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에 '비겁한 지도자-親日 인사' 왜곡된 이미지 형성
李대통령이 6.25전쟁 발발 ‘이틀’만에 망명 타진?...잘못된 사실
이승만 정부가 망명 요청했다는 신뢰성있는 공식자료 발견안됐지만...매년 반복되는 오류들
KBS 공영노조 "(가정법 표현쓰며) 팩트 확인 안됐다는 것을 자인한 선동선전"
KBS, 관련보도만 수차례 이어갔지만...공신력과 파급력에 비해 검증 불충실
담당기자 박재우 "순수한 의도로 취재...굳이 몇년 지난 일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나"
당시, KBS간부 4명 보직해임하자 언론노조 KBS본부-좌편향 매체 등, '보복성 인사'라며 맹비난

KBS는 2015년 6월 24일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日에 망명정부 수립 시도”(박재우 기자)>라는 이른바 '단독 보도'를 내보냈다. 같은날 KBS의 인터넷 판으로는 <[단독]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KBS는 다음날인 6월 25일에도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선조와 이승만(석혜원 기자)>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기사를 내보내며 이승만 대통령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북쪽으로 도주했던 조선 14대 왕 선조에 빗대며 부정적 인식을 극대화했다.

이같은 KBS 보도들은 공영방송 KBS의 공신력과 영향력에 힘입어 국민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KBS 보도는 다른 상당수 언론사,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의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좌파성향 언론사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이 대통령에 대해 ‘전쟁이 터지자 비겁하게 도망친 국가지도자이자 친일파’란 식으로 조롱섞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상당수 매체들은 북한의 6.25 기습 남침 당시의 긴박하고 입체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구미에 맞는 몇 가지 내용을 엮어 이승만에 대해 ‘국민을 버리고 혼자 살려고 도망치려한 비겁자’라는 이미지로 몰아붙이는데 집중한 모습이 나타났다. 팩트 확인이나 사실검증은 도외시됐다.

KBS 보도가 도화선이었지만, 많은 매체에서 무비판적으로 달려들어 '이승만 때리기'에 힘을 실어줬던 만큼 이 보도는 KBS만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던 당시 팩트 확인이 잘못된 부분이 드러나면서 KBS는 해당 기사를 삭제했고 담당간부들을 보직해임했다. 이 보도 못지않게 엄청난 오보(誤報)를 내보내고도 자성도, 사과도, 책임도 지지 않는 상당수 언론사보다는 그나마 후속조치가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수많은 매체에서 KBS를 인용해 이어간 '이승만 비난' 보도들은 지금도 낙인찍기처럼 남아있고 실 검증이 부실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퍼진 정보에 대한 후유증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후 개설된 한 친(親)여당 성향 트위터 페이지는 올해 6월 29일에도 KBS에서 오류가 확인돼 삭제된 정보를 그대로 인용했던 강성좌파 인터넷 매체 '민중의소리'의 3년 전 기사 링크를 게재했고, 이는 1300여 건이 훌쩍 넘게 공유되기도 했다. 

●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발발 ‘이틀’만에 망명 타진?...잘못된 사실

KBS는 2015년 6월 24일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日에 망명정부 수립 시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야마구치 현의 공식 역사 기록을 근거로 하여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 일본 외무성은 야마구치 현 지사에게 한국 정부가 6만 명 규모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 현에 세우고 싶다'고 알려왔다며 가능한지 물었고, 당시 '다나카' 지사는 일본 주민들도 배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어렵다는 답변을 합니다.”라고 보도했다.
KBS는 2015년 6월 24일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日에 망명정부 수립 시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야마구치 현의 공식 역사 기록을 근거로 하여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 일본 외무성은 야마구치 현 지사에게 한국 정부가 6만 명 규모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 현에 세우고 싶다'고 알려왔다며 가능한지 물었고, 당시 '다나카' 지사는 일본 주민들도 배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어렵다는 답변을 합니다.”라고 보도했다.

KBS는 2015년 6월 24일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 정부 요청설’을 보도한 이후 10여일 후인 7월 3일에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 망명 정부 요청설’ 부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놓으며 일부 잘못 전달된 내용을 인정했다.

해당 기사 말미에는 “KBS가 (6월 24일에) 보도한 야마구치현 기록은 망명정부 요청이 전쟁 초기 상황으로 묘사돼 있을뿐 보도에서 나온 6월 27일이란 날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라며 날짜 인용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정정했다.

앞서 KBS는 6월 24일, ‘야마구치현의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야마구치현 지사는 외무성으로부터 한국정부가 전쟁 발발 이틀 후 망명 정권을 야마구치현에 세우고 싶어한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적혀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10여일 후 비판이 거세져 확인해보니 기록에는 ‘이틀 뒤’라는 표현이 없었다고 수습하고 나선 것이다.

다만 2015년 7월 3일, KBS는 잘못 전달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앞세워 비중있게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주장’을 통해 우회적으로 반론 보도를 내보냈다. ‘날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KBS의 정정 문구’는 7월 3일 방송될 당시 자막조차 없이 지나쳤다. 당시 10여일 동안 좌편향 매체들에서 KBS에 힘입어 인용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여론을 형성한 것을 감안하면 충분한 후속조치라고 보긴 어렵다.

추가 확인결과 '야마구치현 기록에 '6월 27일'이라는 날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한 KBS와 YTN

그러나 해당 정정내용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당연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으로 비춰지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반박은 대중들에게 크게 설득력있게 다가가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며, 대다수는 자극적인 정보를 수용한 이후 해당 사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기 힘든 측면도 있었다. 객관성과 공공성을 담보하는 듯한 KBS의 첫 보도는 사람들에게 기억에 인상깊게 남았고, 이를 조롱하는 내용들에 대한 접근도가 더 높은 양상이었다.

당시 날짜가 중요하게 인식된 이유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토와 국민에 대한 수호 의지 없이 전쟁 발발 불과 이틀 만에 곧바로 망명정부 수립 계획부터 세우고, 개인 일신만을 위해 도망치는데 집중하여 일본 망명을 요청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KBS보도는 KBS의 공신력에 힘입어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이틀만에 자기 목숨만 살려고 도망치려했다는 식으로 해석됐고, 이를 인용한 많은 사회인사 등을 통해 확산되며 전쟁 당시 자세한 전후사정과 흐름을 모르는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이승만 대통령은 비겁자이자 친일 인사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쉽게 조성했다.
 

당시 트위터를 통해 확산된 트위터글 갈무리
당시 트위터를 통해 확산된 트위터글 갈무리

● 망명설이 기록된 문서 자체는 사실인가, 아닌가?

일단 일본 외무성의 공식적인 문서나 한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청했다는 자료는 현재 발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야마구치현에서 적은 내용을 토대로 단정짓든 보도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처음으로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설’과 관련된 보도를 내보낸 박재우 기자 또한 리포트 말미에 “사실이라면 6.25 초기 정부의 상황이 어땠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라며 가정법을 활용했다. 이와 관련해 KBS공영노조측은 ‘선전선동이 돼버린 KBS뉴스’라는 성명을 통해 “뉴스 본문에서 ‘사실이라면’이란 표현을 써가며 팩트 확인이 안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선동선전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20년이 지난 자료를, 그것도 대한민국정부나 일본 외무성의 공식자료가 아닌 일본의 일개 현(縣)의 자료를 가지고 대한민국을 세운 초대 대통령을 폄하하는 근거로 제시했다”며 공영방송의 파급력에 비해 신뢰도를 제대로 검증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했다. 당시 정부 공식 기록이 아닌 야마구치현 자료만을 근거로 망명정부 요청설을 제기한 것은 무리한 왜곡이라는 것이다. 기록이 단순 풍문에 근거할 수도 있으며, KBS에서 인용한 미군정 기록도 일본 정부가 자체적으로 난민수용에 대비한 것일 수 있지만 우리 정부의 요청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일본 망명과 관련된 내용이 산발적으로 제기되기는 했다.

박재우가 야마구치현에서 발견했다는 기록물 ‘야마구치현사 사료편 현대2’도 그중 하나이다. 대신 해당 자료는 낙동강 전투가 진행되던 다급한 시점인 8월하순경이라고 추정되며, 누가 누구에게 어떠한 목적과 절차로 망명을 추진했다는 것인지 확인되지 않아 공식적인 자료로 인용되기에는 힘든 자료라는 지적이다. 또한 해당 기록물은 앞서 1996년 4월경 일본 언론 중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는 산케이신문을 통해 인용돼 국내 언론보도에도 보도된 바 있다.
 

경향신문 22면(1996년 4월 14일)

또한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의 기록을 남긴 미국 외교문서 '미국대외관계, 1950, 한국, 7권(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KOREA, VOLUME VII)'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이 일본 망명에 대해 거론한 부분이 나온다. 당시 무초 주한 미국 대사는 6월 27일 오전 8시에 미국 국무장관에 보낸 서류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에 망명정부로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내게 타진했다. 이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적힌 내용이 나온다.
 

미국대외관계

해당 문서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으로 망명시키는것에 대한 문의를 하는 모습이 나타나며,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공식적으로 망명을 추진했다는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새벽 3시경, 내각은 7시경 서울에서 벗어난 시점이었다.

무초 대사가 신성모 국방장관의 문의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미 국방부에 전달한 것으로 비춰보면, 망명 요청이 공식적인 의사를 전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 국가의 외교관이 공식적으로 망명요청을 했다면 그걸 미 대사가 개인적으로 답변안하고 끝낼 사안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만약 공식적인 문의였다면, 무초가 다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망명과 관련된 논의를 해야하지만, 이후 언급이 없었을뿐더러 공식적인 명령이나 공식적인 문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국-연합군의 점령지인 상태였으므로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전쟁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신성모 장관이 개인적으로 동맹국 미국에게 문의했다고 바라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지적이다. 당시 KBS는 앵커멘트에서 “이승만 정부가 실제로 당시 미 군정을 통해 일본 정부에 '6만 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의 비밀문서를 KBS취재진이 처음으로 확인했습니다”라고 전달한 바 있다.
 

미국 외교문서 ‘미국대외관계’를 잘못 해석하고 인용한 내용들이 별다른 검토없이 인용돼 퍼지기도 했다. 오마이뉴스의 김종성 시민기자는 2013년 8월 29일 <일본 망명정부 구상한 이승만, 선조와 닮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승만에 대해 선조를 무색케하는 무책임한 통치자라며 맹비난했다. 당시 오마이뉴스가 근거로 들었던 것은 ‘미국대외관계’이다. 김종성 기자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일본 망명 계획을 세웠다”며 “교도통신이 제시한 자료는 전 야마구치현 지사이자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다”라고 설명한다.

이어 “이승만은 존 무치오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서울이 함락된 것은 6월 28일이었다. 이승만은 서울이 함락되기도 전에 일본 망명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또한 “원수의 나라에 망명정부를 꾸리려 한 이승만”이라는 소제목 아래 “그는 조선을 식민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도 혐오감을 표시했던 일본에 망명정부를 꾸리려고 했다. 그런 인물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수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맹비난한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의 보도는 번역부터 잘못됐다. 실제 <미국대외관계>의 문구는 상기에 서술됐듯이 “신성모 국방장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에 망명정부로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내게 타진했다. 이에 대해 나(무초 주한 미대사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오마이뉴스가 근거로 든 ‘미국대외관계’와 ‘야마구치현 지사의 회고록’을 근거로 들었지만, 두 기록 어디에도 이승만이 직접 혹은 공식적으로 일본 망명을 문의한 부분은 나타나지 않았다. 악의적인 감정에 기대어 무비판적으로 작성하는 잘못된 정보들은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매년 망령처럼 반복되며 유포되고 있는 실정이다.

● 戰時라는 입체적 상황 고려해서 당시 상황 이해해야

전쟁 발발 직후 혼비백산한 상황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망명을 희망하거나 사람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불확실한 정보들이 와전되기도 하며 신뢰성 있는 정보가 남지 않은 상황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당시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일본 망명성을 타진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의 제주 이전도 반대했는데 일본 망명 정부를 타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인수 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은 KBS 인터뷰에서 "항상 6.25 사변 중에서도 권총을 옆에다 놓으시고 주무셨어요. 결국 싸우고 죽는다 이것이지"라며 "이땅에 일본인들이 오게 되면 공산당에 겨누었던 총을 그놈들한테 먼저 겨누겠다고 그러셨거든요."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누구보다 일본군을 더 미워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인용되는 내용으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6.25당시 기록한 일기도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2015년 8월14일, '무초 미국대사는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가자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권총을 빼어들면서 단호한 의지를 피력했다'는 내용을 일기에 적었다. 또한 KBS가 당초 보도했던 6월 27일은 장면 주미 한국대사와 트루먼 대통령 면담 기록에 따르면, 결사항전의 의지를 전하며 무기 지원을 간곡히 호소했고, 그날밤 무초 주한 미국 대사관이 지원 의지를 밝힌 시점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미국 등 연합군이 점령하던 상태인만큼,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싶었더라면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히며 무기 원조만 호소한 상황인 것이다.

● KBS, 관련보도만 수차례...공신력과 파급력에 비해 검증 충실했나

KBS는 <[단독]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는 제목으로 '이승만 정부의 (공식적인) 일본 망명 요청설'을 기정사실화하는 인터넷 기사를 내보냈다. 또한 다음날 KBS 석혜원 기자는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선조와 이승만>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기사에서 "그동안 논란이 돼 왔던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 요청설이 KBS 취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며 이승만 대통령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도주했던 조선 14대 왕 선조에 빗대며 부정적 인식을 극대화한다. 이어 "KBS 주말드라마 <징비록> 속에서도 이같은 선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며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왕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분노보다는 한숨이 앞선다."고 말하며 많은 이들에게 선조와 이승만 대통령을 치환해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KBS가 인용한 자료들로만은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일본에 망명을 요청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자료가 부실하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이에 따라 당시 KBS 간부 4명이 2015년 7월 15일 보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 보도와 연관된 보도국 국제부 주간과 부장을 각각 심의실 심의위원과 디지털뉴스국 평기자로 발령냈으며, 디지털뉴스국 국장과 부장은 심의실 심의위원과 라디오뉴스제작부 평기자 발령을 받았다.

또한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효종, 이하 방심위)가 이승만 정부가 한국전쟁 초기 일본 망명을 타진했다고 보도한 KBS <뉴스9>(6월 24일 방송)에 대해 2015년 8월 27일 법정제재인 ‘주의’(벌점 1점) 조치를 결정했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 제2항 및 제14조(객관성)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방심위원 9인 만장일치로 중징계인 ‘주의’를 결정했다. 주의는 법정제재로 방송사 재허가시 감점이 되는 징계이다.

당시 여권(현 야권) 추천의 함귀용 심의위원은 “KBS가 전쟁 초기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망명요청을 했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보도한다면서 최소한의 검증을 했어야 하는데 국제부 데스크는 특파원이 쓴 것을 그대로 보도국에 넘기고, 보도국 역시 검증 없이 보도한 것이 안타깝다”며 “현사엔 6월 27일이라는 기록이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자막에까지 날짜를 넣어, 이 보도를 본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에 망명가려 했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좌파 성향의 언론노조 KBS본부 등은 오보에 대한 책임지는 자세보다는 부당한 ‘보복성 인사’라며 맹비난하고 나섰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전례를 찾기 힘든 굴욕적인 반론보도를 했는데도 사측이 보도 책임 라인에 있는 간부들을 전원 보직해임했다”며 “보도의 독립성이라는 공영방송의 가장 큰 가치를 내팽개친 명백한 징계성 인사”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이인호 KBS이사장을 뉴라이트 성향 학자라며 징계성 인사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 해당 기자 "순수한 의도로 취재...굳이 몇년 지난 일에 대해 언급할 필요 있나"

펜앤드마이크(PenN)는 당시 KBS보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자가 알지 못하는 이면이 있었는지, 혹은 의도와 다른 부분이 있을지 문의하고자 첫 보도를 내보낸 KBS 박재우 기자(이하 경칭 생략)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재우는 "누가 (취재를) 하라고 한 것은 전혀 없으며 순수한 의도로 취재했던 것"이라며 "다른 의미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미 몇 년 지났는데 이제와서 또 쓰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며 "(몇년 지난 일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팩트에 대해서 취재를 더 해보시는게 오히려 국민들이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이어 야마구치현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은 '전쟁 발발 이틀 후'라는 시간을 적시해 보도한 경위에 대해 묻는 질문에는 "다른 특별한 계기나 의도는 없다. (잘못된 보도로) 개인적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다"며 수년이 지난 일에 대해 거론하는 것에 불편함을 토로했다. 앞서 국제부 데스크인 김태선 기자는 2015년 방심위 소위에 참석해서 이와 관련해 “박재우 특파원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리포트 제작 자문 과정에서 정우종 박사(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의 도움을 받았고 개전 당시 상황에 대해 여러 자료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며 “정 박사에게 들은 날짜가 6월 27일이었고, 이를 착각했다는 게 해당 기자의 설명”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보도는 KBS의 공정성에 힘입어 공신력있게 전파됐고, 많은 매체들에서 KBS를 인용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비겁자나 친일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 당시 이승만 기념사업회 등에서는 오명에 덧씌워져 상처받았다고 토로하는 분들도 있고, 여러 언론에 나온 정정되지 않은 정보들로 인해 현재까지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이세영 기자 lsy215@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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