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韓 1위 투자국…교역액 美·中 이은 3위, 對아세안 절반
상호 체류·여행인원 규모 상당, 베트남인 82% 한국에 호의적
96년 당서기장 "박정희 존경" 한-베 세계 개도국 참고서 될것
79년 對中전쟁·14년 反中시위 '결연'…패권국 독주시 협력해야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1992년 12월 22일 한국이 북방외교 종착점인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수립한지 25년이 지났다. 당시 수교 교섭을 했던 필자는 베트남 외교부의 카잉 차관보에게 밝혔다. “앞으로 10년 안에 맞이할 21세기에는 중견국인 두 나라가 힘을 합쳐야만 하고, 이를 위해 양국은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트남이 발전하려 한다면 한국이 도와야 하고, 한국이 발전하려 한다면 베트남이 도와야 한다. 그럴 경우 나쁜 인연이라도 인연이 있던 것이 인연이 없던 것보다 훨씬 낫다”고...

이에 대해 카잉 차관보는 “베트남사람들은 현명하다. 과거에 연연하여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화답하였다. 그래서 ‘소나무가 무성해지면 잣나무가 즐거워한다(松茂栢悅)’는 고사성어를 양국 협력의 키워드로 삼기로 하였다.

그 다짐이 양국 간에는 꾸준하게 이행되었고, 신뢰관계가 깊어졌다.

한국의 베트남 누적투자액은 577억 달러로 2014년부터 1위 투자국이 되었다. 2위 일본의 투자액은 494억 달러다. 6천여 개의 한국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하였고, 대표적인 기업이 삼성, LG, 두산중공업, 한국전력공사다. 한국기업에 취업하는 베트남인은 150만 명이 넘는다. 대표적으로 삼성 베트남법인은 16만 명의 베트남 근로자를 고용하는 베트남 제2위의 기업이 되었다. 거기서 생산하는 휴대폰 1억 5천만대를 포함 해외 수출이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24%를 차지한다.

2017년 한국의 대(對) 베트남 무역은 수출 477억 달러, 수입 162억 달러로서 총액은 637억 달러에 달한다. 전년대비 47%나 급증한 것이다. 한국의 아세안 전체 10개국과의 교역 총액 중 절반을 차지한다. 베트남은 중국(홍콩 포함), 미국에 이어서 한국의 3번째 수출대상국이 되었다. 이는 한국기업의 대 베트남 투자 확대로 한국 조달 생산설비 및 원부자재 수출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분야 생산기지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전환되면서 베트남으로의 수출이 급증하고 있다. 2015년 12월 발효한 한·베FTA 협정의 효과도 있다. 베트남 시장에서의 한국 상품의 점유율이 22.3%로 제2위이고, 제1위 중국의 27.2%와의 격차가 줄고 있다.

베트남체류 한국인과 한국체류 베트남인은 각각 15만 명 정도다. 그 중 국제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6만 명, 근로자 6만 명, 유학생 7천명이다. 상호 여행이 급격히 늘어서 한국인의 베트남 여행이 220만 명으로 중국인에 이어 두 번째다. 베트남인의 한국 여행도 33만 명에 달하고, 베트남 내 23개 대학에서 한국어 과정을 운영 중이다. 베트남사회에 한류문화가 크게 확산되어, 안방에서의 한국드라마 시청이 일상화되었고, 한국화장품의 인기가 대단하다. 퓨리서치센터의 2015년 조사에 의하면 베트남인의 82%가 한국에 대해 호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시아 9개 조사대상국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1964년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을 빼내어 베트남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국 방위의 공백은 제2의 6.25를 의미하였다. 베트남전쟁이 끝날 무렵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잃을 것은 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남북통일’이라고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던 사실이 한국의 베트남 참전의 전략적 의미를 웅변해 준다. 다행히 중국이 응하지 않았다.

1996년 9월 김수한 당시 국회의장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을 때, 도므어이 당서기장에게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답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책임자인데도 그러하냐고 되 물었더니, 베트남 서기장은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미국과 함께 한 사소한 일이고, 원대한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국가건설을 추진한 박대통령의 정치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고 하였다.

베트남 참전을 통해 한국의 엘리트 군인들은 최첨단의 군사 장비와 작전을 익히게 되었다. 한국군 현대화도 추진되었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군의 위용은 베트남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물론 5천명의 군인이 산화하였다. 남베트남군이 양적인 우세였음에도 부패 때문에 패망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패망하기 전 1년 동안 베트콩이 800명 이상의 우익인사들을 암살하고, 승려와 신부들이 주도하는 소요사태가 지속되자, 지도급 인사들은 숨을 죽이고 침묵하였다. 결국 남베트남은 멸망하였다. 지금 우리의 반면교사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은 우리 경제사에도 전환점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현대, 한진, 대우 등 주요 기업이 베트남 현장에서 도약을 시작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인들이 넓은 세계에 눈을 떴다. 일본의 식민통치와 6.25 전화 속에서 만성적 실업과 자조의식이 만연하던 한국사회가 변해갔다. ‘무엇을 해도 안된다’는 비관적 사고가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정신으로 180도 바뀌었다. 베트남에 나갔던 기업인과 근로자들이 1970년대 중동의 사막에 진출하여 석유 달러를 끌어왔다. 그 군인들, 그 기업인들, 그 근로자들 덕분에 우리는 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6위의 수출국, 1인당 소득 3만 달러의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제조업이 살아있는 4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독일, 중국과 함께...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수교 교섭 당시 베트남 측은 경제지원을 원하였으나, 우리의 국내 정치사정상 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개발원조(ODA)가 비록 초창기이지만 베트남을 최우선 대상국으로 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하였다. 그 구두약속을 한국 정부가 성실하게 지켰고, 베트남은 한국의 개발원조의 첫 번째 수혜국이 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넘으면 개발원조에서 졸업시킨다는 지침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는 지원을 강화하였다. 1992년부터 2016년까지 무상 4.2억 달러, 유상 12.1억 달러로 총16.4억 달러를 지원하였다. 베트남 농촌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었다. 직업훈련소도 지원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베트남에게도 믿음을 주었다. 그 신뢰 위에서 한·베트남 경제·통상관계가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인적·물적 교류가 확대되었다. 동남아지역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결정에 존슨 대통령이 크게 감동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간절하게 원하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지원해주었다. 해외에 나갔던 과학자들이 귀국하여 과학기술 한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 베트남 판 과학기술연구원(V-KIST) 설립을 위한 사업이 2017년 11월 21 베트남 하노이에서 시작되었다. 수교교섭 당시 베트남이 벤치마킹했던 프로젝트다. 한국의 대법원은 베트남의 사법제도 개선을 위한 협력을 제공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역량강화사업에 부장판사를 현지에 파견하여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베트남은 보통의 이웃이 아니다. 한국과 너무도 비슷한 점이 많다. 한자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유교적 전통도 남아 있어서 서로 이해하기 쉽다. 뜨거운 사막의 중동지역은 물론이고 극한의 시베리아에서도 일할 수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 한국인과 베트남인뿐이라고 한다. 9500만 베트남 인구의 대부분은 매우 젊고, 부지런하고, 머리와 손재주가 우수하고, 한국처럼 문맹이 없다. 이른 새벽이면 남녀노소가 공원이나 운동장에서 걷거나 운동을 하는 모습도 다른 개도국들과 다른 점이다. 스스로 돕는 자들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정말 야무진 꿈을 가졌다. 전쟁에서 벗어나서 아직도 빈곤의 냄새가 가득하던 시기에 그들이 만든 경제건설의 구상 중에는 경공업뿐만 아니라 중공업건설의 원대한 포부도 포함시켰다. 동남아 지역의 경우 중공업건설구상은 매우 희귀한 예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남달랐고, 그들이 따르려는 모델은 바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 공업화 과정이었다. 

자본은 일본에서, 경공업은 대만에서, 그리고 중공업은 한국에서 들여오겠다고 계산하였다. 한·베트남 수교 훨씬 이전부터 베트남의 지도자와 경제 관료들은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을 교과서로 만들어 공부하였다. 지금 현재는 IT, 바이오와 같은 미래의 최첨단 산업구축을 위해 한국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하기야 옛날 독립운동을 하던 호치민도 그의 머리맡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두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국제적 전략 감각도 남다르다. 과거의 적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신속하게 복원하고 소련군함이 사용하던 항만시설을 미 군함에 개방하였다. 국제정세의 흐름과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냉철한 인식을 가진 결과다. 그들은 현명하기에 일시적 감정의 한풀이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그르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이 약할 때에도 강대국의 무리한 요구에는 굴종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의 조공체제 복원이라는 망령에는 결연하게 맞설 것이다.

베트남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중국을 둘러싼 14개국 중 한국과 베트남만이 수천 년간 중국이라는 제국 옆에서 독립을 유지해온 데 대해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특히 베트남은 13세기 초 쿠빌라이 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 당시 백만 몽골대군의 세 차례에 걸친 침공을 격퇴한 데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과거나 현재나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비겁하지 않다. 베트남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간다. 가히 영국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방불케 한다. 2014년 5월 중국이 남중국해 파라셀군도 해역에서 대륙붕 유전시추를 시도하자 빈약한 연안경비정들이 중국선박과 충돌하는 공격을 감행하고, 베트남 내 중국기업에 대한 격렬한 반중시위가 일어났다. 중국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결연한 자세에 아무리 대국이라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1979년 베트남과 중국의 전쟁에서 중국이 혼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가 배워야할 점이 너무 많다.

베트남과 인연을 맺었던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대해 형제애와 같은 진한 애정을 느끼고 있다. 2009년부터 양국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고 미래를 향한 협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양국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상생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개발협력의 성공적 모델을 만들고 있다. 현재 6%대의 성장을 계속하는 베트남이 경제발전에 성공하면, 그야말로 한국-베트남 모델이 전 세계 개발도상국의 참고서가 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패권국가의 무리한 독주가 일어난다면, 두 나라는 역동성 있는 오피니언 리더로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으로서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돕고 배워야할 형제 국가다. 서로의 자긍심을 존중하면서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야 한다.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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