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는 상무정신 함양과 기사도 정신의 교육장. 애국·충성·복종·희생·책임·용기의 기사도(騎士道)는 오늘날 우리의 군인정신과 같다
◎ 부하에게 생명을 걸면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한 병사가 된다
◎ 6·25 때 우리 국군이 인민군보다 훨씬 용감하게 싸웠다
◎ 국가정책 중 가장 어려운 것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

오래 전의 파일들을 정리하던 중 지난 2003년 작고한 이병형 장군과의 대담 파일을 발견했다. 이 장군과의 대담은 1997년, 이 장군이 은퇴생활을 하고 있던 주문진을 찾아가 나흘 간 진행했는데, 그 대담 내용을 꺼내 읽으면서 이 분이 지금 이 난세에 살아계셔서 군을 이끌게 된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장관이란 사람이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을 기억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기 위한 서해 수호의 날에 대해 “서해상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남북 간의 충돌들, 천안함을 포함해, 여러 날짜가 있기 때문에 다 합쳐서 추모하는 날”이라고 망언을 내뱉질 않나, 북한과 이상한 군사합의를 하여 스스로 무장해제에 앞장서고 있다.
급기야 수백 명의 예비역 장성들이 현직 국방부장관 사퇴를 요구하고,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국방부장관 해임건의안을 제기하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다. 오래 전 대담 내용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념과 코드에 붉게 물들어 스스로 나라 지키는 군대를 포기한 지 오래인 썩어빠진 군에 쇠몽둥이를 들기 위해서다.

6·25의 전쟁영웅 이병형 예비역 육군중장. 대한민국의 수많은 군인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장군을 군 사회에서는 군사전략서의 명저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1926년 함북 북청 출신의 이 장군은 1947년 육사(4기)를 졸업하고 6·25에서 용맹을 떨쳤던 수도사단 18연대(백골부대)의 연대부관, 18연대 1대대장, 보병 제8연대장으로 참전하여 130회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부대 단위 전투에서 패하지 않고 승리함으로써, 불패(不敗)의 신화를 창조한 명장(名將)이다. 전쟁 후엔 제1사단장, 5군단장, 합참본부장, 제2군사령관 등을 지내며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진 방위산업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1976년 제2군사령관을 끝으로 군문을 떠난 이 장군은 전쟁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며 용산 전쟁기념관 설립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기념관 개관을 3개월 여 앞두고 은퇴하여 분당과 주문진 사이를 오가며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 기자는 그를 주문진까지 찾아가 나흘 간 하루 8시간씩 인터뷰했다.
이 장군은 예편 후 자신의 전쟁 체험기인 『대대장』 을 집필하여 후배들에게 선사했는데, 이 저서는 오늘날 대한민국 장교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 됐다. 그 후 이 장군은  『대대장』 에 다 쓰지 못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연대장』이란 책을 출간했다. 오늘날 ‘이병형’이란 이름은 용산 전쟁기념관 1층의 다목적 세미나실 이름으로 살아 있다.
군사학 박사 김국헌 장군은 이병형 장군을 탁월한 전술지휘관일뿐더러 국군 최고의 전략가라고 평했다. 그는 『대대장』 저서에 대해 “이병형이 북진 과정에서 각종 부딪치는 각종 상황에 대한 조치와 병사들의 통어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실로 대대전술교범의 살아 있는 교본으로서, 기계화전술의 교본 『롬멜전사록』에 비견될 수 있는 명저”라고 평했다.
이러한 몇 줄의 이력으로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이 장군이 살고 있는 강원도 주문진의 주공아파트를 찾았던 것이다. 그와 인터뷰를 한 지 20여 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지난 후에 다시 그 분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병형 같은 진정한 군인, 무인(武人)이 너무나도 그리워서다.
이 장군을 처음 대한 순간, 기자는 마치 태산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듯한 강인한 인상을 받았다. 그 강인함은 관음보살 같은 넉넉한 미소와 느릿느릿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말투,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기억력, 신념에 찬 의지로 더욱 구체화되는 느낌이었다.

전쟁은 모든 권력과 제도의 파괴

전쟁의 속성은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이다. 이 장군은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용케 살아남은 행운아였다. 그는 6·25라는 역사적 사실은 처참한 동족상쟁의 비극이었지만, 그러한 비극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줄고 있고, 사회 분위기도 전쟁은 남의 일처럼 여기며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 장군께서는 전쟁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쟁은 모든 권력과 제도의 파괴이자 역사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전쟁을 학술적으로 풀이하여  정치의 연장선 이라고 합니다만, 이런 해석으론 무자비한 파괴와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전쟁을  정치의 표리 라고 이해합니다.”
-이 장군께서 쓰신  『대대장』 저서를 보니 6·25는 동족상쟁의 비극이 틀림없지만 우리 민족이 1천3백여 년만에 재무장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백만대군을 지휘 운용할만한 위대한 군인들을 탄생시켰다고 지적했는데요.
“군사력은 민족의 비극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6·25를 통해 국가의 자존을 위해서는 맨주먹으로라도 싸워야 한다는 의지를 배우게 됐고, 또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죠. 또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 즉 우리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위험의 선두에 서서 국민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고 봅니다.”
-이 장군께서는 우리나라가 문무의 불균형으로 군사력이 약화되어 망국의 비운을 겪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문민 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는데요. 이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 출신들은  문민이란 말에 저항감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그 말 속에 군이 악역을 담당했다는 의미가 깔려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6.25 당시 백골부대로 불렸던 수도사단 18연대 1대대장 이병형은 수많은 부대단위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명장이다.
6.25 당시 백골부대로 불렸던 수도사단 18연대 1대대장 이병형은 수많은 부대단위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명장이다.

정부는 군대 조직의 확대판

-문무겸전, 즉 문(文)과 무(武)의 조화가 국가 구성의 궁극적 이상이라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문민 이란 용어가 문에 대한 우월의식을 강조하지는 않을지, 또 군사문화를 청산한다면서 상무정신을 업신여겨 새로운 형태의 대립과 갈등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들이 많았는데요.
 “오늘날 선진국은 문무를 잘 조화시켜 국가를 운영하고 있어요. 미국에서는 사관학교 출신은 5년간 의무복무하고 제대 후 공무원으로 임용하기 때문에 고급 공무원 중에는 사관학교 출신이 상당수라고 하더군요. 나폴레옹이나 드골,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뎅과 같은 엘리트를 수없이 배출한 파리 이공대(理工大)는 원래 육군포병학교였습니다. 30년 전만해도 이 학교는 현역 육군 소장이 교장을 맡았습니다. 이것이 문무겸전의 일반적인 틀이죠.
국가의 정부는 군대 조직의 확대판입니다. 선진국은 군인들이 몇백 년 통치하며 군 조직과 행정조직을 일치시켜 오다가 현대에 이르러 정부와 군으로 분리된 겁니다. 우리는 문민정부를 통해 군사문화가 정신문화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를 깨닫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처럼 군사문화와 문민문화를 분리하고, 또 군사문화의 폐단을 지적하며 문민의 우위성을 강조하려는 의식은 어디에서 연유했다고 보십니까.
“국민정신의 중요한 덕목인 기사도, 즉 애국 충성 복종 희생 책임 용기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물질적 풍요나 공업생산력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기사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이 있어야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요. 우리보다 오랜 전통과 국민정신으로 무장된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애국 충성 복종 희생 책임 용기로 상징되는 군사문화는 매우 소중한 덕목입니다.”
이 장군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는 무사통치(기사통치) 형태와 문민통치 형태가 있었다며 각각의 통치형태의 장단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무사통치로 역사발전을 경험한 나라는 왕 자신이 기사(騎士)이며, 국가 지도부도 기사로 구성됩니다. 이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고, 선비들로 국가 지도부를 형성한 문민통치국가는 식민지로 전락하며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전되기 이전 시대에는 대지에서의 수확 이 경제활동의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대지의 생산은 늘 부족했고, 경작 가능한 대지도 한정되어 이 시대엔 전쟁을 통한 영토의 확장이 경제 활성화와 부국강병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전쟁은 국가의 생존을 담보한 제로 섬 게임입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과학적 연구 와  국민의식교육 이라는 두 가지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과학의 발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한 결과입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도 적시에 물자와 병력 수송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기술이 산업분야에 활용되어 오늘과 같은 고도 산업사회의 원동력이 된 거죠.
또,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상무정신의 강화를 위해 꾸준히 국민의식교육을 시킵니다. 무사통치국가의 근본이념은 기사도입니다. 그것은 국가를 사랑하고(애국), 국가에 충성하며(충성), 상관의 명령에 복종(복종)하고,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희생), 임무에 책임을 다하고(책임), 용기를 세우는(용기) 오늘날 우리의 군인정신과 같습니다.”

군복무는 기사도 함양의 교육장

-우리 역사에서도 화랑이라는 기사도 집단과 그 정신적 이념이 존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소멸하면서 문무겸전의 틀이 무너지고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문을 숭상하는 문화가 지배했다고 보는데요.
“그렇습니다. 신라는 중국의 힘을 빌어 통일을 했고, 동이(東夷)에게 생존을 위협받았던 중국은 우리에게 과거제도라는 문민통치의 틀을 요구하면서 상무정신이 퇴색해 갔습니다. 선진국은 무사통치를 경험하며 전쟁을 현실로 인식하고 과학기술과 정신문화를 꽃피웠지만, 우리는 문민통치 구조를 이어오며 전쟁을 두려워하고 국민정신은 나약해졌습니다. 전쟁이라는 사생결단의 현실을 회피한 채 비 오면 농사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만 바라보는 소극적인 의식에 젖게 된 겁니다.
또, 무사통치국은 국가운영구조가 지방분권적인 장원문화이고 문민통치국은 중앙집권 문화입니다. 무사통치국은 전쟁으로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영주에게 영토와 농민을 분배합니다. 그 대가로 평시와 전쟁 시 물자와 병력동원의 의무를 부과하죠. 영토와 농민은 영주의 소유로서 세습되기 때문에 수탈이나 부정부패가 구조적으로 줄게 됩니다.
문민통치국은 행정구역별로 지방을 분할한 후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합니다. 관리는 한 지역에서 2~3년 정도 순환근무를 하므로 지역민을 수탈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부정부패의 구조적 모순이 오늘까지 반복되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알력과 불신이 이어져 온 겁니다.”
-기사도는 오늘날의 군인정신과 같하다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군 복무는  상무정신 함양과 기사도정신의 교육장 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군이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기사도와 같은 군인정신을 철저히 가르쳐 사회에 내보냈기 때문에 국가발전의 기틀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수상이 텔레비전에 출연해 중동 사막에서 일하는 한국 청년들을 칭찬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사막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을 보면서 리콴유 수상은  한국 근로자의 강인한 정신은 군이라는 특수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 이라며 부러워하더군요.
희망이 없으면 생존도 없습니다. 승리하는 역사만이 생존을 담보하는 겁니다. 우리는 군 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 는 정신교육을 시켰고, 월남전을 통해 그러한 가치관을 직접 체험시켰습니다. 그것이 자원과 기술의 불모지에서 오늘과 같은 경제의 약진을 가져온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지도자 그룹일수록 軍 기피하는 한국 사회

-군사문화에 대한 비판은  권위주의의 타파라는 측면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는데요.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부모가 자식을 죽인 패륜사건을 언론은 30년 군사문화의 악습으로 보도했더군요. 저는 권위주의가 왜 지탄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인간사에서 권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매우 실망스러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상하관계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상호간에 아무 제약이나 통제가 없는 원시사회를 지향하자는 뜻인지….” 
-젊은이들 사이에 현역 입영은 ‘어둠의 자식’, 방위 입영은 ‘장군의 아들’, 병역 면제는 ‘신의 아들’이라는 우화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군복무 기피현상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데요. 그 원인과 치유방법을 국가 차원에서 연구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원래 군대란 한 나라의 지도급 인사나 지배세력을 주축으로 조직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선진국은 대부분 그러한 역사과정을 겪어왔습니다. 프랑스는 군 경험이 없는 인사는 대통령 출마자격을 제한하는 전통이 있다고 하더군요.
현역시절 저와 교분이 있던 모간 주한 미 해군사령관은 유명한 금융회사인 모간 그룹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는 하바드대 재학시절 해군사과학교에 입교하라는 집안의 결정에 따라 사관학교에 입교했어요. 오늘날 미국 지배계급은 모두 군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사들입니다. 그 집안의 자제들이 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제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회의 지도급 인사로 성장한 것이죠.
우리 현실은 지도자 그룹일수록 군 입대를 기피하는 풍조가 역력합니다. 6·25 때 전선에서 싸운 것은 월남자(越南者)와 길거리에서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온 힘없는 서민의 아들, 일부 학도병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면장만 지내도 그 아들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징집면제를 받게 만든 것이 현실이었으니까요.”
이 장군은 정치인들이 군복무를 기피하고 타락하면 국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말했다. 6·25를 경험한 국민들의 사회심리라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데올로기보다는 남과 북 어느 쪽이 힘이 센가에 관심이 큽니다. 6·25 초기에 우리 정부는 국민 보호에 실패했고,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목숨이 달아난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까요. 우리가 북한과의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이긴다는 보장이 있어야 국민은 정부를 신뢰합니다. 국가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합니다.”

국가 지도자의 군 경험은 필수적이다

-우리 정치인이나 국가 지도자들 중에는 병역의 의무를 필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군 경험이 왜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국가를 생각하는 개념이 다릅니다. 인간은 위기에 닥쳤을 때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군사적 판단을 해야 할 때 군 경험이 없는 국군통수권자나 정치인들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군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부를 구성할 때 국가안보 에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됩니다.”
이 장군은 군 경험이 없는 기업인이나 정치인, 언론인, 대학교수 등은 육군대학이나 국방대학원 과정을 이수시켜 군의 본질을 이해하고, 국가 이익과 안전보장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삼는 자세를 길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애국·충성·복종·희생·책임·용기라는 군인정신의 궁극적인 지향은 국가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 즉 애국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요.
“국가 구성의 3대 요소는 영토·주권·국민이라고 배워서 알지만, 애국이 무엇인지는 교육시키지 않았습니다. 애국이란 국가의 주체인 국민, 즉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이 땅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애국이라고 할 수 있죠.
선진국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국가관과 전쟁관을 길러왔습니다. 전투에서 부상한 전우를 살리기 위해 업고, 메고 사지(死地)를 탈출하면서 평상시에는 느낄 수 없는 우정과 우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남의 자식이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배워온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국민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에 직면해 있는 겁니다.”
이 장군은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사통치의 역사발전단계를 거쳐 온 선진국들과 무한 경쟁을 해야하는데, 그들과 경쟁하려면 정신력 강화를 위한 국민정신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농민을 산업 노동자와 군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그들의 의식수준을 기사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전념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유신 지도부는 사무라이 제도를 폐지하고 선진국의 근대국가제도를 모방하여 국민정신교육을 강화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사범학교를 세워 사무라이를 교사로 양성했습니다. 이들이 평민을 사무라이 정신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을 담당한 겁니다. 일제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교단에 선 이유는 자신이 사무라이 출신임을 긍지로 여겼기 때문이죠.”

평화는 전쟁을 통한 승리의 결과

이 장군은 우리 국가 지도부는 평민을 량반으로 끌어 올리는 정신교육을 시도할 의욕도 능력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양반계급이 평민의 의식을 양반으로 끌어올리는 교육을 다른 나라보다 먼저 시작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불행은 겪지 않았으리란 것이다. 평민을 양반화하는 노력이 없는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생활을 했고, 해방이 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애국심이라는 국민정신교육이 전무했다는 지적이다.
 “전쟁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일화입니다. 6·25의 재조명을 위해 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 참전국 학자들이 모여 심포지움을 연 적이 있습니다. 전쟁문학을 전공한 미국의 윌리엄스 교수가 날카로운 지적을 하더군요. 미국은 전쟁문학 작품은 어떤 전투를 막론하고 영웅을 설정하여 그의 활약과 교훈을 독자에게 전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전쟁문학을 분석해 보니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데 놀랐다는 겁니다. 전쟁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고생했고, 고통을 받았으며 비참했는가를 나열하는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 영웅을 만들지 못하고, 개인적인 고통으로 전쟁을 혐오하는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평민을 양반화하는 국가관 교육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국제관계에서 모든 사고방식은 국가이익으로 귀결됩니다. 또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통한 승리의 결과라고 합니다. 전쟁과 평화, 이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느 일본인이 ‘한국은 적을 눈앞에 두고 평화병에 걸려 있다’는 칼럼을 본 일이 있습니다. 국제관계는 군사력이 없으면 존재를 인정받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만 평화애호를 주장하면 주변국에게 ‘우리는 힘이 없다’고 항복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죠.
국가정책의 목표를 ‘평화’에 두면 전쟁을 부정하고 군비를 축소하며 자주국방의 기틀인 방위산업을 등한시 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따지고, 자위적 목적에서 전쟁도 하고 침략도 해본 경험이 있어야 살벌한 국제무대의 현실을 이해할 텐데,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겁니다.”
이 장군은 2천년 전 자주국방을 통해 국가의 위엄과 개인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는 순열(荀悅·중국 후한 말기 조조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강의한 정치철학자)의 정치철학에 감동한다고 말했다.
“순열은 정치지도자는 네 가지 우환이 되는 일을 하지 말며, 다섯 가지의 뜻을 세우라는 정치철학을 설파했습니다. 우환이 되는 네 가지 일은 위선적인 정치를 하지 말라, 사욕을 위한 정치를 하지 말라, 교만하고 방종한 정치를 하지 말라, 사치를 조장하는 정치를 하지말라는 뜻입니다.
다섯 가지 뜻을 세워야 할 요소는 백성을 배불리 먹여 살리며, 군주가 모범을 보여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다. 교육을 통해 국민수준을 계속 높이며, 자주국방을 통해 개인의 위신과 국가의 위엄을 높이고, 신상필벌로 옳고 그름에 대한 목표를 명확히 하라는 뜻이죠. 우리 국가 지도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군은 오늘과 같은 평화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중국경제가 선진국의 기득권을 위협할 때 그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따지고 보면 기성 경제대국이 신흥 공업국을 상대로 집단린치를 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국가 지도부는 안보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할까.
“만약 미일 간에 제2차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거나, 미중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는 국가의 운명을 걸고 어느 한 편에 가담해야 합니다. 국가안보 개념이 의심스러운 우리 정치인들이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한일합방은 싸우지도 못하고 전쟁에서 패한 결과

‘국가의 힘을 조직화한 군사력은 민족 역사의 비극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같고, 따라서 군사 지도자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자주독립은 국가안전보장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한 사실은 국가란 전쟁이라는 인간투쟁의 소산이고, 멸망이란 또한 전쟁의 결과에  연유된다는 사실이다.’ (이병형 저 『대대장』)
-전쟁이란 끝없는 전투의 연속으로 이해됩니다. 이 장군께서는 저서 『대대장』에서 “전투는 행군의 끝이며, 행군은 전투를 위한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전투를 해본 경험을 소개해 주십시오.
“전투란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리다가 정면충돌할 때의 섬뜩함이랄까요. 아니면 거대한 댐이 무너져 해일과 같이 쏟아져 오는 물길 앞에 선 느낌입니다. 전투는 극한과 비관만이 존재하고 낙관과 유리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승전이란 극한과 비관속에서 열심히 싸우다 얻어지는 결과일 뿐이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손자(孫子)는 두 가지 원칙, 즉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말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원칙으로 병법을 주장했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전쟁은 할 필요가 없는 거죠.  한일합방 전에 우리 국방력은 군사가 7천 명 정도였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백만 대군이 근대무기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손자병법으로 해석하면 우리는 전쟁을 해보지도 않고 패하여 국민이 노예로 전락한 거죠.”
-우리 학계에서는 6·25의 성격에 대해 전통주의, 수정주의가 거론되더니 최근에는 내인론(內因論), 외인론(外因論), 남침유도설 등 수많은 이론적 근거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아픈 기억’이라는 6·25 포스터를 만들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고, 6·25를 ‘동족간의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해석하는 장관도 있었는데요.
 “그것은 대단히 낭만적이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80~90% 정도가 민족 간의 내전이었고, 나머지가 이민족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일본도 몇백 년간 섬에 갇혀 민족 간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해 오늘의 국가를 성립한 겁니다.”
-전선에서 인민군과 부닥쳤을 때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한 적은 없었는지요.
“인민군은 타도해야 할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일부 지식인이나 진보적 인사들은 전쟁을 너무나 감상적으로 해석하는데요. 6·25를 동족간의 명분 없는 전쟁으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은 국민에 대한 정신적 무장해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교육받은 병사가 용감하다

-전쟁터는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모습이 표출되는 곳으로 상상됩니다. 실제로 전투에 돌입하면 어떤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웁니까.
 “저는 전투경험을 통해 적나라한 인간본성을 관찰하면셔 그동안 알려진 풍문과 달리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용감하게 싸운다는 사실을 인상 깊게 체험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염치가 없고 자기 가족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야간방어전투에서 진지가 돌파당하는 이유는 대부분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의 진지이탈 때문입니다. 진지를 이탈한 병사들은 위치파악을 못하기 때문에 전선 후방의 취사장이나 박격포 진지 등 불꽃이 보이는 곳으로 모이니다. 후방을 책임진 장교들은 이곳에서 진지이탈자들을 모아 주의를 주고 교육시켜 원대복귀 시킵니다.”
이 장군은 전투에서 용감한 군인은 심성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극한상황에 처해도 적에게 끝까지 타격을 가한다 는 신념으로 용감하게 싸운다는 것이다.
반면에 부정적 사고를 가진 군인은 전투를 하기도 전에 철수나 후퇴를 염두에 둔다고 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지휘하는 부대는 정신력이 허약해지고 매 전투마다 소극적으로 대응해 패배하게 된다는 것이 이 장군의 설명이었다.
-이 장군께서는 전쟁을  극심한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남북 간에 위기감이 돌면 싸울 생각은 뒷전인 채 라면이 동이 나고 생필품 사재기 경쟁을 벌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병법가 오기(吳起)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덕(德)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덕의 첫째 요소는 도(道), 즉 전쟁수행이나 국가운영에서 원칙에 의해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의(義)로서, 대의명분에 따라 정의로운 전쟁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예(禮), 전쟁이나 정치에서 비굴하거나 교활한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인(仁), 즉 중요사를 독선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죠. 지도자가 이러한 덕을 갖추고 전쟁에 대비하면 나라가 질서를 유지하고 백성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며,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이 장군의 저서 『대대장』을 보면 6·25 첫날 전투를 위한 작전지도 한 장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무방비상태에서 어떻게 전쟁을 했는지 상상이 안갈 정도였습니다.
“오기는 장수의 자격이나 처신을 설명한 『장수론(將帥論)』에서 ‘전쟁을 위한 군사행동을 하기 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부하들에게 임무와 목적을 이해시켜 일치된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준비가 되지 않은 전투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어요. 6·25는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었습니다. 그 때는 정치가나 군인, 국민들이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혼란의 연속이었죠. 그러다보니 정부가 국민을 버린 결과가 되어 오늘까지 정부와 국민 간에 보이지 않는 불신감을 조장하고 있는 겁니다.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가족이 학살당하고 랍북당한 국민 입장에서는 정부란 무엇인가,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무엇하는 존재인가를 의심하는 사고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국가 지도자나 정치인은 뼈아프게 각성해야 합니다.”
-이 장군께서는 지휘관의 중요성을 누누히 역설했습니다. 지휘관의 덕목이나 판단능력, 역량은 군대조직 뿐만 아니라 사회조직에서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는데요. 지휘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휘관은 임무와 목적을 제시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 임무와 목적을 성공적으로 완수시켜야 하는 책임을 진 사람입니다. 마오쩌둥은 『간부정책』을 통해 군 간부의 덕목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간부는 간부를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간부는 즉각적인 투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국가가 간부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중에서 간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많은 사람 중에서 간부가 될 사람을 고를 줄 아는 능력 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여 중요한 일을 맡기는 일이 간부의 중요한 자질이라는 겁니다.”

지휘관의 솔선수범이 한국적 지휘통솔의 비결

-전투지휘를 하면서 한국인의 심성이랄까, 성격상의 특징같은 것을 느끼셨을 텐데요.
“우리 민족을 일컬어 흔히 한(恨)의 민족 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이라는 것은 매우 우수한 자질을 가진 국민들이 통치자들의 잘못된 지도로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데서 온 의식구조라고 봅니다. 우리 국민은 그런 한(恨)으로 똘똘 뭉쳐서 그런지 심성이 대단히 감상적이고 예민합니다. 이들을 원활하게 지휘 통솔하려면 지휘관이 병사들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죽는다는 각오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적 지휘통솔의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지휘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희생적 사고가 없으면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리더로서의 우열은 지적(知的)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자기가 맡은 일을 추진할 수 있는 희생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장군은 지휘관의 리더십과 희생정신을 감동적으로 체험한 사례를 소개했다.
이병형 대위가 지휘하는 18연대 1대대는 청진 이북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철수한 후 다시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서 방어 작전을 펴던 1951년 1월 초, 인민군 10사단이 그제서야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월정사 부근으로 철수하다가 1대대의 기습을 받았다. 이 장군의 저서 『대대장』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인민군 포로에게 너의 사단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단장은 이미 통과했다고 한다. 나는 혼자말로  그놈을 잡았어야 하는 것을  하고 독백했는데, 그 포로는  자기들은 죽어도 사단장 동무는 살아야 합니다 하는 것이다.
지금 무슨 말을 했느냐고 다그치자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 포로의 대답은 자기들이 대구 팔공산에서 보급이 두절되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는데, 자기들은 하루 두 끼씩은 겨우겨우 식사를 했지만 사단장은 거의 먹지 않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들은 죽어도 좋지만 사단장은 살아야 한다는 근본적인 이유인 듯 싶었다.’
-지도자가 전쟁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전쟁은 사람과 사람의 대결입니다. 미국의 천재학자 J 바담은 ‘국가 간의 능력의 우열은 그 나라 엘리트들의 능력의 우열’이라고 설명했어요. 국가가 엘리트를 길러내는 과정,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과정, 능력발휘에 관한 방법의 차이가 곧 국가능력의 차이이며, 국가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뜻이죠. 국가를 지도하는 엘리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으면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도자들의 책임이기도 하죠.”

부하에게 생명을 주면 부하들이 용감해진다

-이 장군께서는 저서를 통해 대대(大隊)의 중요성을 역설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전투부대로서 대대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대대는 전술단위 부대로서 공격이나 방어, 행군 시 언제나 한 팀이 되어 같이 행동합니다. 연대장이나 사단장은 대대의 전투부대와 함께 행동하기 어렵습니다. 지휘 폭이 넓고 전투부대와는 4~8Km 후방에 지휘본부가 위치하기 때문이죠. 반면에 대대장은 병사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는 최대의 전투단위입니다. 전선에 배치된 각 대대의 승리는 곧 상급부대의 전술적 승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대대의 역할과 임무가 매우 중요하죠.”
-이 장군은 6·25의 전쟁영웅으로서 대대단위 전투에서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신화의 주인공인데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죠.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부대도 전체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고군분투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았다 해도 수백 회의 전투에서 한 번의 판단 실수 없이 승리로 이끈 사실을 단순히 운으로만 돌리는 것은 너무 겸손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3년 여 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제가 소속됐던 수도사단 18연대는 6·25 전쟁 전에 옹진에 주둔하며 전투경험을 쌓았습니다. 그 때 우리는 ‘백골부대’라는 명칭을 얻게 되어 대단한 긍지로 여겼습니다. 신병들도 이틀만 지나면 고참병과 같은 긍지로 임무를 수행해 준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백골부대의 원조였던 수도사단 18연대는 1950년 12월, 함경북도 성진에서 부산으로 철수하며 3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대신 3사단 26연대가 수도사단으로 배속됐다. 현재는 3사단이 백골부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병법서를 아무리 뒤져봐도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없다고 합니다. 이 장군의 전투경험으로 볼 때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부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 전투에서 이기는 최상의 비결이더군요. 지휘관이 부하를 위해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부하들이 이해하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활기차고, 용맹해지며,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 지휘관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합니다.
행군 도중에 도로상에 나무가 쓰러져 있을 때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제가 앞으로 나가려면 병사들이 먼저 뛰어가 처리합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지휘관이 부하를 위해 목숨을 걸면 부대는 엄청난 사기와 위력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병사들이 흔쾌히 죽음의 언덕으로 돌진해 가는 용기가 생기는 겁니다.”

백골부대 불패 신화의 원동력

-백골부대도 구성원이 다른 부대와 다르지 않았을 텐데요. 오직 백골부대만이 그런 명예나 긍지를 이어온 원천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백골부대는 후에 국방부장관을 지내신 임충식  장군이 지휘하는 연대였습니다. 그 분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지휘관으로서 큰 덕성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부대원의 선두에서 모범을 모였고, 작전운영계획을 잘 세운 덕이 천하무적 백골부대의 명예와 전통이 생긴 겁니다.”
-부대의 전통이나 기강이 서 있으면 신병들도 그 전통에 쉽게 동화가 되는지요.
“평상시에 명예와 긍지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적이 만들어줍니다. 전투 중에 포로를 심문하면 우리가 백골부대인지도 모르면서 ‘백골부대를 만나면 겁을 집어먹어 능력발휘를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병사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용기백배하고 백골부대의 긍지와 자부심이 강해지더군요.”
여기서 잠시 6·25의 최대 고비였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수도사단 18연대의 활약상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 후 군내에 침투한 좌익분자 소탕을 위해 대대적인 숙군작업에 돌입했는데, 이때 4,500여 명의 장교와 하사관이 옷을 벗었고, 5,000여 명은 탈영했다. 당시 군 전체 병력의 10%가 결원이 생긴 것이다. 이 빈 자리를 북에서 월남한, 반공정신이 투철한 서북청년단 등이 입대하여 빈 자리를 채움으로써 강력한 반공군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서북청년단원들이 18연대에 자진 입대하면서 “죽어서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는 뜻으로 연대장 이하 전원이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은 데서 부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수도사단 18연대는 전투를 했다 하면 승리하여 인민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공이 뛰어나 부대원 전원이 두 번이나 일계급 특진을 했다. 1950년 9월 9일, 경주 지역 방어선이 적의 대공세로 위태롭게 됐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수도사단 18연대 연대장 임충식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우리 대한민국의 명운은 오직 백골부대 여러분의 용전에 달려 있다. 여러분의 백골로서 경주를 사수하라. 본직(本職)은 여러분의 분발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히 말하노니, 여러분은 경주를 무덤으로 삼아 전원 옥쇄하라!”

정일권 참모총장, 백골부대에 "전원 옥쇄" 명령

이처럼 긍지 높은 연대에 육군참모총장이 옥쇄를 명하자 임충식 연대장은 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우리 연대의 영예 높은 백골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가 왔다. 참모총장 각하의 각별하신 격려의 뜻을 받들어 연대장은 진두에 서서 경주를 사수할 것이다. 이 연대장이 진두에서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누구라도 좋다. 이 연대장을 쏴 죽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연대장의 시체를 방패삼아 최후의 일병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그 대신, 너희들 중에 우리 백골정신을 더럽히는 자가 있을 때엔 이 연대장이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다.”
연대 장병들은 일제히 “백골! 백골! 백골!”을 삼창하고 ‘결사(決死)’ 두 글자를 백골 철모에 동여매고 경주를 지켜냈다. 경주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지원 나온 미군 제19연대와 협동하여 안강-기계를 탈환하는 동시에, 인민군 제12사단을 역포위 하여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텐데요.
“생명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 임무수행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부대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려면 임무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을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백골부대라는 특수한 부대를 지휘하면서 늘 유리한 전투를 해 왔기 때문에 병사들이나 지휘관도 늘 전투에 자신이 있고, 패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전쟁의 속성을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그 본질은 파괴와 살육입니다. 병사들이 적과 부딪쳤을 때 무시무시한 파괴와 살육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사병들뿐만 아니라 일반국민에게 전쟁의 대의명분, 즉 왜 우리가 전쟁을 해야 하며, 꼭 승리해야 하는가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쟁이라는 과격한 정치적 현실의 명분을 이해시켜야 고통과 죽음을 이겨내는 정신력이 생깁니다. 그러한 명분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전쟁의 공포와 고통과 죽음을 고민하고, 그 결과는 전력의 약화로 이어집니다.”

군 통수권 무시하면 국가안보가 위태로워 진다

-전투의 양상은 공격과 방어라고 합니다. 경험상으로 볼 때 공격과 방어 중 어떤 상황이 더 싸우기 편하다고 보십니까.
“같은 전투라도 방어할 때가 긴장감이 더합니다. 방어진지를 형성한 곳에 적이 접근하면 공포심이랄까 긴장감이 극도로 증대됩니다. 막상 총격전이 벌어지면 그러한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지더군요. 공격할 때는 조금 여유가 있는 것 같아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공포감이 거의 없습니다.”
-전투부대가 공격과 방어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병사들이 명령받은 대로 움직여주는 겁니다. 실제 전투에 임하면 병사들이 지휘관이 원하는 대로 원활하게 움직여집니까.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군대가 아니죠. 그것은 평소의 훈련을 통해 연마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서부터 분대장에 이르기까지 통수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평시에도 군 통수권에 해가되는 군 지휘관의 인사나 상벌조치는 신중해야 합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과 더불어 육군참모총장이 전격 해임되고 최고 지휘관들이 사정(司正)의 명목으로 여론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
“2차 대전의 영웅 롬멜은 히틀러 암살의 주모자였습니다. 히틀러는 롬멜의 범행을 알고도 그를 즉각 체포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스스로 자결할 것인가, 아니면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인가를 결정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롬멜은 자결을 택했고, 히틀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군대의 통수권에 영향을 미치면 국가의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어요. 군 지휘관의 통수권이란 안보를 책임지는 조직을 맡기고 국가가 절대적인 위엄과 위신을 특별히 부여한 겁니다. 만약 통수권 계통에 있는 군 지휘관들의 위엄을 훼손시키면 유사시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군 통수권을 신성시하는 이유죠.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군의 최고 지휘관들을 비리혐의로 몰아 여론재판을 한 것은 통치권에 대한 인식부족, 국정운영경험 부족이었다고 봅니다.”

즉결처분은 지휘통솔에 문제가 있다는 뜻

-육사 8기들이 펴낸  『노병(老兵)들의 증언』이란 책에는 6·25 전투과정에서 장교들의 즉결처분 문제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즉결처분이 꼭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즉결처분은 우리 군에만 있는 제도는 아닙니다. 인민군은 다반사로 즉결처분을 행했어요. 그들은 돌격을 명령했을 때 말을 안 들으면 무조건 즉결처분하더군요. 2차 대전 때 유럽 각국도 즉결처분을 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긴 하지만 약식 재판과정을 거친 후 즉결처분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즉결처분이 꼭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즉결처분을 안 해도 잘 싸우는 부대가 있고, 즉결처분을 해도 통솔이 어려운 부대가 있습니다. 결국 즉결처분이란 지휘통솔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죠.”
이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돌아가신 송요찬 장군이 즉결처분 문제로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됐을 때 송 장군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송 장군에게 즉결처분 당한 17연대 대대장은 비상식적인 작전지휘로 피해를 입은 인접부대 지휘관들이 문제를 제기하여 즉결처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송요찬 장군은 지휘관으로서는 상당히 엄격하고 어려운 존재였다고 한다. 이 장군은 6·25 당시 송 장군과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전세가 역전되어 18연대 제1대대는 경주 인근의 형산강을 도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인민군은 형산강 너머 형제봉 8부 능선에서 강력하게 저항했어요. 송요찬 사단장은 주간 도하를 하여 형제봉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연대에서는 피해가 막심할 것 같아 사단장이 직접 주간 도하를 지휘해달라고 꾀를 냈죠.”
이 장군의 저서 『대대장』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사단장께서(송요찬) 직접 연대 관측소를 방문하고 재도하를 시도하라는 현지명령에 의해 우선 1개 분대를 도하부대로 선정했다. 도하부대는 용감하게 하천에 뛰어 들었다. 도하중인 병사들은 목까지 물에 잠겨 뛸 수도 없었고 장비와 탄약 등은 그들의 행동을 더욱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300고지에서 하향사격을 맹렬히 가하는 적의 소화기들은 도하부대의 지근거리에 소나기와 같은 물방울을 형성하면서 집중되었다. 수중에서 검게 보이는 철모가 하나 둘씩 몰속에 잠기더니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 말 없이 이 훈련 아닌 실전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단장은 주간 도하를 중지하고 야간에 실시할 것을 즉석에서 결정하고 연대 관측소를 떠났다.’
-『대대장』 책을 보면 포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전쟁터에서 생포한 포로를 합리적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까.
“부하들에게 제네바 협정을 교육시키지만 막상 전투에서 부하나 동료가 죽고 다치는 것을 보면 동물적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극도로 흥분하여 눈이 뻘겋게 충혈 되고, 살벌하다는 말로 표현할 정도를 넘어서게 되죠. 이 상황이 되면 포로에 대한 아량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포로 문제는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는 아량을 보인다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6·25 당시 우리 국군이 훨씬 용감했다

-눈앞에서 부하들이 전사하는 모습을 보거나, 죽음이 뻔한 고지로 돌격을 명령하는 지휘관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전우애를 형재애라고 한다면 지휘관과 사병의 관계는 부자(父子)간의 사랑에 해당합니다. 지휘관 입장에서 부하란 살이라도 떼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하의 죽음을 목격한 지휘관이 흥분하여 변을 당하는 사례가 아주 많아요. 초급장교들의 소모율이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군 사령관이나 군단장 등 대부대 지휘관은 야전병원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부하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면 지휘관들이 과단성 있는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인민군들은 초기엔 규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국군은 북진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인민군과 중공군의 야전 군기는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봅니다. 우리 국군도 야전 군기를 잘 지켰습니다만 일부 부대가 실수를 했다고 봅니다. 일본군이나 소련군이 야전 군기를 지키지 못해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하는 요인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민폐는 군에 저항하는 사회 분위기로 연결되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6·25 때 직접 맞서 싸운 인민군과 우리 국군은 어떤 차이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6·25 당시 인민군은 활기가 넘쳤습니다. 최고 지휘관들도 젊어서 그런지 부대기동이 패기만만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한을 해방시키고 공산주의가 전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는 신념도 있었겠죠. 그러나 전투를 거듭하면서 저는 국군이 인민군보다 훨씬 강한 군대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군은 6·25를 통해 한 번도 적에게 항복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은 조직적으로 투항하더군요.
우리 병사들은 포로가 되면 100명 중 99명 정도는 탈출을 합니다. 그러나 인민군 포로는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그들에게 왜 도망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인민군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섭다는 겁니다. 우리 국군은 평소엔 헐렁한 느낌이 들다가도 일단 전투에 임하면 용맹한 부대로 변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6·25 때 전쟁포로였던 조창호 중위가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후에야 국군포로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국군 포로 문제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요.
“휴전 때 국군포로를 버린 것은 국가 통수권자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어려워서 신경 쓰지 못했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발칸반도에서 격추당한 미군 조종사 구출작전이라든지, 월남전에서 실종한 미군 병사들의 유해 찾기 등을 보면서 선진국은 선진국이 될 자격이 있는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치거나 부상을 당하면 국가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들의 삶을 책임집니다. 국가가 전쟁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운 국민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민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겁니다.
남북이 다 같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똑같이 부상자와 전사자가 생겼지만 김일성은 국력을 다해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들은 혁명유자녀 학교를 세워 그 가족들을 교육시켜 오늘의 북한 체제를 이끄는 존재로 키워낸 겁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해 두고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겁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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