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다를 통해 산업용 원료와 과학기술은 물론 서구식 문화와 문물, 종교와 합리적 가치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을 생산으로 연결하기 위해 해안가인 포항(제철), 울산(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창원(기계, 전력), 거제(조선), 여수(석유화학), 당진(제철, 자동차) 등에 대규모 임해공업단지를 건설했습니다.
바다를 통해 수출품을 실어냈고, 바다에서 부를 캐기 위해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을 조직적으로 육성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불과 60여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해양력을 보유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해양화 혁명’이었습니다.

부산 신항에 입항해 있는 컨테이너선들. 바다는 문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대륙으로 나가는 길은 휴전선으로 틀어막힌 대한민국은 섬처럼 고립된 지정학적 불리점을 해양화 의지로 극복해 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부산 신항에 입항해 있는 컨테이너선들. 바다는 문명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대륙으로 나가는 길은 휴전선으로 틀어막힌 대한민국은 섬처럼 고립된 지정학적 불리점을 해양화 의지로 극복해 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대한민국은 반도국가입니다. 반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태를 묻고 살아야 했던 한민족은 늘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한 눈으로는 대륙을 바라보아야 하는 중간지대적 속성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왔습니다. 로마가 발흥한 이탈리아가 그랬고, 유럽에 수많은 도시국가를 창조한 그리스가 그랬습니다.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국가로 출범한 로마는 유럽의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로마가도를 건설했고, 해적을 퇴치하고 해상로의 안전을 확보하여 지중해를 자국(自國)의 내해로 만들었습니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연 결과 로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반도국가적 속성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문화를 일구어 왔습니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일본, 중국은 물론 멀리 이슬람 문명권과 교류한 사실이 역사적 기록과 유물을 통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교류의 흔적을 일본 오사카에 있는 전통 목조건축 전문기업 곤고구미(金剛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기 578년에 창업하여 1437년째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 곤고구미는 세계 최장수 기업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회사의 창업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의 장인(匠人)입니다. 일본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백제에서 건축 전문가 세 사람을 초빙하여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 시텐노지)를 신축했습니다. 사찰이 완성된 후 건물의 유지 보수를 위해 백제 장인 유중광(柳重光, 후에 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으로 개명)이 일본에 남았고, 그가 설립한 회사가 곤고구미입니다.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우리 민족 해양화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장보고는 군사력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동북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에 나섰습니다. 또 저장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의 도공들을 초빙하여 청자 제조 비법을 배워 강진과 해남 일대에서 국산 청자를 제작하여 일본과 당에 수출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세계 명품이 된 고려청자의 출발입니다.

한민족의 해양화 전통

장보고는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 상인들과 접촉하여 아랍에서 중국으로 이어진 해상 실크로드를 한반도와 일본까지 연결함으로써 동서양 문물 교류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해외 거주 신라인들을 기반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적극적인 대외진출과 세계경영을 실현했습니다.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바다로 확대시킨 글로벌 CEO 장보고는 우리 역사보다는 중국과 일본에서 더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창업자 왕건은 신흥 해상무역 세력의 대표였습니다. 덕분에 고려는 초기부터 해상무역이 번성하여 개성과 인접한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개성상인의 뿌리는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해상 국제무역 붐을 타고 벽란도에 아라비아와 유럽 상인들이 대거 진출했고, 그들을 통해 고려의 영문 이름인 ‘코리아(KOREA)’가 중동과 유럽까지 퍼졌습니다. 고려인들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와 고려 인삼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보급되었고, 장보고에 의해 도입된 청자 제조 기술은 고려시대에 독창적인 기법이 가미되어 중국에서 천하의 명품 대접을 받게 됩니다.
개성과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 일대에는 최소 4만 명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대부분이 무슬림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개성에 ‘예궁’이라는 모스크를 지어 기도를 하고 코란을 낭송했습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소개된 고려 가요 ‘쌍화점’에 무슬림 상인이 등장합니다.
쌍화란 투르크계 만두의 일종인데 쌍화점의 내용은 “쌍화점(만두 가게)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무슬림 주인아비가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으면서 은밀하게 유혹하는” 내용입니다. ‘쌍화점’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이역만리 고려에까지 와서 만두 가게를 열고 살아갈 정도로 우리 민족의 개방성과 대외 지향성을 버여주는 내용증명입니다.
조선 초기에도 무슬림 기술자들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보석 채취와 광산업에 종사했습니다. 세종 임금의 즉위식 때 이슬람교 지도자가 참석하여 코란을 낭송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이슬람 문화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서양이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해 중세 암흑기를 헤매고 있을 때 무슬림들은 그리스, 로마의 천문학과 과학기술 문명을 흡수하여 이슬람이 과학기술을 선도했습니다. 원나라 시절에 구축된 세계 교역망 덕분에 손쉬워진 동서 교류로 이슬람의 과학기술이 중국에 유입되었고, 무슬림 학자들이 대거 중국에 초빙되어 천문대, 의약원 등을 설립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 과학기술의 조류가 한반도까지 흘러와 100~200여 년 숙성과정을 거친 후 조선 초기에 꽃을 피우게 됩니다. 조선에서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선 측우기, 천문시계인 혼천의 등이 발명된 것은 당시 국왕이었던 세종의 뛰어난 리더십과 함께 고려 시대부터 흘러온 이슬람의 과학, 수학, 천문학이 토착화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의 뿌리는 이슬람 회회력(回回曆)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한글 창제도 세종의 독창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원나라 음운학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원나라는 제국 공용어를 만들기 위해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의 음운학자를 동원하여 표음문자인 파스파 문자를 제정했습니다.
원나라가 붕괴한 후 등장한 명나라는 파스파 문자 제정에 협조한 음운학자들을 요동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요동으로 찾아가 파스파 문자에 담겼던 음운학의 핵심을 전수받아 한글 창제에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과 중앙아시아 음운학의 과학적 엑기스가 한글에 접목되어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평을 듣게 됩니다.

대륙문명으로 회귀하며 쇠퇴

이러한 반도국가적 속성, 그 중에서도 해양화 전통과 정서는 유교와 성리학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조선조의 출범으로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성리학이 교조화 되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해양화와는 담을 쌓고 철저하게 대륙문명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명나라는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때 정화(鄭和)의 대함대를 일곱 차례나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파견하는 등 해양대국의 위용을 보였지만, 영락제 사후 함대를 해체하고 해상교역을 차단하는 해금(海禁)정책으로 쇄국의 길을 걸었습니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 폴 케네디 교수는 “바로 이러한 해금정책이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이 쇠락한 가장 큰 이유”라고 진단합니다. 중국은 이때부터 제해권을 상실하여 19세기 서구 열강에 유린당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에 의해 국제무역을 상당 부분 통제했다. 또 외침(外侵)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공도(空島)정책, 해금(海禁)정책을 펼쳐 바다를 향한 도전과 패기의 기상을 잃었고, 개방과 교류라는 해양문명의 핵심 유전자마저 쇠퇴하게 됩니다.
그나마 조선 500년 동안 해양문명의 유전인자가 빛을 발한 것은 이순신 제독입니다. 이순신의 거북선을 이용한 돌격전법과 원거리 화포를 활용한 함대 운용 전술은 동시대를 풍미했던 육박전투 방식의 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화되고 독창적인 전략이었습니다.  
쇄국으로 매진한 조선의 양반 지배층은 돈을 천한 것으로 여기고 청빈(淸貧)을 고귀한 가치로 칭송했습니다. 황금 천시는 상공업 천시로 이어져 상공업은 사회의 밑바닥 계층이 담당하는 더러운 직업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기술이 뛰어난 장인(匠人)들은 사회적 예우는커녕 더 많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기에 훌륭한 기술이 후대에 전수되지 못하고 대가 끊기곤 했습니다.
농업 이외의 산업이라고는 극소수 보부상들의 물물교환 정도였으니 20세기 중반까지 우리 민족은 보릿고개, 초근목피에 이골이 나고,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로 국가와 국민 모두 빈곤 상태였습니다.
19세기 말 청나라 궁정의 연간 예산이 은화 1억 냥, 일본도 비슷한 1억 냥 정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은 중국, 일본의 300분의 1에 불과한 30만 냥에 불과했습니다. 거듭된 해금(海禁)과 쇄국정책, 대륙 일변도의 존명사대(尊明事大)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라는 세계사의 본류에서 밀려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불 지펴

조선 중기인 인조 4년(1626)과 효종 4년(1653)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등장합니다. 인조 때 표류해 온 벨테브레와 헤이스베르츠, 페르베스트 등 세 명의 네덜란드 사람은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대포 제작과 포술을 지도했습니다. 효종 때는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로 표류해 옵니다. 하멜은 조선에서 13년 간 억류생활을 하다가 동료 6명과 함께 나가사키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출간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타고 있던 선박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들이었습니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유럽과 나가사키를 왕래하며 일본 도자기를 매년 수백만 점 씩 구입 해다가 비싼 값을 받고 유럽에 판매했습니다. 지금도 유럽의 왕실과 궁전에는 당시 유럽에 수입된 일본의 아리타(有田) 도자기와 사쓰마(薩摩) 도자기가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100여 년 이상 엄청난 양의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일본 도자기를 싣고 유럽으로 간 무역선은 총포와 서적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문물을 가득 실어다 일본에 전해주었습니다. 이러한 동서양 도자기 무역으로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개화로 나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도자기가 일본의 근대화를 촉발시킨 셈입니다.
그런데 유럽을 열광시킨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들의 작품이었습니다. 이삼평이 빚어낸 아리타(有田) 야끼, 심당길(심수관의 선조)과 그 후손들이 일으킨 사쓰마(薩摩) 야끼는 심오한 미적 감각과 찬연한 색채감으로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을 열광시켜 일본을 대표하는 수출 상품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조선 도공들은 본국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구조의 최하층민으로서 모진 박해와 각종 노역에 시달렸습니다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인생이 역전됩니다. 그들은 장인(匠人)으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자신들의 재주를 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조선 도공들은 포로 교환 때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정착하여 세계사에 길이 남을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 10만 명 중 9000명만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도공과 학자들은 대부분 일본에 남았다고 합니다.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조선 도공들 덕분에 일본은 국부 창출은 물론 근대화에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 됩니다.
같은 시기, 조선의 도공들은 사농공상의 신분구조에 찌들려 양반들의 애완용 도자기를 빚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뛰어난 도공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착화 된 신분구조 덕분에 국가 발전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들의 천재적 재능을 사장(死藏)시킨 겁니다.

타율적 해양화의 시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습니다만,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대륙세력의 맹주 소련이, 남쪽에는 해양세력의 맹주 미국이 분할 점령했습니다. 남한은 3면이 바다로 막히고 북쪽은 38선(후에 휴전선)으로 봉쇄되면서 섬처럼 고립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남한은 살 길을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 후 인천과 부산항을 통해 정크무역과 마카오(홍콩)무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구호 원조물자가 하역되었고, 6‧25 때는 부산을 통해 수 십 만의 외국인 전투 병력과 막대한 군수물자가 물밀듯 들어오면서 우리의 해양화는 개막되었습니다. 그것은 대륙 지향의 유교문화와 태를 가르고 해양문화로 향하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작이었습니다.
바닷길을 열기 위해 배를 짓다보니 조선산업이 육성되었고, 배를 운전하고 관리하다보니 해운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육지에선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해외 먼 바다까지 나가 물고기를 잡다보니 원양어업 강국이 되었고, 배들이 안전하게 출입하기 위해 항구를 건설하다보니 항만 강국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양화의 가치관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해양화는 우리의 의지에 따른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분단과 냉전의 진행에 따른 타율적인 결과였습니다. 500여 년 바다를 두려워하고 회피했던 우리 민족이 냉전으로 인해 섬처럼 조건 지워진 한계상황에서 바다에 도전함으로써 한민족의 활동공간이 세계로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구한말 개항과 더불어 몰아닥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기에 쇄국으로 대응하다 국가 멸망에 이른 과거사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한국인의 야성(野性)을 세계로 내뻗는 기회였습니다.
우리의 해양화는 단기간 내에 압축적으로, 그리고 남들이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통해 평화선을 선포합니다.
1952년 1월은 6‧25 동란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중부전선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국가 존망이 위태롭던 시기였습니다. 이 엄중한 전시(戰時)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가 원수는 바다에 주권선을 선포하여 우리 해역의 광물자원과 수산자원을 보호하고, 독도를 우리 주권 영역에 포함시키는 결정적인 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양자원과 영해(EEZ)가 국토 못지않게 귀중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선각자였습니다.

한국의 산업화는 해양화 혁명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국민의 삶의 질이나 경제수준, 산업력, 지적 수준 면에서 우리와 가장 비슷한 나라는 아프리카의 가나였습니다.
그로부터 60여 년 후인 오늘날 우리는 소위 세계의 부자 나라들만 가입하는 20-50클럽(인구 5000만 명 이상의 나라 중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이상인 나라)에 세계 7번째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는 뜻입니다.
세계지도를 보면 대한민국의 국토 면적은 지구상 육지 면적의 0.07%, 인구는 세계 전체 인구의 0.78%로 미미한 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내 총생산(GDP)은 세계 12위 규모입니다. 이러한 국부(國富)의 원천은 해외 무역입니다.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인구는 많은 약점을 우리는 원자재와 기술을 해외에서 도입하여 우수한 노동력을 동원해 완제품을 만든 다음 해외에 수출하는 수출지향의 공업화 전략으로 극복했습니다. 그것은 곧 총체적인 해양화의 길이었기에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해양화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지폐에 인쇄된 거북선을 내세워 선박부터 먼저 수주했고, 조선소 도크 건설과 함께 한쪽에서는 배를 건조하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지상 최대의 공사라고 불리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 과정에서는 초대형 해상 구조물을 국내에서 제작한 다음 바지선으로 중동까지 끌고 가서 설치했습니다. 길이 350m의 30만t 급 초대형 유조선을 세계에서 최단기간 내에 만들어 세계 최우수 선박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통해 산업용 원료와 과학기술은 물론 서구식 문화와 문물, 종교와 합리적 가치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을 생산으로 연결하기 위해 해안가인 포항(제철), 울산(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창원(기계, 전력), 거제(조선), 여수(석유화학), 당진(제철, 자동차) 등에 대규모 임해공업단지를 건설했습니다.
바다를 통해 수출품을 실어냈고, 바다에서 부를 캐기 위해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을 조직적으로 육성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불과 60여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해양력을 보유한 나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해양화 혁명’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상징어는 은둔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수출과 무역, 임해공단과 VLCC(초대형 유조선), 반도체와 IT, 간척과 해외건설, 남극 세종과학기지, 한류(韓流), 개방과 성장 같은 가치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전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는 대규모 선박 10척 중 4척을 한국에서 건조할 정도로 조선 1등국이 되었고, 세계 5위권의 선복량을 보유한 해양 강국입니다. 불과 60여 년만에 대륙문명에서 해양문명으로 극적인 전환에 성공한 이유는 우리 민족의 DNA 속에 해양민족라는 유전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대결의 결과는?

이제 해방 후 한반도에서 진행된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충돌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해방 직후 북한은 일제가 남겨두고 간 산업시설과 발전소, 풍부한 지하자원 등으로 남한보다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 출발했습니다. 덕분에 1973년까지 북한은 남한보다 국력과 1인당 소득이 3배나 많았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재일교포들이 북송선을 타고 ‘지상 낙원’으로 선전된 북한으로 간 것을 솔직하게 말하면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격차는 1974년에 역전되어 지금은 경제력에서 남한이 북한을 76배 정도 앞서고 있습니다.
남한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방, 무역, 교류의 길로 나가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시기에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조선시대나 다름없는 김 씨 세습왕조의 주민 감시체제 하에서 주체사상을 앞세워 쇄국의 길로 돌진했습니다. 그 결과 300만 명을 굶겨 죽이고, 적어도 한 세대가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부진으로 인종의 열등화, 저열화라는 참극을 빚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1945년 열강들에 의해 강제된 국토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는 비극이었지만, 휴전선 이남의 남한만이라도 해양문명으로의 전환을 통해 선진화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무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자유무역협정(FTA) 시대에도 해양의 중요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해상 물류가 다른 어떤 운송수단보다 쉽고 코스트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1톤의 철광석을 육상에서 100㎞ 운반하는 비용과 해상에서 1만 ㎞를 운반하는 비용이 비슷합니다. 수송수단의 대형화, 고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어서 해상 물류 코스트는 점점 더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이미 200여 년 전에 해양무역이 대륙무역보다 더 싸기 때문에 긴 해안선과 항해 가능한 하천을 많이 보유한 해양국가가 국부 축적에 더 유리하다는 점을 통찰한 바 있습니다.
세계 각국이 해양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구 폭발 때문입니다. 인구 폭증으로 급속히 고갈되고 있는 육상자원을 대체할 광물자원이나 에너지원을 획득할 수 있는 뉴 파라다이스로 해양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해양에서 생산되는 석유와 가스는 과거에는 전체 생산량의 30% 정도였지만, 2015년에는 60%로 전망됩니다. 중국과 일본 간에 결사항전 식으로 진행 중인 센가쿠 제도(尖閣諸島, 중국명 다오위다오‧釣魚島)를 둘러싼 다툼도 실상은 그 주변 해역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 때문입니다. 
해양바이오테크 산업, 해양광업, 인류의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메탄하이드레이트 등 해양자원도 기술의 발전으로 조만간 실용화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륙 지향의 향수
 
과거의 바다는 인류의 발길을 막는 장벽이었지만, 첨단과학기술 덕에 이제는 자원의 보물창고(寶庫)가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21세기를 MT(Marine Technology)를 기반으로 한 ‘청색혁명(Blue Revolution)의 시대’로 예상합니다.
MT는 해양이라는 가혹한 환경과 조건 하에서 구현되는 특수 극한기술로서, 열악한 환경조건을 극복해야 하는 첨단과학기술이며, IT(정보통신), BT(생명공학), CT(문화기술)와 융합된 복합시스템 기술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MT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또 하나의 도전 분야입니다.
땅(대륙)은 농사(정주, 정착)를 장려하지만 바다(해양)는 장사(무역, 개방, 이동)를 권장합니다. 대륙이 광물자원, 중앙집권, 자급자족, 집단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를 상징한다면 바다는 변화, 다양성, 개방, 교류, 인권, 자유, 코스모폴리탄의 원천입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 네 마리의 용, 수출주도형 압축 성장, 세계화(국제화), 민주주의와 인권, 개인의 자유 같은 단어는 해양화라는 문명에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개방의 길로 들어선 ‘은둔의 나라’가 타율적인 힘에 의해 60여 년 전 바다와 만나면서 국가 체질이 해양 지향으로 혁신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의식 속에는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대륙 지향적 사고의 잔영이 질기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대륙 지향적 인식이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철(鐵)의 실크로드”니 “동북아 균형자론”이니 하는 용어라든가, 개혁 개방에 저항하는 반(反)세계화, 반(反)해양화 구호는 대륙 지향적 향수를 표출하는 정치적 수사(修辭)입니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비롯하여 현재의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가 수뇌부 차원에서 일고 있는 반일(反日) 혹은 반미(反美)감정과 친중(親中) 지향적 외교는 동북아의 전략적 균형 차원에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일 친중 외교의 옆에서는 미일 간의 군사 협력이 대대적으로 강화되고 있고, 일본은 대북 수교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한미일 3각 해양 동맹이란 용어를 들어본 지도 오래 되어, 이제는 사전에서나 찾아봐야 하는 실정입니다.
중국은 경제적 이익 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협력 강화는 국익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해양 동맹에서의 이탈과 대륙 문명으로의 회귀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교훈을 전해줍니다.
경제적 이익과 안보 동맹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리 경제적 이익이 중요해도 안보를 무시한 이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미중(美中) 간에 21세기 패권을 놓고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일본, 인도와의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중국 포위 전략에 나서는 엄중한 상황에서 우리 국가지도부는 실리와 안보를 동시에 추구하는 베네치아식의 고차원 외교술을 바탕으로 대륙과의 공존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되, 해양세력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여 안보를 더욱 강화하는 전략적 국가운영의 틀을 제시해야 합니다.

해양화는 우리에겐 숙명

외교관계의 근본은 원교근공(遠交近攻)입니다.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은 세계 최강이자 해양세력의 맹주인 미국과 동맹을 맺어 국가안보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일본-미국으로 이어진 해양세력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산업력을 쌓았습니다.
일본의 국제정치학자 구라마에 도리미치(倉前盛通) 교수는 말레이반도, 이베리아반도, 베트남반도, 한반도 등 반도국가들은 대부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각축으로 인해 반도의 중간부에서 분단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구라마에 교수는 분단된 반도의 해양세력이 대륙세력의 압력에 맞서 생존하려면 해양세력의 지원을 얻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대륙세력에 강렬한 반격을 가할 군비를 보유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습니다. 단지 영원한 국가 이익이 존재할 뿐입니다. 국가 이익의 최고 우선순위는 국가안보의 확립입니다.
굳이 구라마에 교수의 이론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지속발전과 안보의 확보를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대륙세력에 강렬한 반격을 가하는 군비 보유보다는 미-일과 해양동맹의 강화가 훨씬 국익에 부합하는 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적 감정을 자제하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합니다.
5년 임기의 특정 정권 담당자들이 자기들 이데올로기 취향에 따라, 혹은 정권의 인기관리를 위해 국가의 진로를 함부로 뒤바꾸려는 시도는 위험천만한 도박입니다. 이런 일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양화의 가치관과 철학을 우리 사회에 더 깊이, 더 성숙하게 뿌리내리는 문화운동이 뜨겁게 일어나야 합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