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 문재인 시대의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비교해 보자. 다른 나라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밤낮 안 가리고 뛰고 있을 때, 미래 세대는 빚더미에 깔려 죽든지 말든지 오늘의 쾌락과 행복을 위해 악착같이 빚을 내서 해외여행 즐기고, 비싼 와인 수입해다가 마시며 파티를 벌이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이제 포퓰리즘의 대명사는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민낯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좌익 반군과의 내전으로 혼란을 겪었던 페루, 과테말라,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중남미를 여러 차례 취재한 적이 있다. 과테말라와 페루에 가서 보니 경호업이 ‘떠오르는 신종 미래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이 나라들은 게릴라와 정부군 간의 오랜 내전 과정에서 풀려나간 무기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범죄에 이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좀 산다 하는 사람들, 그 나라에 진출한 기업인들은 앞 다퉈 경호회사에 신변 경호를 의뢰하는 바람에 경호업이 대박을 치게 된 것이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한 순간, 아마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지옥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호텔 입구에 방탄조끼를 입은 사설 경호원들이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호텔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음식점, 백화점, 주요 건물 곳곳이 같은 풍경이었다.
당시 페루에서는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쿠바 카스트로 노선), ‘빛나는 길’이란 뜻의 센데로 루미노소(마오쩌둥 노선) 같은 게릴라들이 정부 시설물을 자살 공격하거나, 외국인 납치극을 벌여 아비규환이었다.

여기가 진짜 ‘지옥’이다

리마의 한국대사관에서는 필자에게 “경호원 없이 한 발짝이라도 호텔 밖으로 나가면 귀하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무장 경호원 두 명을 호텔로 보냈다. 리마에서 취재하는 동안 이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당시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 국회의장 등을 인터뷰했다. 현지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여 기사를 정리하고 있을 때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게릴라들이 리마 주재 일본대사관을 점거하고, 이곳에 모여 있던 페루 정부 요인과 각국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발생했다.
과테말라도 리마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을 때 필자와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던 국내 봉제기업 대표는 약속장소로 나오던 중 괴한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하던 중 괴한이 쏜 권총탄을 목에 맞았는데, 다행히 기도(氣道) 옆에 총알이 박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당시 중남미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극소수 지배계층이 국부(國富)의 절대다수와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대대손손 세습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사회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계급 갈등에 더하여 백인과 토착민(인디오, 혹은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족)이라는 인종 갈등이 뿌리 깊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소수의 백인 지배계층이 부(富)와 권력을 대대손손 세습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법이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 공교육을 엉망으로 방치하여 다수의 토착민과 혼혈인들은 저급한 교육을 받거나, 아예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반면, 소수의 선택된 백인을 비롯한 지배계층 자녀들은 훌륭한 시설을 갖춘 값비싼 사립학교를 통해 고급 교육을 향유한다.
지배계층 자녀들이 성장하면 해외 유학을 보내 신문물을 익히고, 신경영기법을 터득하며, 외국의 유력자들과 휴먼 네트워킹을 구성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문이 운영하는 기업을 물려받는다. 기득권 보호를 위해 군부, 종교, 외국의 유력 기업과 결탁하여 우군화(友軍化)함으로써 지배 시스템을 공고화한다. 
이들 나라들의 공통점은 사회 구조가 극소수 상류계급과 절대다수의 극빈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산층 비율이 15~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중산층이 탄탄하게 형성되지 못하니 구매력이 저하되고, 소수의 지배계층은 대규모 투자와 오랜 기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제조업을 외면함으로써 국가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또 권력과 결탁하여 해외 수입권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한편에선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소비 향락산업에 집중 투자하여 국가 백년대계와는 관련 없는 수입 의존적 산업구조가 정착된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말한 한국의 참모습

필자가 중남미에서 관찰한 게릴라들은 대부분 부와 권력의 세습 구조에 억압당한 ‘깨어 있는 자’들의 봉기에서 비롯되었다. 누구나 노력하면 신분상승이 가능해야 정상인데, 철저한 계급 구조로 되어 있는 이들 사회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승이 불가능하다.
경제는 성장은커녕 정체 내지 퇴보하고 있으니 일자리가 있을 리 만무였다. 젊은 청년 실업자들은 무장 강도짓에 나서고 여성들은 몸을 팔러 다녔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버젓이 사람을 납치하고 가게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는 무법천지였다. 아마 이런 사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적당한 것이 금수저·흙수저, 헬조선이 아닐까 싶다.
‘깨어 있는 소수’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절망 낙담하는 대신 무기를 들고 밀림으로 들어가 민족해방, 계급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게릴라 단체를 결성하여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오랜 투쟁 끝에 내전 종식에 합의, 무기를 버리고 도시로 나와 정당으로 탈바꿈하여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직도 중남미 사회에서 부의 세습과 빈곤의 대물림 현상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이어지고 있고, 고급 교육은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브라질의 ‘국민 영웅’에서 ‘부패의 화신’으로 전락한 룰라가 대통령 재임 시절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한국의 취재필자가 룰라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다.
“브라질처럼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 왜 5000만 명이 넘는 빈곤층이 있습니까?”
룰라 대통령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한국은 1950년에 토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한국이 1948년 건국 후부터 짧은 시간 내에 산업화·민주화를 성취한 이면에는 이승만 시절 단행한 농지개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수천 년 고질병처럼 이어져 온 양반 지주계급과 소작인 관계로 이루어진 계급구조를 일거에 부숴버렸다.
그 결과 국민 누구나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었고, 빈농의 아들이건 양반의 후예건 상관없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당대에 신분상승이 가능한 나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국을 상징하는 캔 두 스피릿(Can do spirit)은 바로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필자가 방문했던 중남미 나라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나라가 ‘땅고(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농토, 드넓은 목초지에서 생산되는 농축산물을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유럽이 전화(戰禍)로 쑥대밭이 될 때 아르헨티나는 풍요 그 자체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1920~30년대의 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때문에 유럽을 탈출하여 아메리카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은 미국으로 갈 것인가, 아르헨티나로 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이 컸다고 한다.

에비타의 망령이 떠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타고 눈 덮인 안데스산맥을 넘어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을 때 이 나라에 난리가 났다. 세계적인 팝 스타 마돈나와 스페인 출신의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 거장 알란 파커 감독이 영화 ‘에비타’를 촬영하기 위해 필자가 묶었던 호텔 가까운 곳에 투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돈나가 아르헨티나 빈민들의 영웅이자, ‘빈자(貧者)의 성녀(聖女)라 불리던 에비타로 출연한 이 영화를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에서 로케이션 촬영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격렬한 ‘에비타’ 논쟁이 벌어졌다.
후안 페론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에비타의 본명은 에바 페론이다. 빈민가 출신의 영화배우 에바 페론은 군인 출신 정치가 후안 도밍고 페론을 만나면서 인생이 꼬여버렸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인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직업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고 이탈리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일으키던 무렵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했다. 페론은 이탈리아 무관으로 재직하면서 현장에서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적나라한 선동정치를 열심히 학습하여 정치의 꿈을 키웠다.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정치 참여를 모색하던 페론은 육군 대령 신분으로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신정부의 국방부장관, 노동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노동부 장관 자리는 그에서 노조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권좌에 오른 페론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아르헨티나에 적용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페론 부부는 정권 창출과 유지를 위해 노동자들을 위한 인기영합 정책을 줄기차게 도입했다. 즉 CGT라는 거대하고 조직된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고, 매년 20%에 달하는 높은 임금 인상, 파격적인 사회보장정책 등 포퓰리즘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외국자본을 추방하고 노동자 권익 향상을 위해 아낌없이 국가 재정을 퍼부어 국고(國庫)를 탕진했다. 노동자들을 편 드는 좌익 언론들은 이런 노선을 ‘페론주의’라고 명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서유럽 국가들이 전후복구를 통해 급성장할 때 아르헨티나는 페론 부부의 포퓰리즘 복지정책으로 걷잡을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 들었다. 에바 페론이 33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후 포퓰리즘 정책의 후유증으로 인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광풍이 몰아치자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페론은 권좌에서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엇다.
이런 악몽의 역사를 거쳐 온 트라우마 때문인지 ‘에비타’ 영화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로케이션을 하는 동안 좀 먹고 살 만한 계층에서는 에비타를 ‘나라를 말아먹은 화냥년’이라 욕하고, 서민과 극빈층에서는 ‘노동자와 빈민의 성녀(聖女)’라고 추앙했다. 양측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격렬하게 거리에서 맞붙었고, 에비타 지지와 저주로 편이 갈린 언론들은 제각각 찬양과 비판의 기사와 사설로 도배질 하다시피 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아르헨티나에서 지구 정반대편의 나라가 한국이다. 아르헨티나판 포퓰리즘의 정반대 정책을 펼친 나라도 한국이었다. 아니, 한국의 박정희 집권 시절 그가 추진한 새마을운동이었다. 페론 부부가 노동자 천국을 위해 퍼주기로 날을 지새고 있을 때 박정희는 철저한 성과 위주의 지원 방식을 통해 열심히 땀 흘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새마을운동은 정부가 1970년 10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전국 3만 4,665개 부락에 시멘트 300~355부대씩을 나눠준 것으로 시작됐다. 시멘트를 무상 제공하되 개인적으로 나눠 쓰지 말고 마을의 공동사업, 즉 마을 진입로 확장이나 작은 교량 건설,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공동목욕탕 건립 등에 써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일부 부락은 농가마다 개별적으로 나눠 쓴 곳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능한 리더가 있는 마을은 정부에서 지원한 시멘트로 마을 공동사업에 사용했다. 정부 지원 시멘트가 모자자라 각 가정이 조금씩 더 보태서 공동사업을 수행한 마을도 있었다. 
다음 해에 전년도 사업 실적을 평가한 결과, 절반가량인 1만 6,600여 마을은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한 반면, 나머지 마을은 별 성과가 없었다. 박정희는 성과가 뚜렷한 마을에 한해 다음 해에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을 지원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선언했다.
“스스로 노력하고 협동하는 마을은 적극적으로 돕되, 노력하지 않거나 협동하지 않는 마을은 돕지 않겠다. 이 길만이 수 천 년 내려온 의타심을 뿌리 뽑고 자조하는 정신을 자각시키는 길이다. 이와 같은 방침으로 설령 선거 때 표를 못 얻어 져서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이 신상필벌의 원칙만은 바꾸지 않겠다.”
이렇게 되자 각 마을은 정부 지원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었고,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협동 단결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정부는 농촌 지역의 소득 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전국의 농어촌 마을 곳곳에 게시되었던 ‘잘 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라는 표어.
박정희 정부 시절 전국의 농어촌 마을 곳곳에 게시되었던 ‘잘 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라는 표어.

투자도 어느 마을이나 고르게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 차별적, 경쟁적 방식을 동원해 잘하는 마을엔 더 많이, 못하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당시 전국의 농어촌 마을 곳곳에는 ‘잘 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라는 표어가 내걸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우리 손에 달렸다.
2. 제 정신 제 힘으로 살 길을 찾자.
3. 슬기와 부지런함으로 가난을 몰아내자.
4. 서로 이웃을 위하여 기꺼이 일하자.
5. 행복은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내 발로 걸어가서 찾아내야 한다.
박정희도 영국의 위대한 총리 대처처럼 자기 삶에 책임지지 않고 노력도 않는 사람에게는 하등의 연민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런 표어는 박물관에나 가 봐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인들의 선동과 무능, 적나라한 포퓰리즘으로 금자탑처럼 쌓아올린 세계 5위권의 국부(國富)를 순식간에 탕진한 나라. 그래서 세계의 정치 전문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포퓰리즘의 표본국가로 손가락질 하던 나라. 그게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 찜쪄먹을 ‘공짜 천국’ 대한민국

2019년의 한국은 아르헨티나처럼 거대한 부를 쌓아놓은 것도 없고, 나라 문 닫아 걸고 국내 자원 캐 쓰고 농축산물 소비하며 살 수 있는 자원 부국(富國)도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람들의 재주와 근육의 힘으로 뼈 빠지게 일해야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는 척박한 환경의 나라다.
하지만 2019년에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포퓰리즘을 논할 때 이제 아르헨티나는 한국 앞에서 명함조차 꺼내들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우리는 무상·복지·연금·공짜급식 등등의 용어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공짜’로 현금을 나눠주는 지자체가 속출하더니 생리대까지 공짜로 나눠주는 나라가 된 것이다.

국무회의장에 걸려 있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 세 번째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다. 국민들이 언제 내 삶을 책임져 달라고 위탁했는가?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져주는 시대가 되면, 국가는 그 대가로 국민을 조종, 통제, 억압, 자유의 박탈을 하게 된다.(연합뉴스 제공)
국무회의장에 걸려 있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 세 번째가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다. 국민들이 언제 내 삶을 책임져 달라고 위탁했는가?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져주는 시대가 되면, 국가는 그 대가로 국민을 조종, 통제, 억압, 자유의 박탈을 하게 된다.(연합뉴스 제공)

심지어 문재인 정부의 국정지표 중에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버젓이 들어가 있다. 아니, 내 삶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 언제 국가보고 책임져 달라고 위임했는가? 국가가 내 삶을 어떻게 책임진단 말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때문에 국가가 내 삶을 책임져준다면, 그 대가로 국가는 나의 자유의 일부를 규제·통제·억압·간섭하려 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공짜 복지로 인해 재정이 파탄나자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한다면서 빚을 내서 군인과 공무원 연금 보전해주는 바람에 정부가 공무원과 군인에게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액을 의미하는 ‘연금충당부채’가 1,000조 원에 육박, 우리나라 전체 부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국가부채도 1,700조 원에 이를 정도다.
과거엔 부모 세대가 자식들 잘 되라고 허리띠 졸라매고 밤 잠 잊어가며 근면한 덕에 우리는 국민소득 3만 달러까지 숨차게 뛰어 왔다. 반면에 지금은 우리 세대 편하자고 미친 듯이 빚을 내서 미래 세대에게 재정적자라는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복지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제 분수에 맞는 정도로 하는 것이 맞다. 제 분수를 잊고 미쳐 날뛰며 감언이설을 뱉어내는 무뇌아 정치인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면서 우리 정치판에는 한국판 ‘페론’과 ‘에비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대한민국은 “아르헨티나 찜 쪄 먹을 21세기형 포퓰리즘의 천국(天國)”으로 전락했다.
평등 선(善)으로, 경쟁을 악(惡)으로 생각하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신제품 개발하고 해외 시장 개척하는 기업인들을 범죄자로 몰아간다. 땀 흘려 국부를 쌓느라 목숨이 아까운 것 모르고 뛰어왔던 사람은 적폐로 몰아 감옥에 보내고, 오매불망 반정부 시위, 체제변혁운동을 하다가 운 좋게 촛불·횃불 들고 광화문에 몰려나와 정권 뒤엎은 소위 ‘민주팔이 세력’들은 사회 주류세력이 되어 아름답게 권력과 부를 향유한다.
다른 나라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밤낮 안 가리고 뛰고 있을 때, 미래 세대는 빚더미에 깔려 죽든지 말든지 오늘의 쾌락과 행복을 위해 악착같이 빚을 내서 해외여행 즐기고, 비싼 와인 수입해다가 마시며 파티를 벌이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이제 포퓰리즘의 대명사는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민낯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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