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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귀족 민주주의 시대 (서기 1573년 - 서기 1763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완전히 하나의 나라로 합쳐지고 국왕을 모든 귀족들이 모두 참가하는 자유선거에 의해서 선출하는 새로운 체제를 폴란드 귀족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자유를 중시하는 폴란드인들의 기질에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대의 특징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만장일치제에 입각하여 의회에서 국가의 주요 결정이 이루어졌다. 즉, 의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의 거부권 - 리베룸 베토 (Liberum Veto) - 이 인정되어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모든 결의는 무효가 되었다.

폴란드 국왕의 지위가 세습되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 의하여 선출하는 제도는 이론상으로는 유능한 인재를 국왕으로 추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출된 국왕이 자신의 세습 영토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국익을 희생시키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특히 폴란드보다 자국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부하던 프랑스나 독일 출신의 국왕을 선출하였을 경우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났다.

1) 헨리크 발레지 (서기 1573년 - 서기 1575년): 무능하지만 외교적 필요에서 선택되었던 국왕

1573년 첫번째 선출된 국왕 헨리크 발레지 (Henryk Walezy)는 그가 프랑스의 왕자가 아니었다면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폴란드의 귀족들은 서유럽의 대국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고 헨리크 발레지를 통하여 프랑스로부터 많은 경제적, 문화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폴란드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고 폴란드의 추운 날씨와 과도한 음주 문화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으며 유흥에 몰두하여 국가 재정을 탕진했다. 반면 폴란드인들은 국왕이 귀걸이를 하고 향수를 뿌리며 화장하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 없어 했고 프랑스에서 온 남자들이 보석과 같은 장신구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나약한 인물들이라고 평가하며 우습게 생각했다.

1574년 그의 형 프랑스 국왕 샤를 9세가 사망하자 헨리크 발레지는 즉각 귀국하여 프랑스 국왕 앙리 3세로 즉위하고 1575년 폴란드 국왕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그는 종교전쟁 - 위그노 전쟁 - 중에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으면서 프랑스 전체를 대혼란으로 몰아넣었고 1589년 암살당했다. 다만, 프랑스에는 존재하지 않던 변소를 폴란드에서 발견하고 루브르 궁전에 설치하여 화장실의 개념을 서유럽에 도입한 것은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2) 지그문트 3세 바자 (서기 1587년 - 서기 1632년): 유능하나 자신의 야망을 우선시했던 국왕

1587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귀족들은 스웨덴 왕실의 지그문트 바자 (Zygmunt Waza)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의 모친이 과거 폴란드 왕실이었던 야기에워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경쟁자였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실의 대공 막시밀리안 3세를 누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국왕에 즉위한 이후에도 자신의 세습 영토를 차지하고 싶은 야망을 억누르지 못 했다.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 강대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통치자로 즉위하였으니 이는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1592년 그는 부왕 요한 3세의 사망 이후 스웨덴의 왕위도 차지하였으나 루터교를 스웨덴의 국교로 정하도록 요구하던 웁살라 집회 (Convention of Uppsala)의 결의에 반대하다가 1599년 왕위를 박탈당했다.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그의 숙부가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즉위하자 폴란드는 스웨덴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1605년 키르홀름 (Kircholm)에서 폴란드군이 스웨덴군을 격파하였으나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의 왕위를 다시 찾아오지는 못 했다.

1605년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던 가짜 드미트리가 폴란드 귀족들의 도움으로 모스크바에서 즉위하였다가 살해당하고 스웨덴의 지원을 받은 바실리 4세가 새로운 러시아 황제로 즉위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무력으로 러시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심하고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1610년 스타니스와프 주우키에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은 크우쉰 (Kluszyn)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바실리 4세를 바르샤바로 압송했다.

오랜 내전에 지친 모스크바의 귀족들은 폴란드를 지배자로 받아들이며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에게 러시아 황제의 직위를 제의하였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가 러시아인들에게 카톨릭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면서 폴란드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1612년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시조가 되는 반란군 지도자 미하일 로마노프가 모스크바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만약 지그문트 3세가 카톨릭 신앙으로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를 결합시킬 생각을 버리고 카톨릭, 루터교, 러시아 정교회를 각각 국교로 인정해 주었다면 세 나라 모두 그의 지배 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후대 폴란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지그문트 3세의 가장 큰 실책은 1618년 프로이센 공국의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겼을 때 그 영토를 회수하지 않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일원이던 독일 베를린 일대를 지배하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게 해당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치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강대함을 유럽 전체에 과시한 영광의 시기였던 반면 그 동안 번영해 오던 폴란드 경제가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폴란드인들이 빈곤의 늪에 빠졌던 불안정한 시기였다.

3) 얀 2세 카지미에쉬 바자 (서기 1648년 - 서기 1668년): 선왕에게 침략당했던 주변 국가들의 대대적 반격에 시달렸던 국왕

1648년 지그문트 3세 바자의 둘째 아들이 폴란드 귀족들의 회의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어 얀 2세 카지미에쉬 바자 (Jan II Kazimierz Waza)로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에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의 전신인 코사크, 러시아, 스웨덴 등과의 전쟁에 시달리다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코사크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 이용당해 왔다는 인식 하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으나 폴란드군에 진압당했다. 이들은 러시아 황제를 찾아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합병하는 대신 자치권을 허용해 줄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1654년 러시아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쳐들어 오면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폴란드가 러시아와 전쟁을 하던 중인 1655년 스웨덴의 국왕 칼 10세 구스타프는 폴란드 전체를 정복하여 지그문트 3세 바자의 후손들이 자신의 왕위를 넘보지 못 하게 하겠다는 의도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침공하였다.

러시아군과 전쟁을 치르느라 폴란드군이 전선에 묶여있는 동안 스웨덴 군대는 폴란드 전역을 약탈하였는데 마치 홍수처럼 폴란드를 휩쓸었다고 하여 이를 "스웨덴의 대홍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1657년 독일인 거주 자치령이던 프로이센 공국이 폴란드로부터 독립하였다.

4) 얀 3세 소비에스키 (서기 1674년 - 서기 1696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전쟁영웅 출신의 국왕

러시아나 스웨덴과 달리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폴란드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초강대국이었다. 1672년 오스만 투르크 대군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는 굴욕적인 조건 하에 강화조약을 맺으려고 하였으나 폴란드인들의 반발로 얀 소비에스키 (Jan Sobieski) 장군 지휘 하에 3만명의 군대를 모집하여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결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얀 소비에스키는 1673년 호침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승리를 거두고 다음 해에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657년 폴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던 프로이센 공국을 점령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완전히 병합하는 것을 자신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투쟁에 국력을 소모하여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얀 3세 소비에스키는 1683년 카톨릭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여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던 이슬람 세력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이 당시 오스만 군대의 막사에 남아있던 커피 원두를 사용하여 폴란드인 콜쉬츠키가 오스트리아 빈에 최초로 카페를 열었는데 이 곳에서 오스만 제국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인 크루아상을 커피와 함께 판매하여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5) 아우구스트 2세 (서기 1697년 - 서기 1706년, 서기 1709년 - 서기 1733년): 자신의 세습령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국왕

1697년 독일의 작센공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었는데 힘이 센 남자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트 2세 강자왕 (August II Mocny)이라고 후대에 명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세습영지 작센 공국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보다 우선시하였고 주변국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치한 채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전념하였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러시아에 서유럽의 선진 문물을 참조하여 각종 개혁에 착수하고 경제발전에 주력하였다. 그의 치세 하에서 러시아는 해군을 창설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면서 유럽 세계와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러시아가 급속히 발전하자 기존의 강대국들인 폴란드, 스웨덴 등은 점차 위축되어 갔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면서 프로이센 공국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1세는 양국의 영토를 합병하여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을 수립하고 국왕에 즉위하였다. 프로이센 국왕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및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대외적으로는 King of Prussia가 아닌 King in Prussia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자국의 영토였던 프로이센 공국을 되찾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1700년 아우구스트 2세가 통치하던 작센 공국이 러시아와 함께 스웨덴을 공격하자 중립을 지키던 폴란드의 국토가 러시아군과 스웨덴군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에 대한 폴란드 귀족들의 반발로 아우구스트 2세가 1706년에 폐위되었다가 러시아의 도움으로 1709년에 복위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그 이후 폴란드 귀족들은 국왕의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1717년 러시아군의 개입에 의하여 양자가 화해하게 되는데 러시아의 압력에 못 이겨 폴란드 군대의 숫자를 24,000명으로 제한하기로 하는 결의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과거의 강대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수십만의 정규군을 보유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 포위되어 망국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폴란드 귀족들은 "폴란드는 더 이상 외국에 위협이 되는 군사강국이 아닌데 왜 이웃나라들이 우리를 공격하겠는가?"라고 안이하게 생각하였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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