감지했다. 2008년까지는, 그리고 확실히 2012년까지는, 다수의 미국인들은―아무리 모호하더라도―이 두 지루한 전쟁이 희생자, 부채, 그리고 비밀 정보 요원이 외국에서 퍼뜨린 악선전의 본국 역유입(blowback)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낳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래서 원칙에 의거한 폴의 반전 입장은 국민적 분위기와 잘 맞아 들었는데, 설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분위기에 대한 리버테리언 원리를 명확히 표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러했다.

리버테리언 포퓰리즘은, 어떠한 형태의 포퓰리즘과도 같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사고와 숙고에 기초하지 않은 어떠한 후보나 메시지에 대한 지지도 갑자기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 그것의 포퓰리스트 주제들에 의해 폴 박사의 선거 운동들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천했던 책들을 계속해서 읽어서 결과적으로 더욱 충분하게 자유에 열광하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리고 로스버드가 지적하듯이, 리버테리언들이 포퓰리즘을 무시하면 우리 자신이 위험해진다. 모든 좌파 포퓰리스트가 마르크스나 하워드 진(Howard Zinn)을 읽지 않았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잠재적인 리버테리언 개종자들에게 지적인 리트머스 시험을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리버테리언 포퓰리즘에 관해서는, 국가에 대한 반사적 반감―그리고 그것의 악의에 관한 본능적인 인식―으로 충분할 수 있다.

글쓴이) Jeff Deist

제프 다이스트는 미제스 연구소의 회장이다. 그는 전에 하원 의원 론 폴(Ron Paul)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그리고 사모(私募) 투자 펀드 고객들의 변호사로서 일했다. 

옮긴이) 황수연(전 경성대 교수)

원문) https://mises.org/wire/rothbard-libertarian-populism

▶ 자유와 시장경제에 관한 더 많은 글을 「미제스와이어」(www.mises.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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