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미세먼지와 3.1절 기념사로 동시에 공격 받는 진풍경 연출
‘포퓰리즘 정치’와 ‘북한 올인’으론 국익 관리는커녕 ‘왕따’ 자초할 뿐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

중국과 일본이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동시에 공격을 가하는 이례적인 일이 이달 초 벌어졌다. 3.1절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3.1운동 사망자와 참여자 숫자를 각각 7500명, 202만 명으로 밝히자 같은 날 일본 외무성은 “역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는 숫자를 공공의 장(場)에서 발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맞받았다.

중국의 문 대통령 공격은 미세먼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달 초 사상 최악의 미세먼지가 이어지면서 국내에서 중국 책임론이 비등하자 문 대통령은 6일 중국과의 공동 인공강우 등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가 나온 뒤 5시간 만에 중국 외교부는 “한국 미세먼지가 우리 책임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고 반박했다. 중국과 일본 모두 문 대통령이 ‘팩트(fact·사실)’에 입각해 말을 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준 것과 다름없다.

먼저 누구 말이 맞는지 사실 여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에게 우울증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는 미세먼지의 경우 시간별 인공위성 사진만 보아도 미세먼지의 상당 부분이 중국으로부터 넘어오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잡아떼는 데는 그들대로 믿는 구석이 있다. 우리 환경부는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만한 국내 오염원의 종합적 실태 파악을 아직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이 때문에 양국 간 협의에서도 우리가 수세(守勢)에 몰리다보니 중국이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친다는 것이다.

3.1운동의 사망자와 참여자는 최근 정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구축한 데이터베이스에 각각 900여명과 100만 명으로 나와 있다. 이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장기간 조사 연구를 통해 올해 2월 20일에 발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언급한 사망자 7500명과 참여자 202만 명은 1920년 역사학자 박은식이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오는 수치다. 자료의 신빙성은 아무래도 국사편찬위원회 쪽으로 더 기운다. 문 대통령이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인용했더라도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은 달라지지 않았다. 괜히 트집 잡힐 구실만 제공했을 뿐이다.

한국 중국 일본의 팩트 싸움은 3국 관계가 공존보다는 대립과 갈등 쪽으로 기울면서 격화일로를 걷고 있다. 중국의 경우 요즘은 잠잠해졌으나 동북공정에 따른 역사 왜곡이나, 사드 국내 배치를 놓고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며 잔혹한 경제 보복에 나선 것도 결국 사실 여부의 문제였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태라는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동해에서 발생한 초계기 레이저 공방은 진실 게임의 양상으로 흘러갔고, 우리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나 위안부 관련 문제도 따지고 보면 한일 양국이 바라보는 팩트의 차이가 빚어내는 결과물이다.

문제는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한중일 3국의 시각 차이를 어떻게 좁히고 관리해 나가느냐에 있다. 무엇보다 팩트 면에서 우리가 우위에 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때로는 더 큰 국익을 위해 국민을 다독이고 설득할 필요도 있다. 국가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현 정권은 오히려 앞장서서 국민감정을 부채질하는 일이 빈번하다.

3.1운동과 관련해 정부기관의 최신 자료를 놔두고 사망자의 경우 8배나 많은 수치를 기념사에 등장시킨 것은 문 대통령의 특징인 포퓰리즘 정치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전에도 그는 “한국은 발전된 나라 중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한 국가” “소득주도 성장은 긍정 효과가 90%” 등의 발언으로 ‘현실 과장’이나 ‘가짜 뉴스’를 택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특히 반일(反日) 감정을 자극하는 일에는 거침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에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 한미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건 상식이다. 미국이 일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머지 상대인 한국 일본이 서로 등을 돌리면 3국 공조가 잘 돌아갈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현 정권이 한일 관계를 방치하다시피 하는 것은 친중 친북을 전제로 하는 의도적인 움직임이다.

지난 2월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의미심장한 다큐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자유 대한민국을 막다른 골목에서 구해낸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다큐는 당시 유엔군 병력을 일본에서 인천으로 수송한 LST 함정에 2000명의 일본인들이 탑승해 미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미국 극비문서에서 찾아내 소개했다. 미국은 상륙작전 때 서해 물길을 잘 아는 인력이 필요해 항해 경험이 있는 일본인 선원을 참가시켰다는 것이다. 이 작전의 와중에 57명의 일본인들이 전사했다는 통계와 함께, 현재 생존해 있는 일본 참가자와 미국 퇴역 군인의 증언도 제시했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왜 이런 프로를 내보냈을까. 해석은 어렵지 않다. 한반도 유사시에 한국은 일본 쪽의 배후 지원을 받아야 한미동맹의 실효를 얻을 수 있다. 6.25 때도 그랬지만 바로 투입할 수 있는 미 군사력이 일본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내 미군이 한국으로 출동하려면 일본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역시 부인하기 힘든 한일 관계의 팩트다.

이 다큐는 일본이 6.25의 중대한 고비에 일부 기여했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상기시키면서 한국 안보에서 적지 않은 열쇠를 쥐고 있는 우리에게 한국이 지금처럼 막 대해도 괜찮은 것이냐는 경고와 협박을 우회적으로 보낸 것이다.

문 대통령의 6일 미세먼지 발언과 관련해 중국의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는 “한국 여론의 특징은 충동적이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다”며 한국인들까지 한 묶음으로 힐난했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시절에도 이처럼 노골적이고 모욕적인 언사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다시 격변기를 맞은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이런 나라들과 머리를 맞대고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인식이 절실한 때다.

세계 2,3위 경제대국인 중국 일본에 맞서려면 우리야 말로 팩트를 냉철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국력의 우열을 떠나 나라의 생존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 등 각종 현안에서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쳐다보는 문재인 정권에게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팩트 싸움에서 밀리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당분간은 ‘왕따’일 터이고 그 이후에는 더 큰 비극일 것이다.

홍찬식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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