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상식을 거부하고 역사를 모독하는 아마추어 "역사강의"
전체주의 옹호하는 친독재 좌익파시즘의 언어폭력
무지와 몰상식은 타파하고, 엉터리 "공영방송"은 전면 개조해야

 

 

송재윤(맥매스터 대학 교수)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북송(北宋, 960-1127) 직전까지 천 4백 년에 걸쳐 열여섯 조대(朝代)의 정치사를 완성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그 방대한 기록을 일컬어 통감(通鑑)이라 불렀다. 역사란 인간의 진면목을 반영하는 거대한 '거울'이란 뜻이다. 폭군과 간신의 배덕과 패륜이 빼꼭히 기록된 그 거울 앞에 서면, 과거의 악인들이 훤히 보일 것 같지만, 실은 벌거벗은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마주 대하게 된다.

1970년대 말 동네아이들이 흑백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서부영화를 볼 때면, 중간에 끼어드는 친구가 묻곤 했다. “누가 나쁜 놈이야?” 악당이 누군지만 알면 영화의 플롯이 단번에 파악됐던 것이다. 사춘기 시절 근현대 세계문학을 읽으면서 현실의 인간은 누구나 악당도 천사도 아닌 '복합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젊은 시절 사형대에 올랐다가 극적으로 풀려났던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 1821-1881)는 “처형 직전에도 인간의 머리엔 수백 가지 잡념이 떠오른다”고 했다. 인간의 내면엔 상식과 합리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어둠의 대륙이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보면,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깊게 생각해 본 학생일수록 확답을 보류한 채 머뭇거리는 경우를 흔히 접한다. 인간사의 현실은 깊이 들여다볼수록 더 복잡하고 혼탁해 보인다. 아무리 파고 파도 역사의 진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학문의 종착역은 예나 지금이나 무지의 자각일 수밖에 없다. 지식의 한계를 알고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산맥 같은 역사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 질 수밖에 없다.

역사지식이 일천할수록, 디테일을 모를수록, 공부가 짧을수록, 지혜가 얕을수록, 통찰력이 부족할수록, 시비판단이 거침없고, 선악구분이 성급하다. 인물품평을 일삼고, 얄팍한 지식을 뽐낸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인류의 역사가 고작 몇 명의 악인들이 망쳐 놓은 난장판이거나 몇 명 위대한 영웅들의 서사시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예외 없이 과거의 인물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워 놓고 인민재판식 즉결처분을 통해 악인의 명부를 만든다. 동시에 소수의 선인을 가려내선 영웅의 신전에 배향한다. 조금만 역사를 공부해 보면 누구나 그런 식의 단순한 역사관은 어리석은 아집(我執)이며 망념(妄念)임을 깨닫게 된다. 큰 스승 밑에서 학부강의를 한 번만 들어도, 역사책 한 권만 정독을 해도, 두렵고 무서워서 과거사에 대한 망언과 폭언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다.

역사강의도 마찬가지다. 공부가 부족한 강사일수록 목소리가 높고, 거칠다. 두서없을뿐더러 신경질적이다. 단순화의 오류를 범한다. 섣부른 일반론을 강변한다. 때론 괴성까지 지른다. 벌컥 소리 지르고 화를 내기도 한다. 예정된 강의를 갑자기 중단하기도 한다. 청중을 속절없이 웃기려 한다. 박수를 갈망한다.

마치 스스로 과거사를 손바닥 보듯 다 안다는 듯이 거만하고, 졸속하고, 경박하게 역사의 정답을 제시하려 한다. 과거의 인물을 제멋대로 평가한다. 제 맘에 안 드는 인물에 대해선 어김없이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다. 저기 “나쁜 놈”이 있다고 선동을 일삼으며, 증오심을 부추긴다. 반면 제 맘에 쏙 드는 인물에 대해선 터무니없는 극찬을 늘어놓는다. 공영방송에 나와서 인류사 최악의 독재자를 “대단한 사상가”로 치켜세우고는 멋쩍은 듯 “그분께서 오래 사셔야 된다!”는 아부까지 늘어놓는다. 전체주의의 빅브라더를 위대한 영도자라 미화하고, 독재국가의 정치체제를 최고의 합리적 제도라 선전한다. 과장, 허언, 왜곡, 날조, 조작, 조롱만을 이어간다.

강의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한 강사의 그런 섣부른 언행이 실은 실력 부족을 덮으려는 볼품없는 제스춰(gesture)일 뿐이란 사실을. 또 그런 사람은 수십 명의 과학자들이 개개인의 명예를 걸고 수개월간 연구해서 수백 페이지의 조사 백서를 발표해도 반론도 없이 다짜고짜 “0.00001프로도 못 믿겠다”고 생떼를 쓴다. 철학적 회의주의(skepticism)는 합리적 의심의 방법이다. 철학자가 의문을 제기하려면, 의심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합리적 근거도 없이 무조건 “0.00001프로도 못 믿겠다”는 주장은 비철학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지난 20년간 미주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또 강의하면서 나는 한 평생 깊이깊이 인간을 탐구해 온 훌륭한 역사학자들을 많이 보았다. 그 훌륭한 스승들 모두에겐 공통점이 있다. 목소리는 낮고, 디테일에 충실하며, 겸손하고, 진지하고, 부드럽다. 다짜고짜 결론을 강변하기 보단 머뭇머뭇 판단을 유보한다. 치밀한 고증과 정확한 묘사로 과거사의 실상을 최대한 밝혀 청중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이끌 뿐이다. 과거에 대해 함부로 포폄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확신에 가득 차 떠들어대는 학자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또한 그런 훌륭한 학자들의 저서를 읽어 보면, 한 문장 한 문장 정직하고, 진실하고, 간결하고, 정교하고, 성실하다. 책에 욕설을 담거나 잡설을 늘어놓거나 여담에 빠지거나 불필요한 “앞잔소리,” “뒷잔소리”를 늘어놓거나 쓸데없는 긴 각주에 지식을 과시하거나 사감을 표출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무엇보다 너저분한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골방에 쳐박혀 두 달 안에 책 한 권을 썼노라며 "일필휘지" 속필을 자랑할 아마추어는 없다. 그런 사람은 선진국의 대학에 절대로 자리를 잡을 수도 없다. 또 방송에 나가서 떠들 수도 없다.

그런 훌륭한 학자들의 저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써놓은 모든 글을 모아서 불구덩이에 넣고 태워버리고 싶다.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채찍으로 때리고 싶은 심정이다. 학문의 세계는 그만큼 깊고 두렵고 넓고 험한 지혜의 바다이다. 그 앞에서 누가 감히 함부로 역사를 논할 수 있는가? 인간사의 깊은 체험을 앞에 두고 험구를 놀릴 수 있을까?

누군가 대학 강의실에서 과거의 인물을 향해 “무덤을 파버리라”는 소리를 했다면, 그날로 당장 대학을 떠나야 한다. 하물며 공영방송에 나와 수천만을 향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임에랴. 아니, 그런 사람에게 발언권을 주는 공영방송임에랴. BBC, NHK, PBS의 교육프로와 비교해 보자. 아니, 당장 유투브(youtube)에 올려진 전 세계의 명강의를 경청해 보자. 진정 공영방송의 역할은 무엇인가?

MIT 아쎄모글루(Daron Acemoglu)교수, 시카고 대학의 로빈슨(James Robinson)교수, CNN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정치학자인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 박사는 모두 대한민국을 세계사 최고의 성공사례로 꼽고 있다. 인구 5천140만의 대한민국은 실로 불과 반세기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하고 소득 3만 달러의 위업을 달성한 세계 8대의 부강한 나라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문화대국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더는 편향된 지식, 왜곡된 정보, 폭력적인 언어로 대중을 오도하는 단 한 명의 극단주의자에 전파를 몰아줄 순 없다. 세계인의 상식을 거부하고, 전체주의 정권을 옹호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독하는 'F학점의 역사강의'가 용납될 순 없다. "F학점의 역사강의"를 제작해서 나라의 교육을 망치는 엉터리 공영방송은 더더욱 용납될 수 없다.  

“F학점의 역사강의”는 가라! 가짜역사는 가라! 가짜역사를 유포하는 공영방송은 차라리 방송을 중단하라. 

겸허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역사의 거울을 들여다 볼 때다. 유럽의 격언처럼, 예나 지금이나 “우인(愚人)은 체험에 의존하고 현인(賢人)은 역사를 본다.”

송재윤 객원 칼럼니스트(맥매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조용히 입을 닫고 역사를 사랑하라!" (한 대학의 역사학과 홈페이지에서)
"조용히 입을 닫고 역사를 사랑하라!" (한 대학의 역사학과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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