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가 워낙 곧은 사람이라 합수부측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그를 제거하기 위해 합수부측이 정승화를 김재규와 관련시켜 연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사태 다음날 신군부의 조종에 의해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 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씨에게 결재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군 인사 등 일반 업무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바람에 비겁하게 혼자 빠져나가는 것 같아 망설이다 사퇴 시점을 놓치고 1981년 1월24일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재직했다는 것이다. 관련 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사태에 관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사진출처 : 국가기록사진, e영상역사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사태에 관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사진출처 : 국가기록사진,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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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성 진술조서 1995년 12월12일 서울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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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 된 중앙정보부

-진술인이 12․12 사건 당시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중정부장의 본래 임무는 국가 주요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국가 정보기관을 조정,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임할 당시에는 중정의 국장, 부국장 중 대다수가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해 합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여서 중정의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였습니다. 당시 제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중정의 자금과 정보를 보존, 관리하고 조사를 받고 있던 국장, 부국장들을 빨리 석방되게 노력해 복귀시킴으로써 중정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979년 12월12일 보안사 요원들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연행할 때 진술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필동에 있는 동보성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군 동기생 4~5명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12․12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그날 21시30분경 일단 중정 제 사무실로 들어가서 보니 주요 정보부 간부(1차장, 2차장, 국장들을 지칭)들이 모여 있었으나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간 직후부터 경복궁 30경비단 쪽에 노태우, 전두환, 황영시 등이 모여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수경사와 30경비단이 서로 병력을 출동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습니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우선 병력 충돌사태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수경사 장태완 사령관과 30경비단 장세동 대령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해, 아군끼리 충돌하면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고 북괴가 오판할지 모르니 병력충돌을 막으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병력출동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정승화 연행사실을 알고 난 후 바로 진술인의 집으로 전화를 해 처에게 "공기가 수상하니 집에서 자지 말고 나가서 자라"고 한 사실이 있나요.
"예,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진도개 하나' 비상 발령 사실에 대해 알았나요.
"저는 그 당시 군에서 '진도개 하나' 비상 발령 사실을 보고받은 바 없습니다."

 

보안사․육본 측 중재해 아군 충돌 방지

-당시 진술인은 육군 중장 계급으로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중정부장 서리로 재직 중이었는데, 국방부나 육본으로부터 비상발령에 대한 통보를 받지 않았나요.
"통상 군에서 비상을 발령할 경우 중정에도 통보해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 당시에는 비상 발령에 대한 보고를 듣지 못했습니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장세동 30경비단장과는 언제, 어디서, 어떤 경위로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으며,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중정으로 돌아와 사태를 파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중간에서 중재를 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먼저 30경비단으로 전화해 장세동 대령에게 절대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후 7~8회 이상 장 대령과 통화했습니다. 당시 30경비단과 수경사령부에서는 서로 전차 시동을 걸어놓은 상태여서 서로 전차의 시동을 꺼야 상대방 병력을 출동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중간에서 연락할 것이 아니라 서로 직접 통화해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약속하라고까지 했습니다.
9공수여단이 출동했다고 해 제가 9공수에 전화해서 병력이 돌아온 사실을 확인한 후 다시 장대령에게 알려주는 등 쌍방 병력이 출동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진술인은 윤흥기 9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동시키지 말도록 요청한 사실이 있나요.
"1979년 12월13일 0시30분경 9공수에서 병력을 출동시켰다는 보고가 올라와 남산 제 집무실에서 윤흥기 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출동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9공수여단이 부대로 복귀한 뒤였습니다."
-다른 부대 출동 정보는 입수하지 못했나요.
"예, 9공수가 서울로 출동한다는 보고밖에 못 받았습니다."
-진술인이 중정부장으로서 권한 밖의 병력출동 자제에 대해 군 관계자에게 요청한 경위는 무엇인가요.
"당시 제가 중정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위를 위해 개인적인 판단으로 병력 출동 자제를 요청한 것입니다. 제가 오래 군 생활을 해 군 관계자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이유가 아니고 진술인이 합수부측에 가담해 육본 정식 지휘계통에서 육본과 국방부를 방어하기 위해 9공수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을 알고 합수부측을 위해 9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회군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요.
"저는 육본측에서 9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양측 병력이 충돌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그 때는 이미 9공수 병력이 부대로 복귀한 뒤였습니다."
-진술인은 남산 집무실에 있다 밤 12시가 넘어서 삼청동 공관으로 간 사실이 있나요.
"예, 시간은 정확하지 않으나 12시 이후 병력 출동을 자제하라는 전화를 여러 곳에 한 후 내가 직접 나가봐야겠다고 생각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건 후 보안사로 가려다 총리 공관으로 간 사실이 있습니다."

 

양측 병력출동 막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통화한 내용은 어떤가요.
"누가 먼저 전화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제가 전 장군에게 각 부대에 전화해 병력출동을 자제해서 아군끼리 교전하는 상황은 막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더니 전 장군도 저에게 병력 출동을 막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이 부대 출동에 대한 지휘권이 없는데, 어떻게 전 장군에게 병력 출동을 막아 달라고 했나요.
"당시 보안사에 많은 장성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부대출동을 막아 달라고 하면 그곳에 있던 다른 장성들에게 그 뜻이 전파되리라 생각해서 부대 출동을 막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보안사에 누가 모여 있다고 하던가요.
"중정 ,2차장과 서울분실장으로부터 보안사에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노태우 등의 장성들이 모여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후 전두환 장군을 찾아간 사실이 있는가요.
"예, 시간은 정확치 않으나 12시 이후 병력 출동을 자제하라는 전화를 여러 곳에 한 후, 전 장군에게 전화를 건 후 보안사로 가려다 총리 공관으로 간 사실이 있습니다."
-총리 공관에서 무엇을 했나요.
"1979년 12월13일 02시30분경 대통령을 만났는데 최 대통령은 '그날 저녁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이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다며 연행 재가를 받으러 왔는데, 군 상황을 잘 모르는데 국방부장관도 거치지 않는 등 계통을 밟지 않고 와서 승인을 해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당사자인 보안사령관을 만나보기로 마음먹고, 약 1백50m 떨어져 있는 보안사로 가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났습니다."
-당시 총리 공관 입구에서 고명승 대령이 제지해 그와 함께 먼저 보안사로 간 것이 아닌가요.
"제가 사무실에서 보안사로 출발하려다 총리 공관에 먼저 가는 것이 순서라 생각하고 보안사령관에게 전화해 총리 공관에 먼저 갔다가 보안사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보안사에서는 제가 총리 공관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총리 공관에 갔을 때 아무런 제지도 없었고, 바로 공관으로 들어가 대통령을 뵙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20분 남짓 있다가 보안사로 갔던 것입니다."
-보안사령관으로서는 중정부장이 바로 총리 공관으로 가서 대통령에게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을 하도록 놓아 둘 수는 없지 않은가요.
"이미 제기 여러 차례 보안사령관과 통화하면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양쪽을 설득하는 것으로 보아 제가 특별히 총리 공관에 가더라도 한쪽을 편들어 말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총리 공관으로 먼저 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때 청와대 경호실 작전담당관이 고명승 대령이 진술인을 호위하거나 수행하지 않았나요.
"제가 총리 공관에서 나와 보안사로 갔을 때 시내로 통하는 도로는 전차로 차단해 놓은 상태였고, 보안사령관이 현관에 나와 저를 영접하는 것으로 보아 제가 보안사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보안사에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 대령이 저를 직접 호위하거나 수행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떨어져 따라올 수는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쪽지 보여줘

-진술인은 보안사로 가서 무엇을 했나요.
"사령관실에 전두환을 비롯해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차규헌 등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불법으로 모였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두환, 유학성을 제외하고 위수지역을 이탈한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등에게 '당신들은 누구 승인을 받고 모였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전두환 장군이 저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라고 적혀 있기에 불쾌해서 누구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느냐고 화를 내었더니 유학성이 제 손을 잡아끌고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총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도 곰곰 생각해 보니 이 난국을 수습한 후 군복을 벗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내색하지 않고, 다시 사령관실로 와서 전두환에게 노 장관을 모시러 국방부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가 동행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므로, 저 혼자 총리 공관으로 돌아와 신 총리를 대동하고 국방부 청사로 갔습니다."
-신 총리를 대동하고 국방장관을 찾으러 국방부 청사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노 장관을 총리 공관으로 데리고 와야만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노 장관이 '정승화 연행'에 대해 가부를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 총리에게 '저와 같이 국방부로 가서 노 장관을 데리고 오면 따라 올 것이니 같이 가자'고 건의했더니 신 총리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그렇게 하자고 해 국방부로 갔습니다."
-당시 국방부 청사의 상황은 어땠나요.
"청사 현관 유리창이 온통 깨져 있었고 경비병력들이 보였습니다. 저는 당시 국방부 청사가 1공수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인지 모르고 갔습니다. 저희들은 안내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 바로 국방부장관실로 올라갔습니다. 장관실에는 김용휴 국방부차관, 김종환 합참의장이 앉아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국방부장관실에서 무엇을 했나요.
"신 총리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노재현 장관을 데리고 대통령에게 가야겠다'고 하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노 장관이 총리 공관으로 가려는 순간 공수단 병력들이 총을 쏘며 진입하는 바람에 피신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습니다. 김용휴차관이 '노 장관이 나타나지 않으면 차관인 저라도 가서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신 총리에게 빨리 대통령에게 돌아가자고 했으나, 신 총리가 '통금해제 시간인 04시까지 기다려보고 그 때까지 안 오면 그렇게 하자'고 해서 그곳에서 장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재현 국방부자관을 총리 공관에 데려와

-진술인은 왜 대통령에게 돌아가자고 신 총리에게 재촉했나요.
"제가 신 총리와 함께 국방부로 가기 위해 총리 공관을 나설 때 총리 공관 앞 한국일보 쪽으로 가는 길목에 탱크 5~6대가 막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부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노재현 장관은 언제 나타났는가요.
"제 기억으로는 통금해제 직전인 03시55분경 노 장관이 혼자 들어왔습니다."
-노 장관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장관실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요.
"저희들은 노 장관이 나타난 사실 자체가 반가워서 다른 상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공수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제 기억으로는 노 장관 태도가 평소와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노 장관과 함께 총리 공관으로 갔는가요.
"국무총리 전용차에 신 총리와 노 장관 그리고 제가 타고, 앞 좌석에 김용휴 차관이 동승해 총리 공관으로 갔습니다."
-그 차량을 타고 총리 공관으로 가던 중에 보안사 앞에서 제지를 당한 사실이 있나요.
"보안사 정문 앞에서 제지를 당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노 장관과 김용휴 차관이 보안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저와 신 총리는 그 차로 바로 총리 공관으로 대통령을 만나러 갔습니다. 신 총리와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저는 약간 떨어진 출입구 근처에 앉아 있었고, 신 총리가 그간의 내용을 보고하고 있었는데, 5시경에 노재현 장관이 들어왔습니다."
-최 대통령이 정승화 총장 연행 건에 대한 재가를 하던가요.
"저는 같은 방에 있기는 했으나 상당히 떨어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노 장관과 대통령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노 장관이 들어와 대통령과 얘기한 20여분 후 노 장관이 저에게 손짓해 노 장관 쪽으로 갔습니다. 대통령과 신 총리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네가 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니, 부대를 장악하고 수습을 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 재가가 난 것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당시 최 대통령이나 다른 정부 관계자들이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 만한 분위기였는가요.
"국방부장관이 보고할 당시 최광수 비서실장, 신 총리가 배석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의사를 강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였고 불과 몇 분만에 결재가 끝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이야기가 계속된 시간은 약 20분 정도로 기억됩니다."
-노 장관이 대통령 재가를 받으러 올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함께 왔나요.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 집무실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기억됩니다."

 

전두환 요구에 의해 군 인사 단행

-진술인은 노 장관으로부터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했나요.
"잠시 보안사에 들렀다가 바로 중정에 가서 제 사물을 정리하고, 공금과 서류들을 차장들에게 인계해 준 후 12월13일 09시 전후에 육본으로 갔습니다."
-육본으로 가서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제가 총장실로 가지 않고 접견실에서 참모들을 불러 '내가 총장으로 임명됐다. 난국을 수습하는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1979년 12월13일 13시15분경 다시 보안사를 방문했다가 13시25분경 돌아간 사실이 있지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는 부임 인사차 보안사를 방문해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고 왔습니다."
-12․12 사건 바로 다음날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등이 교체되었는데 진술인은 그 인사에 관여한 바가 있는가요.
"수경사령관에 노태우 9사단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50사단장을 임명한 것은 전 장군의 요구에 의한 것입니다. 당시 저는 합수부측이 병력 철수 명분을 주기 위해 그들 요구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제 생각에 그 사람들이 적임자로 판단되어 임명했습니다."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은 정식 임명장을 받기도 전에 이미 부임했다는데 어떤가요.
"그날 보안사령관에 있을 때 합수부측 요구에 의해 노태우 장군을 수경사령관에, 정호용 장군을 특전사령관에 임명하기로 합의했으므로 그들이 바로 12월13일자로 부임했던 것입니다. 정식 인사발령은 12월14일자로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임명과 해임 절차에 대해 진술하시오.
"육군참모총장의 건의에 의해 국방부장관을 경유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해임합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해임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저는 정병주, 장태완 사령관이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것만 알고 있었고, 대통령에게 해임 이유에 대해 설명하거나 보고한 기억이 없습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임명과정에서 노재현 국방부장관도 관여했나요.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술인은 그 이후 군 인사를 단행했는데, 그 인사는 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나요.
"합수부측에서 의견을 취합해 인사안을 확정한 다음 유학성 장군을 통해 저한테 통보해주는 것을 감안해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 행사한 합수부

-12․12 이후 군 인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1979년 12월14일부터 1980년 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군 장성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합수부측에서 요구하는 인사들을 군內 요직에 배치했습니다. 또 12․12 사건 당시 이를 저지하거나 동조하지 않은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포함해 30여명의 육군 수뇌부 장성들을 예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12․12 사건을 전 장군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요.
"1979년 12월13일 그들 요구에 의해 제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것은 사실이나 제가 실질적인 참모총장 권한을 행사하기에 힘이 부쳤으며,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똘똘 뭉쳐 군을 주도한 것이 사실입니다."
-진술인이 합수부측 요구에 의해 인사안을 결재올렸을 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이 결재를 하지 않은 사실이 있나요.
"제 기억에는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이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결재를 반려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최 대통령은 민간인 출신으로 군부 사정에 어두웠으며, 1979년 12월14일 취임한 주영복 국방부장관도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육군 사정에 어두운 편이었기 때문에 군 인사에 간여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보안사에 6인위원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가요.
"보안사에 정확히 6인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알지는 못했으나, 유학성 장군이 합수부측 의견을 저에게 말하면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해, 그들이 인사를 위한 모임을 만들어 의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이 합수부측에 합세해 진술인에게 군 인사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관철시켰습니다. 그런데 유학성은 인사문제나 합수부 임무와 무관한 자로써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인사조치는 하지 않았나요.
"국방부 차관보는 장관이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인사조치를 단행해야 하나, 당시에는 합수측에서 전권을 장악하다시피 했습니다. 합수부측에서 동원한 병력이 서울에 주둔해 육본, 국방부 등을 장악했고, 서울주변의 부대는 합수부측이 장악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병력을 복귀시키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어 합수부측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술인은 1979년 12월18일 계엄사령관으로서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그 요지는 무엇이며, 그런 담화를 발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개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 앞으로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업무수행에 대한 소신을 밝혀왔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담화를 발표한 것입니다. 내용은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12․12 사태 진상을 곧 발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승화는 무죄"

-진술인은 정승화가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제가 중정부장 서리로 있으면서 정승화가 박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총장이 된 후 정승화 전 총장이 기소됐는데, 저는 정 총장을 모시고 육군참모차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정 총장이 결백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승화 총장의 인격이나 성품은 어떠했나요.
"정 총장이 1961년 12사단 부사단장 근무시 저는 작전참모를 했고, 1979년 2월부터 10월26일까지 육군참모총장 시절에 저는 참모차장을 했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은 성품이 온화하나 정의감이 강하고, 일하는 데는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처리하며, 군인으로서 투철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진술인은 정승화 총장이 박 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생각을 했던가요.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공모해 박 대통령을 시해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습니다."
-진술인이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된 배경은 어떤가요.
"제가 참모차장으로 있으면서 정승화 총장에게 '중정부장이 중요한 자리이니 빨리 임명해야 한다'는 건의를 수 차례 했습니다. 어느 날 정 총장이 저에게 중정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해서 제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고사했으나 계속 권해 '현역 신분으로 수습만 하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받고 중정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12․12 사건 발생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가 워낙 곧은 사람이라 합수부 측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그를 제거하기 위해 합수부측이 정승화를 김재규와 관련시켜 연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승화가 김재규의 범행과 관련이 있어 연행했다는 합수부측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승화씨가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식사에 초대받아 갈 때 저에게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정 총장은 '가기 싫지만 선배가 오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라며 억지로 갔습니다. 그리고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金桂元으로부터 듣고 난 후 바로 보안사령관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범행에 가담하거나 방조한 사람이라고 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술인은 그 후 1979년 12월31일자로 정승화 전 총장을 내란방조죄로 구속영장을 발부한 사실이 있는가요.
"보안사 수사관이 정승화 전 총장을 구속 수사하겠다면서 영장을 청구하여 어쩔 수 없이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지금 와서도 정 총장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계엄사 포고령도 보안사 마음대로

-12․12 당시 정 총장과 함께 연행되었던 이건영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은 어떻게 처리되었나요.
"이 분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영장 없이 수감되어 있다가 1980년 2월경 전역지원서를 제출하고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술인은 이건영 3군사령관 등을 불법 감금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긴 했으나 12․12사건 이후부터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측에서도 사실상 군을 주도했으며, 제가 그들의 처리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개입할 입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어 육군참모총장 자격으로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나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1979년 12월13일부터 1981년 1월24일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인 계엄사령관의 권한은 행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진술인은 속칭 '바지' 계엄사령관이라는 말인가요.
"12․12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요청에 따라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고, 그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전두환이 주도하는 군부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제 의사대로 참모총장을 한다는 것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주요업무는 전두환의 의도가 많이 참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저의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바람에 비겁하게 저 혼자 빠져나가는 것 같아 망설이다가 사퇴 시점을 놓치고 19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진술인의 계엄업무에 관여하는 방식은 어떤가요.
"그가 계엄사 산하 합동수사본부장이긴 하나 사실상 저로부터 결재받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군 인사 등 일반업무는 전두환이 저한테 직접 연락하거나, 측근인 노태우 수경사령관이나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을 통해 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습니다. 특히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 발령에 저는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보안사 요원들을 시켜서 포고령 원안을 만들어 계엄사 담당참모에게 건네주면 그대로 발령했습니다. 사실상 계엄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은 거의 행사한 사실이 없습니다."
-진술인이 계엄사령관으로 취임한 이후 전두환이 결재를 받으러 온 사실이 있는가요.
"제 기억에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엄사령관으로 계엄과 관련한 국내외 정보는 어떤 경로를 통해 파악하는가요.
"총리 공관에서 안보관계 장관들을 수시로 모여 각 부의 중요사항을 총리에게 보고하고 그에 대한 지시를 받아 시행했습니다. 저는 계엄사령관으로 제 부속실에 내무부, 중정, 합수부로부터 보고되는 정보를 통해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반대

-진술인이 중정부장 서리에서 대장으로 승진한 1979년 12월13일부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에 임명된 1980년 4월14일까지 중정부장을 임명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세히는 모르나, 그 당시 국외 정보수집 등과 관련해 외무부와 중정이 다소 대립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동진 외무장관이 중정을 견제하기 위해 최 대통령에게 중정부장을 임명하지 않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은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2월경 보안사 정보처 산하에 이상재 준위를 반장으로 하는 언론대책반을 설치해 언론검열 업무를 수행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원래는 계엄사에서 언론검열 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는 보안사에서 주도적으로 언론검열 업무를 수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당시 저는 보안사에 언론대책반이 설치되어 있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1980년 3월경 보안사에서는 'K­공작계획'이란 언론통제계획을 수립해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분석을 통해 협조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하고,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만이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언론통제를 이용해 여론에 주입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진술인은 1980년 2월18일 전군에 1/4분기 폭동진압훈련(충정훈련)을 실시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예, 그 이유는 1980년 초가 권력 공백기인데다 유신체제하의 억압된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대대적인 시위로 연결되어 시국이 혼란하게 될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신군부측에서 정권찬탈에 따른 광주지역의 소요를 예상해 그런 지시를 했던 것은 아닌가요.
"학생시위 등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훈련을 실시한 것입니다."
-19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게 된 경위는 어떤가요.
"1980년 4월13일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그의 사무실에서 전두환 장군을 중정부장에 겸직시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의견을 물어 저는 '한 나라의 정보기관을 한 사람이 관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임명권자께서 불가피하게 임명을 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해제를 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다음날 최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에 들어가자 같은 질문을 하므로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1980년 3월 말 전 장군은 최 대통령에게 중정 재건을 위해서는 자신의 중정부장 겸직이 부득이하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최 대통령은 겸직은 곤란하다는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당시 신현확 총리도 자신의 권한 밖이긴 하나 반대의견을 표명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최 대통령의 말씀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신 총리가 반대의견을 표명한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중정부장 취임 때 야욕 눈치 채

-일부에서는 이희성 총장이 강력히 천거해 전두환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전 장군 측에서 중정부장 서리에 임명되기 위해 최 대통령에게 협박을 가하거나 압력을 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요.
"아는 바 없습니다."
-중앙정보부법에 의하면 현역군인은 중정부장으로 임명될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현역 육군중장인 전두환이 임명된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중정부장은 공식적으로 국무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으며, 국내외 정보와 중정 예산을 장악하기 위해 중정부장에 취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장군의 중정부장 서리 겸직에 대해 진술인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정보기관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당시 여론이나 학생들로부터 관심을 모으게 되어 불리한 점을 알면서도 전두환이 굳이 겸직을 강행하는 것을 보고 그가 대권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영향력이 군부에 국한되지 않고 내각 등 민간부문에도 확대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1980년 4월30일 전국 계엄지휘관회의를 개최한 사실이 있는가요.
"1980년 4월30일 육군본부 기밀실에서 계엄지휘관 43명이 모인 가운데 계엄지휘관회의를 개최한 사실이 있습니다."
-회의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1980년 4월23일 국무총리가 학생시위와 노사분규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4월27일 당시 이원홍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저를 찾아와 '대통령 지시인데 강력한 담화문을 발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담화문으로는 실효성이 없기 때문에 5월 초 개최 예정이던 계엄지휘관 회의를 앞당겨 개최해, 그 내용을 발표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 4월30일에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참석자는 어떤가요.
"후방은 관구사령관급 이상, 전방은 군단장급 이상 지휘관이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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