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혈맹의 상징 6.25 전쟁 영웅의 잊혀진 죽음

팻말이 놓인 곳이 워커 장군의 순직 지점인 서울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독자 제공)
팻말이 놓인 곳이 워커 장군의 순직 지점인 서울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독자 제공)

서울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 전단지들이 나붙은 전봇대에 ‘워커 대장 전사지’라는 현판이 초라하게 붙어있다. 

‘이 자리는 1950. 12. 23. 오전 10시 45분경 주한 미8군 초대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 대장이 전사한 곳’

이 현판은 한 시민이 영웅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다.

 

‘이날 워커장군은 중서부전의 미 24사단 19연대 최전방 중대장 샘 워커 대위의 전공 표창을 위한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영국연장 27여단 부대 표창차 상기 지점을 통과하다 한국군 제6사간 2연대 군속이 운전하던 스리퀘타와 충돌 약 1시간 후에 61세 나이로 천명을 못 다 하시고 전사. 6.25 동족상잔 비극을 조명하는 장소로 영구보존 우리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전하고자 한다’

지난 23일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월튼 H. 워커 장군(1889~1950)의 순직 68주년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공식 기념식도 열리지 않아 시민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제주도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고, 낙동강 방어선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였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겠다”며 “죽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방어하라(Stand or Die)”고 명령했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워커 장군은 1912년에 미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해 은성훈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아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급파됐다. 그는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전장에 나서면 그의 애칭인 ‘불독’처럼 집념과 투지가 넘치는 군인으로 변했다.

그는 6.25전쟁에서 지프와 경비행기로 최전방을 쉴 새 없이 누비며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6.25 전쟁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워커 장군은 이후 서울 수복을 거쳐 평양 탈환, 압록강까지 북진을 지휘하며 공산주의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던 대한민국에 희망을 안겨줬다. 그러나 1950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이틀 앞둔 23일 안타까운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한국전 최전방의 소총중대장으로 참전해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됐다. 워커 장군은 전방시찰을 겸해 아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현 도봉역 근방에서 전방으로 가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전사지는 서울시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다.

샘 워커 대위는 아버지의 유해를 의전부대에 맡기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샘 워커 대위에게 직접 미 워싱턴 D.C.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안장시키도록 명령했다.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됐고 아들 샘 워커 대위는 후일 미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

한국에는 워커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몇몇 장소가 남아 있다. 서울 워커힐 호텔, 서울 워커힐 아파트, 캠프 워커(대구 주한 미군 육군 비행장), 워커 하우스(6.25전쟁 초기 미8군 사령부였으며 현재 부산 부경대학교 내 위치)가 그것이다. 또한 미 육군은 워커 장군을 기리기 위해 M41 경전차에 ‘워커 불독’이란 이름을 붙였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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